문득 ‘연애’란 단어의 정의가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간단한 정의를 내려준다.

 

연애(戀愛) :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연애가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이렇게 간단히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구나. 새삼 연애란 단어가 낯설어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을 들여다봐도 저건 내가 아는 연애가 아닌 것만 같다. 내가 아는 연애는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예쁜 단면이 아닌 그 짧음의 유희가 지난 후 그걸 지켜내거나 혹은 떨쳐버리기 위해 몸부리치던 지난한 시간의 다름 아니였기에. 그래서 오히려 내게는 다음의 연애란 정의가 더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연애(憐愛) : 불쌍하게 여겨 사랑함.

 

과거 어느적에 나는 저 말을 내 연애 상대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 어떻게 진정으로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느냐.’며 울먹이던 사람. 짧은 戀愛로 시작해 긴 시간의 憐愛를 지나 결국은 ‘We are history’가 되고 말았던, 이제는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한 흔적마저 퇴화되어버린 연애. 그때 만약 처음부터 憐愛로 시작했더라면 그 연애는 다른 결말을 맞았을까.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던 건 「판녀」라는 단편 때문이다.

 

아까 사실, 당신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어. 내가 보고 있다는 거 몰랐지? 꼭 사막이나 바다를 마주하고 선 사람 같더라. 그런 경우 있잖아? 너무 멀어 출발을 못 하는. 「판녀」中

 

마치 미대 다니는 누이를 마주한 듯도 하고, 멀리 떠나는 애인의 마지막 모습을 각인하고 있는 가난한 여인을 만난 듯도 했다. 나는 공연히 호젓해지고 공연히 비장해졌다. 그러니 창녀와 화가의 구분이 어디 필요할 것인가. 「판녀」中

 

하루살이 인생을 살던 남자와 화가를 꿈꾸던 창녀의 긴 시간에 걸친 우정에 가까운 사랑 혹은 사랑을 닮은 우정. 서로의 ‘결여’를 먼저 알아봐 주었기에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을 서로에게 해주었고, 그 응답은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덤덤한 인생살이를 견디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_ 신형철 씨네21 칼럼 <신형철의 스토리-텔링-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中

 

연애 처지 비슷한 친구에게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발」 중 기억에 남는 문장인 ‘발 주면 다 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 발을 주물러라.’를 말해 준 적이 있다. 이에 그 친구의 반응은 ‘내가 그 동안 발만 준줄 알아? 그런데 이게 뭐냐고.’였다. 이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중 문득 「그 여자의 연애사」의 한 단락이 떠올랐다.

 

남자들은 늘 어떤 이유가 있었다. 외롭다, 아프다,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엄마가 죽었다…… 그런 날 밤이면 서둘러 끌고 갔고 급하게 벗겼으며 환장을 하며 파고들었다. 밤 내내 칭송하고 토닥이며 되풀이하여 원했다. 남자를 만나면 그녀가 예쁘고 사랑스런 존재가 되었던 이유다. 그래서 남자가 좋았다. 남자들이 원했던 것은 딱 두 개, 가슴과 아랫도리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게 무어든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과 훼손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_「그 여자의 연애사」 中

 

이에 대한 그 친구의 반응은 이랬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아파하고 얼마나 더 큰 훼손을 입어야 내 연애는 완성이 되는 걸까.’ 자조 섞인 저 물음에 난들 뾰족한 대답이 있을리 만무했다. 다만 이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과연 연애의 완성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흔히 말하는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 이것이 과연 연애의 완성일까.

 

사랑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약함의 시간이다. 간간이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소심함, 무력함, 요컨대 애정의 패배, 바로 그것이다._ 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中

그 며칠후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성공한 사랑보다 실패한 사랑에서 우린 깨닫는 게 분명 더 많을 거라고. 성공으로 향하는 지루한 연애보다 실패로 향하는 버라이어티한 연애야 말로 우리 인생에는 더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친구야, 분명 언젠가는 ‘숱한 이동과 이별의 마침표를 찍어줄 인연 하나가 바다 위 널빤지처럼 저만치에서 떠내려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그 남자의 연애사』 표지에서) 라고. 그때가 되면 우리를 아프게 했던 숱한 실패의 연애들이 그 인연을 밝혀줄 등대가 되어줄 거라고.

 

‘연애란 갈증과 원망에 감염된 염증이 같은 부위에서 계속 재발되는 소모성질환 같은 것이다.’(「그 악사의 연애사」 中) 라고 한때는 나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연애 경험도 많아지고 나이도 어리지 않다보니 연애가 계속 재발되는 소모성질환이긴 하되 그 원인되는 염증이 갈증과 원망에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과 운명에 감염되는 것이라 믿고 싶어진다.

 

마음

 

곽재구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 군데입니다

작은 창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그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작년, 올해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 여성작가의 장편소설로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편혜영의『재와 빨강』, 김미월의『여덟 번째 방』, 천운영의『생강』그리고 김애란의 『두근 두근 내 인생』까지. 단편소설로 익히 그들의 글발은 알아온 터라 더욱 기대가 되었던 장편소설들. 특히나 편혜영과 김미월 그리고 김애란은 생애 첫 장편소설이니 그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첫 만남이 남다를 수밖에...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같이 가슴 두근거린 사람 여러 있었을 듯...

『두근 두근 내 인생』제목만 봐도 김애란 작가가 떠오른다. 『달려라 애비』『침이 고인다』를 잇는 유쾌한 듯 친근한 제목. 과연 단편소설의 눈부심이 장편에도 빛을 발할까. 기대감 반 의구심 반으로 표지를 넘기고 두 페이지의 <프롤로그>를 읽은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울지...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라는 문장 뒤로 펼쳐질 무심한 듯 새삼 비밀로 가득찬 ‘인생’이 두근 두근 펼쳐지리라는 걸 단 한 장의 글로 보여주는 임팩트한 시작. 역시 김애란이다.

17살 미라와 대수. 이들이 바로 주인공 아름이의 부모다. 학교가 시키는 대로 사는 또래들과는 다르게 조금 일찍 세상의 비밀에 발 담근 후 어찌 살까를 고민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 그 후 지구 위 모든 생들이 그러하듯 짝짓기의 즐거움에 빠져 덜컥 임신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제 앞에 나름의 거부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결국 부모가 되기를 선택했고 그리하여 아름이란 가장 늙은 하지만 가장 사랑스런 자식을 얻게 되었다.

한아름. 17세. 조로증 환자. 현재 17세인 그의 신체 나이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나 다름없다. 세 살 때부터 증세를 보여 온 아름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에서 혼자 홈스쿨링을 한 대견한 아이. 온갖 책을 두루 섭렵하여 아는 것도 많고 감성도 풍부한 아이. 유일한 친구라고는 동네 장씨 할아버지가 다인 아이. 어느날 아름은 병원비를 걱정하는 부모님을 위해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다큐프로에 출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아름에게도 같은 나이의 여자 친구가 생기게 되는데...

순수하게 발랑까진 시골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 나이보다 너무 늙어버린 몸과 나이보다 너무 큰 마음을 가진 17살 소년의 인생이야기. 그 인생에 끼어든 두 명의 친구이야기. 만나고 사랑하며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야기. 작가는 조로증인 17세 아름이란 오선지 위에 아이, 소년, 어른, 노인을 멋들어지게 늘여 놓아 한 편의 아름다운 합창곡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이 나다가도 무심한 듯 소소한 세상 이치에 눈물이 찔끔 나는, 이렇듯 완벽한 하모니로 인한 감동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내 심장은 ‘독고진’의 그것처럼 두근 두근 벅차게 뛰어오른다.

이 소설은 작가의 첫 장편에 대한 욕심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소설 속 또다른 글들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다큐프로를 통해서는 방송 특유의 내레이션글이, 아름이과 서하의 메일을 통해서는 편지글이 그리고 마지막 <부록>에서는 하나의 완벽한 단편소설이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번 소설을 오랫동안 품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정성스레 오랫동안 품어왔던 결실은 그야말로 그 누구의 심장이든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감동이라는 거!!

 

 

서울 자취방으로 컴백홈했을 때 나를 반긴 건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컴백홈』이었다. 책을 받아들고 제일 먼저 생각했던 건 어느새 이렇게 또 일년이 흘렀구나, 였다. 3회 수상작을 읽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회 수상작이라니... 하릴없이 시간은 참으로 잘도 흘러가는구나 싶은 생각에 새삼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었던 책『컴백홈』은 요즘 한 참 언론몰이를 하고 있는 서태지를 먼저 떠오르게 했다.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 돌연히 은퇴선언을 해버린 후 가장 쇼킹한 사건으로 2011년 한반도를 들썩였던 서태지. 작가의 나이를 보니 그 역시 나처럼 서태지 세대라는 걸 알았고 문득 동시대인이 말하는 서태지 그리고 ‘컴백홈’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130kg에 육박하는 유미는 학교에서는 공식 지정 왕따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절친이었던 지은은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집단의 짱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괴롭히고 뢰롭힘을 당하는 관계이지만 둘만 있을 때는 유미에게 지은은 둘도 없는 친구다. 어느날 지은이 임신을 하게 되어 다른 지역의 미혼모보호시설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유미는 더 이상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지은을 찾아 가출을 한다. 둘은 ‘둥지’라는 시설에서 함께 지내면서 새삼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의 내용은 ‘서태지’라는 인물과는 그리 밀접한 관련이 없다. 다만 거대한 몸으로 인해 가족에게서는 물론 친구들로부터 무시와 괴롭힘을 당해오던 유미의 유일한 탈출구로써 서태지가 등장한다. 서태지같이 완벽한 인물이 이렇게 거지같은 세상에서 탄생했을리 없다고.. 그러니 나도 언젠가는 서태지가 온 달로 그와 함께 돌아갈거라는 믿음. 가장 괴로울 때 그녀를 지켜준 건 가족도 친구도 아닌 바로 망상에 가까운 이 같은 믿음이었다. 이것이 지금 청소년들의 현주소는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그 누구한테도 속시원하게 내뱉을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인물들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

유미는 거대하게 뚱뚱하고 지은은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하게 된다. 여자로서는 치명타인 몸의 문제를 각각 갖고 있는 것이다. 둘은 둥지에서 생활하면서 나름 위로와 평화를 얻는 듯싶지만 그 위로와 평화도 온전한 것이 아닌 그저 눈속임에 불구하다. 거식증에 걸려 다이어트를 하려던 유미는 또다시 음식을 탐하게 되고 자신의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은은 보호시설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그녀들은 여자의 몸을 중요시하는 세계에서 철저하게 패배자인 셈이다. 게다가 학생이란 신분은 그들의 고충을 더욱 돋아지게 할 뿐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이란 신분은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에나 본인에게 유리하지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가는 올무가 되어 그들 자신을 덮치기 일쑤다.

또다시 몸이 불기 시작한 유미.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고 미혼모시설을 나온 지은. 두 소녀는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했다. 어떤 괴롭힘을 당해도 꿋꿋하게 버티며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세뇌시키며 견뎌온 유미와 곧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될 지은은 과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세상이 상처투성이 그녀들을 다시 받아들여줄까. 고등학교 학업은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녀들이 앞으로 감당해야할 것들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님을...

여자이기에 겪어야 하는 아픔은 나이를 불문한다. 유미와 지은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학생이다. 스스로에게 닥친 문제를 바로 바라보기에는 버겁고 두렵고 힘겨운 나이다. 이중의 아픔을 겪어야하는 두 소녀의 고통은 소설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아픔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 또한 소설속 설정만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고통을 안고 사는 이 시대 소녀들이 진정으로 ‘컴백홈‘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