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이라는 제목을 보고, 소설가가 된 동기, 일상의 이야기,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건네는 가벼운 조언 따위를 기대했다. 평소 책을 볼 때 사용하는 볼펜이며 독서노트도 챙기지 않고,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느긋하게 책을 펼쳐들었다. 가벼운 에세이이니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감에 따라 접어서 표시해야 할 곳이 늘어났고, 급기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볼펜을 챙겨와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밑줄 그은 문장들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작가는 소설가에게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소설을 잘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자신이 겪은 일들에 빗대어 설명하고, 읽었던 책 속의 문장을 가져와 쓰기도 한다. 작가의 말투는 늘어진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설렁설렁 걸으며 흥얼거리는 콧노래처럼 가볍고 유쾌하다. ‘나 소설 20년 쓴 사람이야.’, ‘소설을 쓰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지!’하는 허세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래서 글쓰기를 동경하는 내게 ‘일단 써라’하는 그의 조언이 그리 큰 부담으로 와 닿지 않는다. 20년 쓴 사람도 음식물 쓰레기통 같은 초고를 생각 없이 쓰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런 글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하는 용기를 얻는다. 물론 베테랑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쓰레기 같은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 초고 쓰기의 다음 단계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캐릭터에 대해 세부정보를 만드는 방법, 대화 쓰는 방법, 독자를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 시키는 방법, 좋은 문장 쓰는 방법 등을 안내한다. 그러나 이건 <소설가의 일>이라는 큰 바다로 향하는 작은 물줄기일 뿐이다. 작은 물줄기를 즐기는 일에 빠져 발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 큰 바다까지 가야 한다. 소설가의 창작 과정이 작은 물줄기라면, 그 물줄기가 가닿는 큰 바다는 소설가의 삶이다. ‘소설가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소설가가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은 물줄기를 쫓다 문득 고개를 들어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확인하는 순간의 벅찬 감동. <소설가의 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그런 감동을 느꼈다.
글쓰기 기술을 익혀 단시간에 많은 글을 써낸다고 진짜 작가라 할 수 없다. 휴게소에서 영혼 없는 인사를 건네는 인사 기계처럼 그건 가짜 소설 기계일 뿐이다. 이 책은 진짜 작가로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을 쓰는, 또는 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 만들어내는 허구의 세계에 독자가 기꺼이 빠져들어 감동을 느껴주길 바란다. 매일 글 쓰는 사람이 진짜 작가로 거듭나는 변화는 바로 이야기의 핍진성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독자에게 실제 감동을 주는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는 핍진성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일관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가는 구체적인 문장을 넘어서 핍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p.83)
구체적이고 핍진성 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소설가는 인간의 본성을 연구한다. 나에 대한 이해를 넘어 타인을 이해하려 한다. 타인에 대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세부정보를 만들어간다. 글을 쓰기 위해 타인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타인을, 인간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마침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갖는다. 그렇게 작가가 된다. 작가는 때로는 1인칭 시점에서 한 인간의 삶을 살피다가도 2인칭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피고, 3인칭 시점이 되어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핀다. 작가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1인칭, 2인칭, 3인칭을 자유로이 오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는 평범한 일상을 강렬하게 맛보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p.50)
잔인한 진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농담할 겨를조차 없는, 이런 직설의 진실은 도처에 널렸다. (p.185)
도처에 널린 잔인한 진실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나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느닷없이 닥쳐올 죽음이 있어 삶은 늘 불안하다. 작가는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이 이 불안이라고 말한다.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는 ‘자신의 불안을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라고 했다. 이게 바로 '매일 글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되는 비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에게는 이런 용기와 이런 마음과 이런 태도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p.19)
맨 처음 밑줄 친 문장이다. 매일 글을 쓰던 사람이 작가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궁금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비밀은 ‘쓴다’를 ‘산다’로 바꾸는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글을 쓰면, 좋은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 작가로 ‘살게’ 된다. ‘작가’라는 명함은 창작 용어를 익히고, 글쓰기 기술을 익혀 얻는 것이 아니다. 작가답게 살아갈 때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다. 작가는 실패와 불안으로 가득한 삶을 긍정하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살아낸다.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우리 삶에는 끝이 있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작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얻게 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롭게 삶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소설가의 일이란 단순히 형식적으로 잘 다듬어진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관을 세우고,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가는 일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여지냐는 것이다. (p.262)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려 본다. ‘매일 글을 쓴다’와 ‘한순간 작가가 된다’ 사이를 가늠해본다. 나는 영영 이 두 문장 사이를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글을 쓰겠다. 소설가의 일을 흉내 내며 살겠다. 나는 이미 불타는 다리를 건너 인생의 2 막을 시작했으니까. 더 많이 실패할수록 인생이라는 소설 안에서 나는 더 매력 있는 주인공이 될 테니 말이다.
<소설가의 일>을 다시 읽는다. 소설가가 하는 일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로 바꾸어 읽는다. 밑줄 긋는 문장이 자꾸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