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더워야 맛이고, 겨울은 추워야 맛이랜다. 하지만 조금 덜 덥고 조금 덜 추우면 안되는건가. 요즘은 정말 짜증이 솟구칠 정도로 춥다. 그래서 걸리적 거리는 걸 상당히 싫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장갑을 끼고 나간다. 어제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목도리를 두르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목도리를 찾은 건 이번 겨울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나는 목도리를 하고 다닌 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를 반발심에 어제는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나갔다.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도 23년간의 겨울을 잘버텨 온 나였고 니까짓 추위가 추우면 얼마나 춥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 계단을 다 내려옴과 동시에 다시 집에 들어가서 목도리를 가져올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 나는 이미 목도리에 길들여져 있었다.

목도리를 하고 다니기 이전의 추위는 '아, 춥다' 정도로 끝났었지만, 목도리에 길들여진 지금, 그리고 무방비 상태였던 어제의 추위는 정말 욕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예전에 비해 점점 더 기온이 떨어진 탓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많이 약해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이 간사한 녀석이 이제 무언가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목도리가 주는 '따스함'에 만족하지 못한 이 녀석은 탐욕스럽게도 나에게 장갑까지 끼고 다니도록 만들었다. 아, 다음엔 뭘 더 바랄 것인지.

나는 왜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는 순간에 '행복'을 떠올렸을까? 행복을 느끼고 행복에 길들여진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을 잃은 불행을 떠올린다. 그리고 혹시나 그것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고 집착한다.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에 더 추워진 것처럼, '행복'을 느낀 이후의 '불행'은 더욱 쓰라릴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의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행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아 다닌다. 행복에 길들여진 마음은 불행을 극복할 힘을 일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이전의 행복'이란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헤어진 연인과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현재의 사랑이 슬픈 것이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I can wade grief-
Whole Pools of it-
I'm used to that-
But the least push of Joy
Breks up my feet
And I tip- drunken-

                - E. Dickinson <J.252> 中

하지만 행복이 있기에 불행이 있는 것일까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있는 것일까? '행복 없는 삶'은 '불행 없는 삶'과 맞닿아 있을까? 내가 느낀 모든 행복을 지운다고 해서 더 이상 불행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행복 0%, 불행 0% 상태보다는, 다소 불행하더라도 적당한 행복이 있는 편이 좋다. '결핍'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많아서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행복하려는 욕구가 많아 '행복 결핍' 상태에 빠진다 하더라도 뭐 어떤가, 조금 바라고 조금 행복하기보다는, 애초부터 많이 바라고 많이 행복한게 좋지 않은가 - 여기에 양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넌센스이지만, 중요한 건 기백이니까. 물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겠지만 몇 개는 얻을 수 있을 것이고, '행복' 때문에 '불행'이 더 쓰라린 것처럼, 반대로 '불행' 덕분에 '행복'은 더욱 달콤한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바란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겨울에 목도리 한 번 안하고 나가서 추위에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치고는 무척이나 장황한 이야기이다. 결론은 뭐, 욕이 나올 정도로 추워도 겨울이 아니면 언제 목도리와 장갑의 따스함을 뼈저리게 느끼겠는가. 그리고 겨울 덕분에 곧 다가올 봄이 더욱 따듯하고 반가운 것이 아닌가. 그래서 죽겠네 죽겠네 해도 겨울은 참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겨울의 소중함을 깨닫는 글을 썼으니 겨울이 이걸 알아보고 좀 덜 춥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닮고 싶은 녀석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닮고 싶은 것은 그 녀석의 문체다.자주 찾아가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그 녀석의 공간에서 글을 읽을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 몇 번을 쓰고, 지우고 하다가 결국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다. 오, 그것은 디킨슨의 "Seal Despair"와 비슷한 느낌이다.

어찌됐건, 나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턱없이 긴 글에 스크롤을 내려 버리며 댓글란에다가 읽어 보지도 않고 "개소리 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그 녀석의 글은 지랄 맞을 정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느샌가 그 긴 글을, 읽을 사람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는 그 난해한 글을 읽고 만다. "아, 좀 줄 좀 바꿔서 쓰지."라고 툴툴 거리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읽는 내 자신이 우스워질 무렵 나는 내가 달았던 댓글을 지운다. 이미 지울 것을 알면서도 그런 글을 남기는 것이 묘미고, 내가 지우기 전에 그것을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이 또 하나의 묘미다. 남의 땅에서 내맘대로 숨바꼭질을 하는 셈이다.

내맘대로 술래를 만들어버린 그 녀석의 글은 참 강한 향을 풍긴다. 무슨 생각을 하며 다각거리는 키보드를 두드렸을까. 연필로 공책에 휘갈겨 쓴 글을 옮겨 쓴 것일까?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쓴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글을 쓸 수 있는가. 한 글자 한글자마다 느낄 수 있는 이 무게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별이 빛나는 고요한 밤에 썼을 것만 같은, 난해한 듯 보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무척 간결하고 꾸밈없이 솔직한 그 녀석의 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쓴다'의 주어로 오롯이 살아 남아 있는 그 녀석이 몸서리 치게 부럽다.

난 무엇을 위해 읽어 왔는가.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나는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저자를 살해해 버린 어리석은 행위를 반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나는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일까. 김탁환님의 <천년습작>을 읽었을 때 느꼈던 떨림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오... 녹이 잔뜩 슬어 움직이지 않는 나의 부끄러운 심장이여... 

무엇을 위해 이 글을 남기는 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레포트도 아닌 이런 글을 애써 시간을 들여 가며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다. 부러움, 반발심, 열등감, 충동, 부끄러움, 욕심, 반성.. 무엇이든 생각나는대로 이름표를 잔뜩 써서 덕지덕지 붙인다. 하지만 참 오랜만이다.. 서슬퍼런 칼날들이 글자들을 자르려고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듯한 기분, 내 스스로 나를 잔뜩 조이는 이런 기분. 나 자신이 한없이 실망스런 기분. 확실히, 그동안 너무 멍청하게 살았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지금의 부러움이 단지 그 상태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스멀스멀 기어나올 부끄러움의 뒤통수를 웃으며 후려줄 수 있도록, 힘을 기르자.

  

 

 2010. 12. 27
황경신 - <지식의 숲> \11,000

 어쩌다 보니 글을 쓰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PAPER>를 십일 년째 만들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책도 내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드라마 대본까지 쓰게 되었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어쩌다 보니 그녀의 책에 자꾸만 손이 갔고 어쩌다 보니 그녀의 모든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통해 꾸준히 만나온 그녀를 묘사하자면, 나는 그녀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빌딩’ 같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진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묘한 문체는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도록 만든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맞다, 틀리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기쁨, 슬픔, 괴로움, 증오 등의 모든 감정의 이유에 대하여 묻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감정들이 하나의 ’소중한 기억’이라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련한 감정들을 하나씩 일깨워 줄 따름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별을 겪어본 경험이 있듯이, 책 속의 많은 연인들도 제각각의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왜일까, 나의 경험과는 반대로 책 속의 연인들의 이별은 그리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작가가 이별의 순간에 멈춰선 연인들의 ’슬픔’에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밝히고 있는 곳은 그 너머의 순간이다. 그래, 이별 뒤에는 항상 만남이 있었다. 언제나 또 다른 만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이별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지만,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지만, 안녕’이라는 말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자꾸만 가슴이 미어져 오던 그 때의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감정들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감정을 느꼈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가져다 준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것들의 달큼함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슬프지만 안녕"의 의미를 깨닫는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생각할 수 있기 보다는 이토록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경계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의식을 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 p52

"어떤 사람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 또는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의 인생까지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그런 것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죠." - p57

"이별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끝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막 시작될 때, 사랑이 그 정점을 향하여 솟구칠 때, 또한 사랑이 내리막길로 미친 듯이 치달을 때, 심지어 사랑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순간마다 존재하고 순간과 순간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이별이란 것이 얌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사랑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것이라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의 이 이론은 옳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끝나 버린 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과 이별하는 일이 우리를 아프게 할 리 없으니까." - p59

"어느 쪽이 먼저 사랑의 약속을 파기했느냐,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했느냐를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애틋한 마음으로 약속을 나누었던 그 순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잊지 않는 일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일이다." - p60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 중 92.7퍼센트가 제일 처음으로 하는 생각이 ’앗, 젠장’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생각 속에는 대체로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앗, 젠장, 또다시 사랑에 빠져버리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앗, 젠장,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군.’, ’앗, 젠장, 이제부터 그 모든 지겹고 끔찍한 일들을 시작해야 하는 건가? 도망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건가?’, ’앗, 젠장, 나의 평화로운 시간들은 모조리 끝장난 건가? 지루하고 느긋한 휴일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시작하는 아침, 아무런 번민도 없이 잠들었던 그 밤들은 다시 오지 않는 건가?’" - p101

 "인생이란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후환들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그러나 어떤 노래는, 그토록 단단한 시간의 벽에 균열을 만들어 우리를 다시 한 번 불안하고 서러운 그 시절로 몰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 p141

 "단지 1퍼센트야.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충분하게 만들어줄 1퍼센트가 필요 없는 거야? 1퍼센트예요, 단지. 여자가 말했다. 완전히 끝나 버리기에 충분한 1퍼센트죠." - p224

"시간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라고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인생에는 천 년 같은 일 분이 있고 동시에 일 분 같은 하루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다림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내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그 카페가 떠올랐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을 때,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시간이란 분명 절대적으로 상대적이지만, 또한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아주 긴 오 분은 단지 아주 긴 오 분일 뿐, 아주 긴 일 년이 될 수는 없다. 아주 짧은 한 시간은 아주 짧은 십 분과는 완전히 다르다." - p236

  

황경신, 슬프지만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