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공존, 꺼내기도 싫은 말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지리멸렬한 두 나라의 행태에 분노한다. 사회 지도층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매우 중요함에도 이 두 나라는 역사에 관한 한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내가 이렇게 싸잡아 비난하는 이유는 과거 국권 침탈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과 일본 패전 후 한국에서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허나 일본과 한국의 망국적인 행태를 보면 이게 과연 어느 나라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분노를 삭힐만한 내공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일본을 생각하면 피가 역류하고 이성을 상실한 채 머리도 가슴도 뜨거워진다.

지난달 말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해결노력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가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권침탈 100년이 넘었건만 이 결정이 나자 정부를 비롯하여 여와 야는 마치 독립투사의 후예인 양 앞다투어 논평을 발표하기 바쁘다. 주일 대사를 소환해 헌재의 결정을 알리는가 하며 다각적인 외교 노력을 꾀하려 하지만 이도 쉽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발목을 잡는 하나가 있었으니 외교통상부 한일협정청구권협정이 그것이다. 첫단추부터 잘 못 끼우고 이제 와서 설레발이라니, 오호통제라...

조용한 외교를 한답시고 일본에 뒤통수를 맞은 일이 어디 한 두 번 일이던가. 대지진 참사 이후도 그랬으며 이 정부가 들어서며 불거져나온 독도 문제도 그랬다. 역시 역사에 대한 인식은 아키히로에겐 무리가 아닌 듯싶다. 국립묘지에 안치된 친일파, 성희롱 추태로 물의를 일으킨 강 의원을 구제코자 국회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를 용감하게도 구해낸다. 나라가 이 꼴이니 국민에 의해 선출된 최고 지도자나 국회의원을 보면 토악질이 멋질 않는다. 과연 그들의 뇌 구조 속에서 일본에 대한 사회과학의 정당한 논의를 기대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던가.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일본에 고함]은 나 자신은 물론 일본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인식의 폭을 넓혀줄 좋은 시간을 마련해준 책이다. 역사를 바로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정부는 자본주의의 칼바람을 맞는 와중에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실험받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을 등 진 그들만의 왜곡된 역사 인식의 오류는 헌법 재판소의 지적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올해, 광복절 기념사. 독도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이 우회적으로 돌려가며 읽어내려간 그의 모습을 보며 희망없는 사회에서 사는 서글픔을 또다시 느껴본다. 차라리 어쭙잖은 광복절 기념사를 듣는 것보다 칼의 노래를 읽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역사 인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과의 공존, 꺼내기도 싫은 말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경지

고전(古典)을 통해 수많은 위인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만, 사상가들의 가르침에서 교훈을 얻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교 영향권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호흡을 하고 있음에도 서양철학에 비해 빈곤과 무지에 가까웠던 동양철학의 이론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친숙하고 관심을 두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세계, 국가, 그리고 가정에 이르기까지 변화된 생활과 더불어 다양화된 가치관 속의 치열한 경쟁은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이치로 우리는 이러한 변화와 경쟁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문화를 체득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더욱 어렵고 혼란스러운 인간관계는 물론 윤리와 도덕마저 땅에 떨어져 자식과 제자가 부모와 스승을 해하고 오로지 물질을 통한 인간관계를 지속하며 사리사욕과 명리(名利)만을 추구하는 등 극도로 혼탁한 이기주의가 이 사회에 팽배해 있음을 목도하기도 한다.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이에 대응해 본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침을 꼽으라면 바로 중국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을 살펴보면 역사서나 문학 작품, 처세훈(處世訓), 병서,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요동치는 역사의 변화를 파하고 지나온 과정을 통해 인간을 관통하여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고전은 단지 죽간(竹簡)에 활자화되어 표기된 하나의 문자가 아니라 시대사상과 철학 정신이 깃든 인간학의 모태(母胎)이며 자신의 주체성을 공고히 유지하고 변화하는 세파에 중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교양이요, 학문이며, 윤리의 근간이다.

여타 고전에 비교했을 때 학문적 깊이와 성찰이 돋보이는 열자는 실존인물의 여부를 가리는 논쟁을 떠나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그 실체를 도가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도가의 책 가운데 [노자]와 [장자], 그리고 [열자]는 중국의 3대 경전(經典)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 중 생명에 대한 달관적인 견지나 묘사에 가장 으뜸인 [열자]는 과거(科擧)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도가 사상의 가장 비중 있는 경전이기도 하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현재, 매시간 긍정적인 사고로 만족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이 비로소 인생의 참뜻을 이해한 진정한 선(禪)의 자세이다. 최고의 가치 철학을 품은 도가(道家) 사상도 바로 이 선종(禪宗) 사상으로 열자는 인생의 더께에 녹슨 핏줄의 때를 벗겨 단단한 사상과 유연한 감성의 영양을 공급한다.

성이 열(列)이고 이름은 어구(禦寇)인 [열자]는 응고 집약적인 논리를 지양하고 비유와 상징을 통한 우화로 마음을 비워 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무위자연의 도가 학설을 여러 비법의 예와 더불어 쉽게 논거해 놓았기에 일반인도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귀허주의(貴虛主義), 낙생주의(樂生主義), 자운주의(自運主義), 우언주의(寓言主義)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열자 사상의 네 가지 특징과 총 8편으로 구성된 [열자]는 어구(禦寇)인의 창작으로 인정하기보다 후대에 이르러 가필이 더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나 [한서](漢書)[예문지]에도 [열자] 8편이라 기록된 점이 일치하고 있어 후대 학자들의 많은 고증을 통해 [노자]와 [장자]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고전 [열자]는 비단 우리가 추구하는 바인 정중동(靜中動)의 의미와 문학적인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우공이산(愚公移山), 기우(杞憂), 조삼모사(朝三暮四) 등 재미있는 고사를 통한 현명한 삶의 지혜와 달관된 인생관을 이끌어주는 무위(無爲)의 도인 도가 사상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장자와 더불어 고전의 참맛을 즐기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 세상이 변하고 문명과 체제가 다르다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중국의 고전은 현대인의 찌들고 혼탁해진 병든 마음의 더께를 맑은 양식과 유연함으로 한 꺼풀씩 벗겨 낸다.

30년을 살았을 때는 내가 보였고,

40년을 살았을 때는 가족이 보이고, 50년을 살았을 때는 주변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70년을 조금 넘게 산 지금에서야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보인다.

저자의 나이에 이제 반을 넘어 따라가고 있지만 역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철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두 어른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 제 나이에 맞는 생각과 행동이 따라야 그제야 비로소 나이를 먹었다고 우리는 말한다. 노령화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경제 활동 인구의 감소도 점차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으나 언제나 청춘인 노년들의 활동을 바라보면 내심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흔의 능선을 거뜬히 올라 지난날을 회상하는 저자의 모습에선 연륜과 노숙의 미가 주름살에 켜켜이 박혀 원숙이라는 경지에 이른듯하다. 저자가 우리네 부모님 세대이다 보니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것들]에서 보는 풍경은 그리 생경하질 않다.

4계절과 더불어 24절기로 풀어낸 이야기보따리의 형식은 매우 인상적이다. 단편 에세이를 보는 기분으로 이야기의 중심에는 세대와 세대 간의 공감이 있다. 30년을 살았을 때는 내가 보였고, 40년을 살았을 때는 가족이 보이고, 50년을 살았을 때는 주변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70년을 조금 넘게 산 지금에서야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보인다.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공감은 불혹에서 가족을 보듬고 있는 것이고 지난날 이립에 들어설 때를 보자면 내가 늘 중심이었던 것을 보면 역시나 저자의 연륜이라는 내공의 힘은 어쩔 수 없는가보다.

살아온 날들이 역사다. 누군가의 기억에 담긴 모든 것은 역사이다. 내 가족의 역사가 내 사회의 역사이며, 내 나라의 역사인 것과 같이 저자의 역사 또한 공유되고 기록된다는 점에서 매우 반길만 한다.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은 이들이 살아온 역사를 통해 산자는 삶의 밝음과 어둠을 기꺼이 감싸 안는 사랑과 느림의 미학을 통한 지혜와 현명함을 배우고 사자의 거룩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을 마련케 해준다.

사적인 견해로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은 저자 개인의 평전과도 같아 개인 자신의 이야기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각 단원의 말미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 바로 이 점인데 객관적인 타인의 삶보다는 주관적인 삶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다소 대중화되기에는 무리수가 아닐까 싶다. 이제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서늘한 가을이 성큼 다가올 때쯤 한 해의 성숙함이 절정에 이르고 또다시 다음 해를 위해 많은 사색의 시간을 마주해야 할 시기이다. 지금 이때, 에세이 한 편 어떠한가. 노련과 원숙의 주름이 늘어간다는 것은 연륜이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