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로 베를린대학 교수이다. <피로사회>로 독일 언론의 주목받기 시작해 독일에서 20권 이상 책을 펴내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서 2012년 출간된 <피로사회>는 보라색 표지에 피로사회 라는 네 글자가 간결하게 박힌 얇은 두께의 책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문장 하나 하나를 읽어가는 데 급급하던 첫 번째 읽기는 실패. 두 번, 세 번 읽기를 거듭하고서야 멀리서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을 갖출 수 있었다. 전체를 보는 눈으로 네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피로사회>에 담긴 거대한 사유를 발견하고 ‘아!’하는 깨달음의 소리를 조금은 성급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읽고서야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비판적 통찰을 발견해냈다.
<피로사회>는 고도의 성과사회인 독일 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나라의 이야기’라고 대충 읽을 수 없었다. 책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그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은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것과 많이 닮아 있다. 슬프게도 읽는 내내 ‘나도 이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하고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함께 여러 번 이야기 나누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시대마다 주요한 질병이 있는데 현대의 질병은 우울증이라고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에게 우울증이라는 병은 익숙하다. 현대에 누구에게나 언제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흔한 병이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몸의 병까지 불러들인다. 삶의 에너지를 빼앗아 버려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밝게 웃던 유명 연예인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가정의 엄마가, 왕따 당한 청소년이 우울증을 앓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뉴스 기사를 자주 접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우울하게 만드는가? 우울증은 불운한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규정한다. 탈규제, 탈경계화 속에서 개인은 뭐든지 ‘할 수 있음’이라는 자유를 누린다. 개인의 삶을 규제하던 지배기구는 사라지고 자신이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개인은 자유롭지 않다. 스스로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기 자기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자신의 영혼을 소진시킨다. ‘할 수 있음’이라는 무한 긍정의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개인은 우울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29)
저자는 부정과 억압이 가득했던 규율사회를 기반으로 세워진 정신분석학의 안경을 쓰고서는 현대 성과사회의 문제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단지 개인을 억압하는 것과 그것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관계를 따져보는 것만으로는 현대인들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부정성, 억압이 사라진 긍정성만이 있는 사회이다. 과잉 긍정이 개인을 과잉 활동의 상태로 몰아갔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은 사람들을 수많은 자극, 충동, 정보 속에서 끝도 없이 헤매게 만들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 성과를 많이 내는 기계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닦달하며 끊임없이 달린다.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달리는 동안 점점 고립되고, 지쳐간다. 결국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유형의 인재를 얻기 위해 정부는 교육을 바꾼다. 대학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어렵게 취직을 해서도 승진하기 위해, 돈을 더 벌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다. 자신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틈틈이 공부하고, 더 많이 일한다. 갑자기 멈춰 서서 생산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꾸준한 운동으로 몸을 돌본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느끼지만 결국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규율사회에서는 밖에서 나를 조종하던 손이 어느새 내 안으로 들어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를 조종한다. ‘나는 자유롭다’는 생각은 내가 기꺼이 조종당하도록 만들어준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성과 주체인 개인에게 만족이란 없다. 삶은 늘 공허하고 각박하다. 자기도 모르게 기진맥진해지고, 텅 비어간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어 점점 고립되어 간다. 쉬지 않고 활동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삶은 공고히 다져지지 못하고 더욱 불안정해진다. 개인도 사회도 우울해진다.
책에서 밝힌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면서 나는 걱정이 깊어졌다. 이 모든 이야기가 독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의 이야기인 듯 느껴졌다. 출근 시간에 신도림 환승역을 가득 메우고 한 걸음씩 천천히 함께 움직이던 무표정한 사람들의 물결이 떠올랐다. 혹독한 운동으로 만들어낸 검게 그을린 근육질 몸에 힘을 주고 서 있던 TV 속 사람들, 화려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우울증으로 갑작스레 생을 놓아버린 유명인들, 모 기업 회장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유산을 미리 상속해달라고 소송을 걸었다는 , 그 이야기를 하던 팔순의 아버지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각각 하나의 이야기였는데 책을 읽고 나니 하나의 커다란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였다. 땅 위에서 우리 집, 내 가족만 보다가 하늘 위에서 마을 전체, 나라 전체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내 집 문을 두드리던 바람만 보고 옷깃을 여미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산 너머의 검은 먹구름을 몰고 휘몰아쳐 오는 태풍을, 지구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기류의 흐름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다. 통찰의 기쁨과 함께 땅을 벗어난 두려움과 불안함이 공존한다. 어쩌면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다. 힘없는 내가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사색하는 삶과 깊이 있는 심심함을 말한다. 프로이트, 보드리야드, 아렌트, 니체와 한트케 등 유명한 서양 철학자나 사상가의 이론이나 사상을 때론 비판하고, 때론 수용하며 논거를 이어가던 그가 꺼내든 치유의 메시지는 뜻밖에도 동양적인 것이었다. 다양한 과업을 처리하고, 넘치는 정보를 다루느라 조각나고 산만해진 주의를 느리고, 머물러 있는 깊은 주의로 바꾸어야 한다. 과잉 긍정 속에서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과 정보, 충동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힘,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는 힘을 키울 때 나는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깊은 사색을 통해 팽팽하게 늘어난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의 영역을 줄여감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세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된다. 결국 성과 주체인 우리 자신이 치유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사색하는 삶이란 생존에 대한 관심을 좋은 삶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앞만 보고 맹렬하게 끝도 없는 길을 죽을 듯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길 가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미친 듯이 달리는 내 발 소리, 심장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달리는 사람의 숨소리,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이다.
독일 사회와 한국 사회는 쌍둥이처럼 같지는 않다. 고도의 성과사회인 독일과는 달리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규율사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억압이나 금지가 많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틀에 맞추어 가느라 자아를 잃어가는 우울한 사람들이 많다. 가정이나 학교, 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은 구성원들에게 도덕적일 것을 요구하고, 정해진 틀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이 내세우는 무의식의 기재로 다양한 심리적 질환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반면에 한국은 짧은 시간에 고도의 성장을 이루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성과사회이기도 하다. 언제 부터인가 ‘난 할 수 있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개개인이 더 발전하고 끊임없이 성장 노력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부단히 자신을 계발하고 열정적으로 일해 어느 정도 부를 이룩한 사람에게는 ‘성공 신화’라는 수식어가 훈장처럼 달린다. 자신을 계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렇게 규율 사회와 성과 사회의 모습이 뒤섞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고 힘겹다.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비판 의식을 갖지 못하고 흐름을 쫓아 산다면 결국 나의 삶을 놓치게 된다. 규율 사회 속의 복종적 주체이든, 성과 사회 속의 성과 주체이든 결국 우울한 삶이다.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사회의 커다란 흐름을 보고,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늠해보아야 한다. 앞 사람 뒤통수만 보며 걸어가던 길을 멈추고, 천천히 생각해봐야 한다.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면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고 방향을 틀던지, 멈추어 서야 한다.
나는 저자가 인용한 니체의 말을 오래 기억하려고 한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P.35~36)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P.48)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는 것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책을 끝내 덮어버릴 수 없었다. 책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위에서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속에서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삶이라는 치유의 메시지를 만났을 때는 안도할 수 있었다. 느리게, 천천히, 깊게 사색하는 것은 동양인인 우리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냐 하고 스스로 힘을 얻기도 했다.
<피로사회>를 천천히 읽으면서 사회 현상을 넓고 깊게 살피고, 오랫동안 생각해보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뿌듯하고 개운한 책 읽기였다. 사색하는 삶,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으로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