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07. 31 ~ 08. 07
미야베 미유키 - <문학동네> \12,000 전 3권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더불어 일본 추리계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드디어 읽었다. 처음에는 <백야행>을 능가하는 엄청난 두께에 주눅 들었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손을 뗄 수 없었다.
아, 정말이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어 있는 치밀한 구성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백야행> 때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를 그려가면서 작가가 심어 놓은 오밀조밀한 복선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방범>이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백야행>보다 인물 관계가 명확하여 더 잘 읽혔다.
<모방범>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Who?도 아니고 How?도 아닌, Why?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미리 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리 소설이 중점을 두는 범인이 누군가, 어떤 식으로 범인을 저질렀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모방범>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느껴지는 괴리감에 있다. 범인은 도대체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진실에 닿을 수 있는데도 미묘한 차이로 자꾸만 빗나간다. 그것이 바로 현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맹점. 실제 사건은 '소설 속 이야기'처럼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쉬움, 안타까움, 답답함.. 이 모든 감정들이 남겨진 유족들의 참담한 모습과 섞이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정말, 범인의 얼굴에 한 방이라도 좋으니 힘껏, 시원하게 날리고 싶었다. 범인이 쓰고 있는 가면을 뜯어내고 그 시커먼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시게코가 범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며 자백하게 만들 때 느낀 후련함은 바로 이 간절한 기원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후련함은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그렇게 범인을 밝혀내도 이미 사라져버린 희생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결코 해피 엔딩일 수는 없다. 범인을 잡겠다는 집념으로 숨가쁘게 뛰어온 삶. 그 마지막에서, 순간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마음 속에서 용솟음 치는 열기는 갈 곳을 잃어버린다. 남겨진 자에게는 또 다시 차가운 현실이 서늘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다. 잔잔히 울려 퍼지는 아리마 요시오의 울음 소리가 책을 덮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함을 남긴다...
1부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하고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직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바뀐 생활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고는 있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의 시작을. 매일 아침,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니, 어제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오늘을 맞이했다는 것을. 아직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 p10
"우연은 범죄자에게는 항상 적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터무니없는 사소한 우연 때문에 흐름이 바뀌어버린다. 사소한 것 하나를 잊었다든지, 공교롭게도 그날 비가 내렸다든지, 택시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든지, 그런 작은 일이 범인을 당황하게 하여 증거를 남기는 것이다. 수사란 그것을 끈기 있게 찾아내는 일이다." - p209
"이 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놈이 잡히더라도, 분명 놈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다. 범인 또한 사회의 희생자라는 논리로. 거기에 반론을 펴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런 희생자들만 가득하다. 신이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로 싸워야 할 '적'은 누구인가?" - p317
"마리코, 하고 요시오는 마음속으로 불렀다. 마리코, 그때 다시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니.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을까. 누가 너를 속여서 다시는 오르지 않기로 약속한 높은 감나무 위로 너를 데리고 간 거니.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는 거니. 어떻게 생긴 놈이니. 제발 가르쳐줘. 이 할아버지에게. 그러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잡고 말겠어. 마리코, 마리코. 나의 보물 마리코." - p325
"사람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선전이야말로 선악을 결정하고, 옳고 그름을 정하고, 신과 악마를 나누는 것임을. 법이나 도덕규범은 그 바깥에서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 p343
"당신이 빼앗아버린 마리코의 수명을 나에게 주시오. 마리코를 되살려낼 수 없다면, 그 남은 생명을 이 할아버지에게 주시오. 이 아리마 요시오에게, 뒤쫓아오는 죽음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발을 주시오." - p374
2부
"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 혼합물 속에는, 이런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여자 쪽에도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딸은, 여동생은, 손녀는 괜찮을 거야, 하는 생각이 한두 방울 첨갇괴어 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 - p111
3부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게 싫어. 난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조금씩 죽어가도, 가만히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아냐. 이제 더 이상은 싫어." - p280
"그래도 한 방이라도 좋으니 힘껏 날리고 싶다. 언젠가는 밝혀질 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손으로 한 방을 날려 그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싶다." - p482
미야베미유키,
모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