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사는 게 지겹다 느껴질 때
『삶의 한가운데』
엄마, 일탈을 꿈꾸다
요즘 들어 자주 자우림의 「일탈」을 듣는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어쩜 그리 내 마음과 같은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오전 내내 집안일을 한다. 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저녁이 되면 다시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하고 아이들 학습을 봐주어야 한다. 늦은 밤 자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재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린다. “휴~” 달달한 커피믹스를 큰 머그잔에 한 가득 타놓고, 깜깜해진 창밖을 본다. 불 밝힌 높은 건물과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동차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산다는 게 몹시 지겹게 느껴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다. 매일 비슷한 일들을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능숙하게 처리한다.
나는 결혼을 통해 든든한 가족과 안정된 생활을 얻었다. 내 곁에는 별탈없이 자라주는 아이들,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때로는 너무나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 아내니까, 엄마니까 해야 하는 일들로만 가득한 나의 하루는 신나지도 즐겁지도 않다. 나는 그냥 아내이고, 엄마이고, 아줌마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괜히 울적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는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니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녀와의 만남은 ‘삶이 지겹다’는 투덜거림을 멈추게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삶의 한가운데, 니나가 있다
『삶의 한가운데』는 오랜만에 만난 니나와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가 슈타인이 보낸 일기와 편지를 함께 읽으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슈타인은 18년 동안 니나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독자는 슈타인의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니나의 지나온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전쟁과 고난, 결혼과 출산, 둘째 아이 임신 중 자살시도, 남편과의 결별, 반나치 활동 등으로 장식된 니나의 삶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니나는 행복하다 한다. 불행한 운명이지만 언제나 의미가 있고, 도전해볼 만한 것이라 한다. 도망치지 않고 겪어내며 자신의 정신을 단련시킬 기회로 삼는다. 니나는 삶 한가운데 서서 당당히 선택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주인 자리를 지켜낸다. “나는 완전한 자유를 너무나 동경합니다.”라고 말하는 니나는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슈타인의 도움을 거절했고, 퍼시 할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 심지어 자기가 낳은 두 아이에게도 구속받지 않는다. 니나는 누구를 위해서 산다든지, 누구의 삶을 흉내내며 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산다.
책을 읽어가며 슈타인과 마르그레트의 시선으로 니나를 만난다.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가졌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고민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슈타인, 평탄한 결혼 생활을 불만 없이 해나가지만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라고 불쑥 말을 토해내는 마르그레트. 그들의 모습은 “사는 게 지겹다.”라며 한 숨 쉬는 내 모습과 닮았다. 어느새 나는 슈타인과 마르그레트가 니나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니나가 가진 생명력과 자유로움이 몹시 탐이 난다. 니나는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않고 삶이라는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이다. 자연의 변화를 맨몸으로 겪어내야 한다. 자칫하다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외롭고 불안해 보이는 여행이지만 모험이 거듭될수록 팔 근육은 단단해지고, 정신은 더 맑게 깨어난다. 나이 든 니나의 얼굴은 삶이 새겨 넣은 갖가지 표정을 담아내어 우아하고 매력이 넘친다.
니나의 나이는 38세, 나도 곧 니나의 나이가 된다. 나도 니나처럼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 운명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갖는 풍부한 표정을 가질 수 있을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자유롭지 못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 스스로가 내 삶의 변두리로 물러나 앉았다. 남편과 아이의 삶과 나의 삶이 맞닿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익숙해졌다. 나의 시간은 가족을 위한 시간이 되고, 나의 선택은 가족을 위한 선택이 됐다. 자라는 아이를 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선물 받고, 든든한 남편에게 기대어 평안한 일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종종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삶은 어떤 의미도 없고,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나란 사람이 어떤 욕망을 가진 존재인지, 어떤 삶을 꿈꾸던 사람인지 더는 기억나지 않아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슬며시 내 곁으로 다가온 니나가 손을 들어 삶의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먹구름으로 가득한 회색빛 하늘이 보인다. 그곳에 스무 살의 내가 서 있다. 이런 궂은 날씨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밝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래, 그랬다. 새로운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로 설레며 맞이하던 아침이, 뭔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흥분에 들떠서 잠 못 들던 밤이 내게도 있었다. 나의 틀을 깨트려보겠다고 오렌지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짙은 와인색 립스틱을 바르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불안을 견디며, 절망의 나날을 보냈지만 자유로웠다.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엄마도 아닌 그냥 나였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나의 하루는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나에게는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삶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순간이 이토록 소중한 줄 몰랐다. 결혼, 출산, 육아라는 산을 넘어 삶의 변두리로 나와 앉은 지금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삶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묻고 또 묻는 나를 꿈꾼다.
자우림의 「일탈」을 다시 듣는다.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 떠나기,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하기,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하기,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추기 ,......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려는 시도들이다. 화끈하고 신나는 일이긴 하지만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잠깐의 일탈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아갈 수 없는 스무 살 시절을 마냥 그리워만 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뭔가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일단 아내, 엄마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지내는 시간들을 늘려보기로 한다. 매일 하던 집안일은 이틀에 한 번으로 줄이고, 급하지 않은 일은 내일로 미루는 거다. 조금 일찍 일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한다. 이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를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엄마, 삶의 한가운데로 향하다
무엇부터 해보는 게 좋을까. 음치는 아니지만 고음이 안 되니 노래는 아니다. 악기를 몇 번 배워보려 했으나 영 재미를 못 붙였다. 몸치는 아니지만 땀 흘리고 헉헉대는 걸 싫어하니 무용은 안 되겠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각종 문예 행사에 열렬히 참가했던 나이다. 대학교 때는 교지 편집부에 적을 두고 어설프게나마 사회 운동 글도 몇 편 썼다. 어떤 글이었는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 일단은 책 읽고 글 쓰는 일부터 해보는 게 좋겠다. 자살 시도 후에 니나는 다시 살기로 결심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냐고 묻는 슈타인에게 니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겠죠.”라고 말한다. 니나에게 있는 재능이 내게는 없다.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도 아직 나는 모른다. 그저 나는 이렇게 걸음을 떼어보려는 거다.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