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1. 04.
히가시노 게이고 - <재인> \13,800

아, 정말 참신하다. 이런 형태의 추리 소설이라니......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이런 식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리즈 탐정'의 패턴은 정해져 있는 법, 어떻게 하면 클리셰를 깨뜨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사명인데, 대다수의 작가들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아..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손 발이 오그라 들었을까?

 이런 오글거림을 무릅쓰고 그는 <명탐정의 규칙>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을 더욱 더 강하게 심어 주었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을 써버린 이상 자신은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판에 박힌 트릭이나 표현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느껴지는 그의 자신감, 기백에 독자들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정말 앞으로의 작품이 너무나 기대되는 작가다. 

 사족_ 중반까지 읽으면서 이렇게 다 까발리고 나면 작가는 무엇을 더 쓸 수 있을까 걱정했다. 사실 추리 소설의 글감을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마지막에 궁지에 몰려 도착한 것이 <명탐정의 규칙>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작품의 마지막 챕터인 '명탐정의 최후'를 읽은 독자라면 아마 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범인이 알리바이 공작을 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에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기 때문에 알리바이의 허점이 들통 났을 때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의혹이 짙어도 증거가 없으면 체포할 수 없기 때문에 알리바이 따윈 없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범인들은 정말로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p124

아리바가 아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그걸 참고삼아 다시 한번 제 알리바이의 허점을 찾는 데 도전해 주세요. 제가 힌트를 드린 것은 독자에게 비밀로 해 둘 테니."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덴카이치는 쌀쌀맞게 거절했다. - p135

콧수염의 남자, 그는 오가와라 경감, 즉 나였다. 오가와라 경감이 내 쪽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요, 가네다 경감. 얼굴색이 안 좋네요." - p270

"독자들이 시리즈 탐정이 존재하길 바란다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경우에 따라 달라. 무리하게 시리즈 탐정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돼 버린 작품을 많이 알고 있어. 그리고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이번 얘기지. 솔직히 말해 이번 얘기에서 자네는 필요 없는 존재야. 불필요한 인물이었던 거지."...."이 작품을 구원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시리즈의 붙박이 탐정은 살해되거나 범인일 가능성이 없다는 독자의 선입견을 뿌리째 흔드는 거야. 그러려면 자네가 범인이어야만 해. 어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p355

 

히가시노게이고, 명탐정의규칙

10.08.14
히가시노 게이고 - <현대문학> \11,000

 "추리 소설의 묘미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다수의 독자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범인의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범인이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을 때' 등으로 이야기 할 것 같다.

 'Who done it?'과 'How done it?'은 추리 소설의 필수 요소이므로 대다수의 소설들이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여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물론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요소도 중요시 여기지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Why done it?'이라고 생각한다. <용의자 X의 헌신>, <동급생> 등 대다수의 작품이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답을 독자에게 쥐어준다. 그리고 덜컥 답부터 받은 독자는 '도대체 왜...?'라는 물음을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구조를 조금 변형함으로써 독자를 작가에 의해 이끌려다니는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 가는 능동적 위치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답은 이미 나와 버렸고 중요한 것은 이유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단서들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마치 내 스스로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탐정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답이 무얼까?'가 아닌 '답을 어떻게 찾아 갈까?'에 중점을 둔 것이 어마어마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답'이 아닌 '과정' 속으로 독자들을 밀어 넣는다는 것. 독자가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내가 그토록 히가시노 게이고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시 찾은 그의 <악의>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작품 스타일이 소름끼치도록 잘 살아난, 그 어느 작품보다 더 긴장감 넘치게 읽은 작품이었다. 

사족_ 내가 생각하기에 <용의자 X의 헌신>보다 더 뛰어난 작품인데, 영화에 밀려서 인지도가 떨어지는게 뭔가 조금 아쉽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필히 추천해 주고 싶다.

"요컨대 요즘 부모들은 자기는 전혀 책을 읽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는 꼭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스스로 독서 습관이 없으니 어떤 책을 읽으라고 해야 좋을지 짐작도 못해. 결국 기관에서 권장하는 책으로 대충 챙겨주기가 쉬워. 그런데 그런 책은 딱딱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으니 아이들은 저절로 책을 싫어하게 되지. 그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 p54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듯일 텐데, 그것은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것이라던데요?" - p343

 

악의, 히가시노게이고

 

10.07.26
이탈로 칼비노 엮음 - <민음사> \20,000

아..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일까.
생각보다 훨씬(!) 두껍던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내 주위를 맴돈다.

나는 환상 문학의 매력이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상'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었고,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크게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세계의 환상 소설>이라는 책을 만났을 때, "과연 이 책 속에 담겨진 이야기는 나를 어떤 세계로 인도해 줄까.." 하고 상당히 설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 몸은 생각했던 것만큼 자유롭게 날아다니지 못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여행을 재밌게 즐기기 위해선 그에 따른 준비(짐을 챙긴다거나 하는)를 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을 소홀히 한 탓에 몸이 물을 먹은 솜마냥 무거워진 듯 하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흥미를 위해 읽는 것이라면 다양한 환상 소설을 접할 수 있으므로 더없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을 '흥미'라는 테마로 흘려 버리기엔 참 아깝다. 이 책의 저자가 수없이 많은 작품들 중에서 훌륭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 고생했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보태서 각 작품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줄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품 수를 조금 줄이더라도 한 작품이라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면 작가가 창조한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지 않은가!! 많은 작품을 수록한 것은 환상 소설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점이 되겠지만 이제야 슬며시 발을 들여 놓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몸이 조금 둔해지는 느낌을 주는 듯 하다.

Alas!! 뭐 어쩌겠는가! 환상 소설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나머지 공부를 더 해야할 듯 하다. 그래, 무엇이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알맹이를 즐기기 위해선, 알맹이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지. 조금 더 내공을 쌓고 이 책을 다시 볼 때에는, 지금의 둔한 느낌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세계의환상소설, 환상소설, 이탈로칼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