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기 5년차. 제목을 보고 나는 집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나 생각했다. 그러다 근 10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더 많지만 혼자서 시간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을까 기대했다.

책은 상당히 심플하며 아기자기하다. 일본 작가의 이야기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었는지, 책은 반대 방향으로 읽어야 했다. 우리나라 책의 방향대로 읽다가 내용이 이상하다 싶어 뒤로 돌아가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혼자 살며서 겪는 약 15가지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밥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보는 것, 무서운 방송을 보았을 때, 돈에 대한 생각 등이 그림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달 된다.

먼저 내용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캐릭터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면, 주인공 나오코는 매우 평범하며, 키가 작고, 약간 귀여움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약간의 소심한 모습도 있는 것 같고.(그래서 더 공감하긴 했지만.)

혼자 어느 정도 긴 시간을 살아 왔던 사람들이라면 대다수 공감할 것이다. 아, 나도 이랬던 경험이 있어지라며 나오코의 이야기의 맞장구를 치며 읽을 수 있다. 처음 방에 대한 이야기부터 공감을 유도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비해서 눈에 띄게 살림살이가 늘어나 있는 것을 확인하는 나오코의 모습을 보면서 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짐들이 떠올랐다. 분명, 무엇을 많이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계속해서 물건이 쌓인다. 이것이 혼자 살기 때무인지, 아님,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입지 않은 옷도 그냥 걸어두고, 닳은 신발도 쉽게 못버리고. 그러다보니 결국 짐이 쌓여가는 것이다. 나날이 원인 모르게 늘어가는 물건들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주와 관련된 밥 먹는 일. 학교를 다니면서는 약속도 많고 친구들과 함께 먹는 일이 많아서 쉽게 느끼지 못했지만, 요즘은 혼자 밥 먹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면 유난히 소박해지는 식탁. 그것이 익숙해져서 딱히 쓸쓸하다 생각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혼자 밥을 먹을 때는 텔레비전이나 음악이 필수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는 경우는 아플 때가 아닐까 싶다. 혼자서 있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왠지 모르게 서러워 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 약을 찾아 먹고, 약을 먹기 위해 밥을 지어 먹을 때면 괜스레 더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사람들마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가지각색이겠지만, 아마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게 될 것이다. 긜고 이 책을 쓴 작가는 일본인인데,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와 단지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라는 다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 그리고 그속에서 느끼는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짧게 해보았다.

개인적으로 한 작가에게 꽂히면 그 작가의 책들을 쭉 읽어가곤 하는 습관이 있다. 우연하게 읽게 된 누군가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 그러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새의 선물이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소설이 건넨 깊은 인상으로 인해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함께 찾아 읽었고,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 태연한 인생 역시 작가에게 받았던 느낌을 기억하며 읽어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명확하게 그 이유를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상하게 그녀 소설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웠다면 새로웠고. 낯설었다면 낯선. 무엇인가 다른 느낌이었다.

작가의 글에 마음을 빼앗겼던 이유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나,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에 공감할 수 있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꼭 적어두고 넘어가는 나로서는,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으며 많은 구절들을 기록으로 남겨 뒀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그런 부분이 많지 않았다. 어딘가에 옮겨 적기 보다는 한참동안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사전에서 '태연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마땅히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할 상황에서 태도나 기색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예사롭다.' 이것이 태연하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였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 자체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예사로운 일처럼 행동하는 것. 나는 인생을 얼마나 자주 태연하게 대해 왔을까. 나도 모르게 내가 태연하게 반응했던 기억. 속은 그렇지 않음에도 태연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했던 생각은 우연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 비해 소설 속 이야기들은 우연적인 요소들을 어떻게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연결 지어 놓는다. 사실, 그래야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요셉의 입을 통해 건네졌다시피,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 인생에서처럼 우연만을 나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 소설은 그런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사건을 필연적으로 연결시키기보다는 요셉이라는 한 소설가를 중심으로 인생에서 마주하는 우연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요셉과 류, 이 두 인물, 그 중에서도 요셉이라는 소설가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얽힘이라든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라든가, 그런 것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그저 한 인물이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을, 말을 통해 건네주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을 글자를 통해 멈칫하며 지켜본다. 그리고 요셉의 말에 때로는 동의하면서, 또는 반발하면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는 클라이막스랄까. 그런 갈등의 최고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을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 사랑, 소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리며, 전달된다. 때로는 작가가 만들어 낸 요셉이라는 인물의 머리를 통해서, 또는 그의 말할 때 습관인 듯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의 인용을 통해서. 왠지 모를 많은 숙제를 남겨주는 책이었다..... 너도 한번 생각해봐라. 고통, 고독, 젊음, 사랑, 소설,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이라는 필름은 조금도 심각하지 않답니다. 자, 다시 한 번 돌려볼까요. 시간을 다시 설정할 필요 없이 그 나라의 극장에서는 그런 안내방송이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라도 그 낯선 나라에 류를 고독과 고통의 세계로 끌고 가기 위해 기다리는 태연한 인생 따위는 없을 것이다....... 류는 생각했다. 다른 단계의 인생으로 접어든 것뿐이야. 진짜와 가짜라는 건 없어. 그냥 다른 것이야. 다른 시간과 다른 층위의 방식이 섞이며 흘러가는 것뿐이야. (p.77)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대다수 비굴함과 패배의식들을 보여 준다. 통쾌함보다는 아픔, 한,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들이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으로부터 던져진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개성이 뚜렷하다.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사건의 흐름보다도 인물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재미가 더 컸다. 일제 지배하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 남녀들과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매국노의 자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뼈 속 깊은 곳까지 일본에 대한 증오감으로 차 있는, 그래서 일본인의 몸의 일부가 손에 닿는 것조차 끔찍하게 여기는 민석, 그의 사랑을 받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던 혜림, 일본인의 손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리고 다시금 일본 여자를 사랑하게 된 무영, 일본인으로 조선인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은 미유키, 그 외에 수찬, 영수, 지은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얽혀서 등장한다. 소설을 다 읽은 뒤에도 이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책을 읽으면서 몇번 충격을 받았다.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아, 그랬구나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약간 스포일러 같기는 하지만, 특히 1권 마지막 부분에 정민석이 한일단의 단장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른 한일단 단원과 마찬가지로 놀라웠다. 정민석이라는 인물에게 뭔가 숨겨져 있는 비밀이 있기는 하겠다 싶었지만, 그만큼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민석의 정체가 밝혀지고 난 뒤인 2권부터는 본격적으로 그의 독립을 위한 활동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민석과 이무영, 이 두 인물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때로는 연민이기도 했다가, 용기와 결단에 감탄하기도 했다가, 그들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들에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이 책이 패배의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은 (소설이라지만) 가슴 먹먹한 느낌과 함께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모습 중 일부는 실제 우리 민족의 모습이었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받았던 인상은 이 책은 왠지 영상화되는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같다는 것이다. 독서 중에 글을 읽고 있다기 보다는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사람들의 뚜렷한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 탓도 있는 것 같다. 소설을 끌어가는 사건은 몇 안되지만 그 큰 사건을 만들어 가는 작은 이야기들이 빠르게 전환된다. 그래서 느슨하거나 쉴 틈이 없었던 것 같다. 한 인물의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말, 행동에 더 많이 치중되어 있었다.

 

책에 약간 아쉬운 부분은 결말이다. 왠지 모르게 결말이 후다닥 쓰여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책의 전반부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이야기 속에 흐르던 긴장감이 원자 폭탄 투하 하나로 끝나버린 듯한 허무감 때문에 들었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1535에 숨겨진 비밀도, 조금은, 더 강력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아쉬움을 뒤로하고도 이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래도 두 권의 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개성 있는 인물들이 제각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과 함께 얽혀 들어가며 보여주는 모습들이 오래도록 내 눈을 책속으로 끌어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