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한 달 내내 읽었다. 몇 번을 읽었는지 생각조차 나질 않는다. 곁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뭐에 홀린 듯이 한자리에서 다 읽었다. 두껍지도 크지도 않은 책인데 담고 있는 이야기는 크고 묵직하다. 힘이 있는 이야기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볼록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잇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 이미 사위가 잔뜩 흐린 가운데 어디선가 불어닥친 사나운 바람이 읍사무소 앞을 장식한 바나나 나무를 흔들어 대며 땅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휩쓸어 갔다. (p.9)
폭풍우를 예고하는 밀림의 어두운 하늘과 사나운 바람처럼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한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멸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저지른 일은 그대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작가는 70세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를 통해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예감한 사람의 고독과 절망을 보여준다. 노인은 자연과 문명인 사이의 중간 지대에 놓인 경계인이다. 그는 엘 이딜리오의 다른 사람들처럼 아마존 밀림을 개간하여 새로운 삶을 꾸리고자 이주해온 개간자이다. 또한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밀림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한, ‘수아르족 아닌 수아르족’이기도 하다. 경계인인 노인은 외롭다. 아마존 밀림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고 훼손하는 일에 앞장설 수도 없고, 완전한 수아르족이 되어 밀림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도 없다. 자연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는 늙었고, 혼자이다.
노인의 모습은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살해당한다. 2014년 한 기사에서는 ‘지난 10년간 35개국에서 환경보호운동을 펼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 무려 9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환경 운동가를 죽음의 위험에 몰아넣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밀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밀림의 자원을 캐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밀림에선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책’이라고 믿었던 엘 이딜리오의 전읍장도 살해되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공멸을 막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1.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사랑하는 노인의 고독
어느 날, 수아르족이 백인 시체를 발견해서 마을로 가지고 온다. 뚱보 읍장은 수아르족을 범인으로 몰았으나, 노인은 밀림에서 생활하며 얻은 지혜로 암살쾡이의 짓임을 밝혀낸다. 계속해서 시신이 발견되자 뚱보 읍장은 암살쾡이를 찾아내기 위해 수색대를 파견한다. 수색대가 밀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밀림에 대해 무지한 뚱보 읍장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밀림의 이치를 몸으로 익힌 노인의 현명하고 침착한 모습이 대비된다. 뚱보 읍장은 탐욕스럽고 멍청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다. 정작 맹수를 만나면 두려움에 떨며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못하면서 힘없는 동물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비겁한 인간. 새끼 살쾡이마저 죽여서 가죽을 벗겨 놓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 분노한 암살쾡이는 그런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노인은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며, 암살쾡이의 복수가 본능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리만치 대담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p.153)
뚱보 읍장은 노인에게 암살쾡이 처리를 맡기고 엘 이딜리오로 도망친다. 자신의 운명에 용감하게 맞설 용기마저도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암살쾡이와의 한판 싸움을 제대로 벌일 배짱도 지혜도 없는 인간의 모습은 초라하다. 그런 인간은 죽음이 두렵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노인은 수아르 족에게서 그 용기를 봤다.
수아르 족과 생활했지만 그들처럼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고 환각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거나 그들처럼 자신의 육신을 개미에게 갉아먹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고, 설사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p.66)
친구 누시뇨를 죽인 백인을 총을 쏘아 죽인 일로 노인은 더 이상 수아르 족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된다. 수아르 족은 ‘만일 그가 백인인 노다지꾼에게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준 다음 독화살로 끝장냈더라면 죽은 백인의 얼굴에 그 용기가 남아 누시뇨가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총을 맞았기에 백인의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에 일그러져 저세상으로 떠날 수 없다고(p.69)' 생각했다.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용기를 간직한 채 죽는 것. 암살쾡이가 원하는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노인 혼자 암살쾡이와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노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암살쾡이의 대적수로서 위엄과 용기를 갖추고 멋진 싸움을 벌일 수 있을까. 암살쾡이와 노인의 싸움을 보면서 나는 노인은 결국 수아르 족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영원히 경계인으로 남을 것이다. 암살쾡이와의 싸움을 통해 노인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결국 엽총으로 암살쾡이를 쏴 죽인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 그리고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느닷없이 화가 난 사람처럼 손에 들고 있던 엽총을 강물에 던져 버렸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 금속성의 짐승이 물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p.179-180)
노인은 ‘밀림 출신’이고, ‘명예롭지 못한 싸움을 끝내고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리는’ 인간이다. 또한 ‘틀니와 돋보기를 사용하는’ 인간이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 금속성의 짐승’에 기대어 마을 사람들을 지켜내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인은 인간과 자연이 적대 관계로 치달을수록 결국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멸하리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노인은 암살쾡이와의 싸움이 결국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곧 닥쳐올 더 큰 재앙의 시작일 뿐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이 든 노인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꿔낼 수 없다. 물에 총을 던지는 노인의 모습에서 절망과 고독이 아프게 느껴진다.
2.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 꿈꾸는 세상
노인은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연애 소설을 읽는다.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p.180)’ 연애 소설을 읽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고통과 불행을 겪다가 결국은 행복하게 되는 이야기를 읽는다. 노인은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고통과 불행을 주고받는 과정을 이겨내고 끝내 사랑과 행복을 얻게 되기를 꿈꾸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밀림에 대해 너무 모르고,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느라 노인이 가진 지혜의 소중함을 잊는다. 암살쾡이의 역습이 곧 닥쳐올 더 큰 재앙의 전조임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행하는 그대로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얼마 전 아이들과 읽었던 그림책 <시애틀 추장>(수잔제퍼스.한마당.2001)의 한 부분이 이 떠올랐다.
모든 들소들이 도살되고 나면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모든 야생말들이 길들여지고 나면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숲 속에 아무도 몰래 숨어 있던 장소가 수많은 인간의 냄새로 질식해 버리고 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웅웅거리는 철사줄로 언덕을 얽어매놓고 나면?
그러면 울창하던 숲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사라져버리고 없겠지.
우리가 저 쏜살같이 달리는 말들과 작별을 하고 사냥을 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은 삶의 끝. 그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겠지.
(중략)
우리는 알지
세상만물은 우리를 하나로 엮는 핏줄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우리들 사람이 이 생명의 그물을 엮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그 그물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그물코일 뿐.
우리가 이 그물을 향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곧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하는 일.
<연애 소설 읽는 노인>과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읽으며 인간과 자연의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니 두렵고, 고통스럽다. 자연과 인간이 한 몸임을 잊고,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비틀고 찢고 죽이는 한 결국 인간도 자연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다. 비극적 운명을 바꿔낼 수 있는 방법은, 희망은 없는 걸까.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46)
연애 소설을 읽으며 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야만성을 벗고, 순수한 사랑의 언어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노인은 오두막에서 연애 소설을 읽는 자유를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밀림을 개발하려는 사악한 인간들이 노인의 지혜를 이용할 수도 있고, 암살쾡이로 시작된 자연의 재앙이 마을을 덮쳐 노인을 사지로 몰아갈지도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노인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야만성을 경계하고, 끝끝내 사랑에 이르는 결말을 꿈꾸던 노인은 이미 보여주었다. 뚱보 읍장을 꼼짝 못하게 만든 지혜로움, 밀림의 생명들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는 현명함,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 싸우던 용기.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었다.
책을 덮으면서 ‘노인과 함께 연애 소설을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노인의 고독을 함께 나눌 이가 늘어난다면’ 하고 나는 애써 희망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크게 읽으면 안 될까요?」 (p.143)
「에이, 영감님도. 조금 더 천천히 읽을 수 없어요?」 (p.144)
그때서야 노인은 그들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낱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은 그들과 함께 그 뜻을 이해하고자 천천히 이야기를 이끌기 시작했다.(p.145)
암살쾡이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노인 곁에 있던 수색대 사람들이 하나 둘 노인의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함께 곤돌라와 곤돌라를 움직이는 사공 그리고 뜨거운 키스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연애 소설을 읽는다. 함께 인간의 야만성을 잊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노인의 고독과 절망을 나눠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비극적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더디고 힘겨운 일이겠지만,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믿고 싶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은 나도 이미 노인의 고독과 절망의 한 조각을 나눠가진 셈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