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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신적이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든, 사람과 사물간의 만남이든 무언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편이다. 영화도 그 사물들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중간고사가 끝난 후 한없이 들떠 있던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기도 하고, 반대로 법학도로서 그녀, 돌로레스의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학문적인 욕구를 불타오르게 해준 영화인것 같다.

가정 내외에서 천대 받으며 무수한 폭력을 견디는 사회적 약자 돌로레스(케시 베이츠 분)의 모습은 현진건의 단편소설 『불』의 순이와도 닮았다. 『불』에서의 순이는 시어머니가 자비하게 강요하는 노동과 남편의 성적 폭력을 참지 못해 그 ‘지옥’과도 같은 집에 불을 질렀고, 지구 반대편의 돌로레스 여사는 무자비한 착취와 유일한 희망인 딸의 순결, 그 상황을 벗어날 탈출의 기회마저도 앗아 간 남편을 실족사로 유도했다.

이 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 인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끝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의 인권신장을 암시하는 내용이라 볼 수도 있겠고, 살인과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무죄 판결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의 법정 드라마라 볼 수도 있겠으며, 아니면 인간의 사회생활 이전에 모든 암컷의 본능과도 같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담은 휴머니즘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시간을 두고 여러 번 감상했다면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여성의 권리가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어쨌든 인생의 전부가 훼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성의 일대기가 아닌가. ‘고통스러운, 유감스러운’이라는 어원의 이름 Dolores가 암시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영화 속 돌로레스에게 과연 유죄를 선고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라. 가까이에 있는 보통의 우리 어머니들도 단지 결혼이라는 수레바퀴 아래 알코홀릭 남편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할 수 있다는 것을.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던 딸마저 그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했을 때 과연 우리의 법은 모성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법학도들이 판례 공부를 시작할 때 중요한 리딩 케이스로 부상하기 시작한 ‘김보은 사건’이 먼저 떠올랐다. 의붓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한 김보은 양이 남자친구와 공모해 의붓아버지를 살해했지만 법원은 김보은 양의 정상을 참작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성 아래 돌로레스는 딸 셀리나의 강간이 자신의 죽음보다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영화 중 깨어진 거울에 비친 돌로레스의 프로필은 어쩌면 그녀의 무너진 자아를 대변하는 장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인이 무엇보다 여성 그 자체의 유약함과 그래서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은 과거를 지녔지만 이미 그를 죽음으로 이끈 거액의 상속인이자 미망인 베라, 그녀의 가정부 일을 하지만 정신적으로 깊은 유대를 지니며 그녀의 비극을 전승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 돌로레스, 그리고 그녀의 딸이자 같은 여성이며 깊은 사랑과 원조를 받았음에도 그녀를 외면하던 셀리나.

돌로레스가 남편을 죽이기까지는 악녀의 원죄를 뒤집어쓰면서도 자신과 딸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같은 과거를 지닌 베라와 누구보다 깊은 정신적 유대를 가지게 되고, 셀리나는 어머니를 살인마라고 증오했지만 충격적이었던 과거를 기억해내며 그 때에도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로서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돌로레스의 마음을 깨닫고 이내 용서하게 된다.

악녀는 악녀를 만들고, 그 악녀 역시 자신의 딸을 지켜내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어 그 딸이 악녀를 용서할 때에 모든 여성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일까? 자신의 젊음과 권리와 자식마저 모든 것을 빼앗고 폭력만을 행사하는 남성들만의 사회 앞에서 말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단순한 과제물로만 생각해서, 대충 보고 감상을 적어봤다는 게 대단히 쑥스럽다. 한두 번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감독 및 제작자에게 대단히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라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당분간 이 영화의 첫 인상은 ‘소외받고 고통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 있는 사건’ 정도가 될 것 같다. 부실한 내용이라 좋은 레포트 점수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몇 번 정도는 더 감상해도 좋을 영화 같다.

그리고 탄탄한 플롯도 플롯이지만 무엇보다 서늘함과 아늑함이 공존하는 영상미도 매력적인 영화인 것 같다. 고즈넉한 고향을 연상시키는 리틀 돌 아일랜드 바닷가 언덕의 풍광이나 영화사에 있어 가장 고상한(?) 살인방법으로 기억될 듯한 개기일식(eclipse)의 완전한 어두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날 것 같은 우직한 외모의 돌로레스가 내내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다 후반부에서 터뜨리는 눈물 한 방울의 깊은 의미 등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