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봅니다. 최근 신변의 변화가 생겨 정신적 여유가 없었는데, 이 책은 도저히 안 읽을 수 없었고 감상을 안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거인과 싸우다’라는 책, 아이리버 창업주인 양덕준 사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분과는 그저 짧은 인연 밖에 없지만, 그 분에 관한 책 발간 얘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책을 읽고 이리 글을 남깁니다.

96년 삼성 반도체 비메모리 분야 해외영업부에 입사 하고 퇴사 할 때까지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저희 부서의 수장이셨던 양덕준 당시 이사님. 당시 저는 신입사원이었고, 그 분은 이사님이셨기에, 부서의 인원이 많지는 않아서 서로를 마주 할 기회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대리, 과장, 부장을 거쳐야 하는 쳐다 볼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 몇 가지. 운전을 하시면 항상 그 분이 제일 좋아하는 ‘팔러먼트 담배’를 차 안에서 뒤적거리며 찾으십니다. 동승한 사람들은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여기저기 뒤적거리시는 이사님을 보며 불안해하고 급기야 저희 과장님은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주머니에 팔러먼트 담배를 한 갑 가지고 다니시게 되었지요.

대만의 키보드 생산업체인 ‘실리텍’이 제가 맡은 고객 중에 제일 큰 손이었습니다. 어느 날, 실리텍 사람들이 자신들이 주문한 Micom 반도체의 납기 문제 등으로 저희 본사를 방문했을 때, 이사님도 회의에 참석하셨지요. 이사님이 회의에 참석하면 아주 좋았었습니다. 그 분은 골초이시라, 말단 사원인 저 또한 대놓고 담배 피울 수 있게 해주시면서 회의를 주재 하셨거든요.

당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제가 만들었었는데, 이사님이 폰트 하나까지 신경 쓰며 챙기셨습니다. 말단인 저한테 처음 직접 지시를 하셨죠. 강압적으로 지시한 것이 아니라 직장 대선배로써 저를 친절하게 가르치시듯 하셨습니다. 마치 증손자를 가르치는 경우라 할까.

이사님 방이 따로 있지는 않았고 (저희 부서엔 고위 간부들이 많아서..) 칸막이로 구분을 했는데 근무하다 보면 어디에선가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둘러 보면 아니나 다를까 이사님이 담배를 피고 계셨습니다. 쓰고 보니 담배 얘기 밖에 없네요. 그만큼 털털한 분이셨어요. 그 분에 관한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냉큼 사 보았습니다.

책의 내용에 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당시 안정적으로 삼성에 납품할 기회도 포기하고, 아이리버라는 브랜드를 결국 세계 최고의 MP3 Player 업체로 키우는데 성공합니다. 디자인을 중시한 전략이 먹혔던 겁니다. 하지만 너도나도 디자인을 중시하게 되는 트랜드가 형성이 되니 이제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 놓아야 할 운명에 처합니다. 마침 역시나 디자인에 죽고 사는 집단인 애플에서 아이팟을 내 놓고, 여기에 들어가는 플래쉬 메모리를 삼성반도체에서 대량 구매를 조건으로 싼 값에 공급 받습니다. MP3 Player 업체를 고사시킬 기회를 엿보았던 삼성의 이해관계와도 맞았던 것이지요.

그 후에도 아이리버는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나 2등은 살아 남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1등이 고가품을 만들면 2등 업체는 가격을 후려치는 방식으로 생존을 하기 마련인데, 1등인 애플이 가격을 후려치니 인지도와 가격, 두 가지 메리트가 다 없는 2등 업체는 살아 남지 못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획기적인 제품을 내 놓기는 하였으나 개국공신과 나중에 영입된 직원들 간의 내부적인 불화 등의 이유로 아이리버는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본인 자신이 삼성에 몸 담고 있어 봤기에 대기업의 그런 행태를 자본주의 하에서는 충분히 있는 상황이고 자신이 삼성 담당자라 해도 그리 했을 것이라며 이해합니다.

2010년 초,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옵니다만, 한창 회사가 잘 나갈 때 알았던 정부 고위 관료나 높은 분들은 연락이 없고 처음 회사를 차릴 당시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줄기차게 문병을 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리 말을 합니다. “양사장님이 다시 일을 시작하면 또 모시고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지금도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가슴이 뛰어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한때는 세계 1위였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진입장벽이 높아진 MP3 Player 시장. 핸드폰에 MP3 기능을 넣는 것이 아니라 MP3기계에 핸드폰 기능을 넣을 수 있다고 애플의 아이팟 나오기 이 전부터 말해 오던 양덕준 사장. 애플이 i-tunes에서 음원을 파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도 그리 하였다가 모든 작곡가, 가수, 음반업체를 다 따로따로 컨택을 해야 하는 부담을 극복하지 못하여 투자금 날려 먹은 양덕준 사장.

존경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그러한 애플과의 패배를 맞본 양덕준 사장의 이야기에 관한 책을 아이폰4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아 현실이란…

최근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너무 일만 하는 바쁜 생활보다는 여유롭게 사는 것이 나은데, 나는 그리 살지는 않을꺼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 분의 일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떠오르는 일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체할 길이 없어 계속 그게 좋아 일을 하게 되다가 무리가 온 것이었죠. 돌이켜 보면, 내가 열정을 가져 본지가 꽤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꼭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