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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트렌드와 패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 기본 2012.11.06 1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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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리베르 | 20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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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트렌드와 패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리뷰를 하나만 쓸 수 있어서 별도의 리뷰를 등록할 수 없으므로 제1부에 덧붙여씁니다

 

2012-11-08 오전 10:53 작성

 

 

 

그제 시작해서 어제 끝난 리뷰의 제1부에서 나는 변화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언급했다. 그런 주제를 먼저 제시한 이유는 Lindkvist의 책 한글번역본 표지에 나와있는 <변화를 읽지 못하는>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제2부 아래의) 리뷰 제1부는 <설령 변화(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내더라도 실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근거란 <솔직하지 못함>이 변화를 다루는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에 대한 설명이었다. 솔직하지 못함을 <일상적인 케이스>로 바꾸어 말하면 <진짜 문제> 대신 <가짜 문제> 또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격을 소모하는 현상이다. 진짜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다루어지지도 않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램이 아닌가?

나는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것보다 <제대로 변화를 인식했음에도, 제대로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무한경쟁 속에서 변화추구와 혁신활동이 일상적인 활동이 되어버린 기업 경영의 세계를 보면 더욱 그렇다. 대개의 논의는 변화의 방향을 잘못 인식하거나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실제로 관찰되는 현상들은 오히려 <잘못된 대응>이 더 심각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여러 사건들을 보면 문제는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단순하다는 표현은 사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결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사건 자체는 매우 복잡해도 해법은 매우 단순할 수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최종 해법이라는 게 칼로 내리쳐서 끊어 버리는 것처럼 간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식의 해법은 보통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거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것처럼 <다른 결말>에 대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 TV 드라마>는 매우 좋은 아이디어를 준다. TV 드라마의 플롯은 사실 <단순하면 안 팔린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항상 <非상식적 대응>이 계속 되다가 최종회에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우리는 종종 이런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부른다. 제 아무리 사건 자체가 막장 스타일이어도 <해결책이란게 더 큰 문제를 낳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막장 드라마는 <중간 해결책들>이 <끊임없이 다음 회를 예고>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드라마 작가나 방송사에는 매우 좋은 전략일 수 있지만--그들의 목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청률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현실 속에서 삶의 실제적인 난제와 싸우는 사람들이 채용할 수 있는 전략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어제 1부에서 언급한 바처럼 성급해서는 안 돼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덧나게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문제의 해결을 꼬이게 만들고 지연시키는 것이 대안일 수는 없다. 우리들의 대다수가 이런 평범하고 상식적인 명제에 동의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사태는 TV 드라마를 쏙 빼닮았다. 놀랍지 않은가? 문제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 것인가?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문제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할 수 있다--그들은 다른 이득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모든 관계자가 그럴 수는 없는 것 또한 마땅한데, 정말 희한한 일들이 도처에서 목격된다는 점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Catching(인식)>의 문제보다 <Reaction or Measure(대응)>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더욱 명료한 표현을 제시하자면,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어떤 조치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숨겨진) 이유로 말미암아 그것을 기피한채> 말하자면 일탈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탈은 일회성이 아니라 <파국이 닥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심각하지 않은가?

 

대응이 중요하다는 것은 변화와 트렌드를 제대로 짚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예를들어 휴대폰의 절대강자 Nokia가 Apple의 iPhone의 등장 이후에 불어닥친 Smart Phone Market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경영학의 사례에서, Nokia는 변화(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대응을 못한 것인가?

이런 주제는 사실 다루기에 대단히 미묘하다. 그 첫번째 이유는 사전적인 것과 사후적인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는 점이다. Nokia, Sony의 몰락과 Apple, Samsung의 부상으로 요약되는 그 현상을 누군가가 <설득력있게 예측했다면> 오늘의 판도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평론가의 거의 전부가 고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Nokia와 Sony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직문화부터 공룡(지배자)의 원천적인 한계, 새로운 기술의 특성, 소비자의 변화 등 수많은 설명들이 있지만, 이런 설명들은 <트렌드를 잘못 읽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부적합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대응>에 대한 질책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해본다. 트렌드가 <트렌드>가 되는 시점은 대체 언제인가?

내 질문과 주장의 요지는,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다음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Crown을 회복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망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물론 있다. Winner-Takes-All Economy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분량 때문에 여기에서 더 논의를 할 수는 없다.) 순식간에 망하는 시대라서 순식간에 망했다는 말은 틀렸다. 망한 자들은 절대로 순식간에 망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Winner-Takes-All Economy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소위 Preemptive Effect(선점효과)라는 것이다. 경영학적으로 분명히 근거와 실증이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러한 전략은 대단히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기업가정신의 위대한 실현이라고 떠들 수도 있지만, 이런 고착상태를 깨는 것 또한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Preemptive Strategy가 정말로 불가침의 전략이라면, 그 기업은 영원히 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은 또다른 경영학적 발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경쟁자는 동종 업계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그 놀라운 발견 말이다.

그래서 <트렌드>라는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즈니스의 어느 산업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과 개인이 시야를 넓히는 게 필요하다. 90년대에 Mega-Trend라는 말이 나왔었는데, 이제 그런 말은 더 이상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일상적인 Trend 자체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도 트렌드의 캐칭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지해준다. 한마디로 트렌드의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데, 그걸 예측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민첩하게 대응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Lindkvist는 정반대로 너무 느린 변화를 말하고 있다. 나는 느린 변화라는 표현보다 숨은 변화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싶다--물론 느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트렌드의 인식보다 대응이 중요하다, 그리고 트렌드 자체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나는 그러므로 트렌드의 인식방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분법적인 주장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란 것을 안다면 훨씬 이해가 편하겠지만, 트렌드의 인식과 대응은 사실 분리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휴식 후에...)

 

2012-11-12 오전 10:44 (아래)

 

주말 동안 Lindkvist도 읽고, 다른 참고자료도 보았다. 올해는 Thomas 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1962)가 나온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과학발견의 세계에서 50년 동안 계속되는 법칙이야 흔하디 흔하겠지만, 이것은 인식론(Epistemology)의 하나라는 점에서 특별히 놀랍다. 적어도 Trend에 관해서 논의를 하는 사람이라면 Kuhn의 Paradigm Shift에 관한 아이디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Kuhn의 책 3판(3rd edition, 1996,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도 있고, <Historical Structure of Scientific Discovery>(Thomas S. Kuhn, <Science>, New Series, Vol. 136, No. 3518 (Jun. 1, 1962), pp. 760-764, Published by: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Stable URL: http://www.jstor.org/stable/1708511)도 있지만, 이 리뷰에서는 다른 과학자의 서술을 소개하기로 한다.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prdNo=204069529&bookblockname=b_sch&booklinkname=bprd_title

 

Arthur M. Silverstein의 <A History of Immunology>(2nd ed., 2009)--면역학의 역사--에 나오는 Forewor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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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인용구절

...I fancy you as coming to the acquisition of the myriad facts of medicine with little to tell you of the intellectual forces and historical sequences by which these facts have emerged.
Christian A. Herter
Imagination and Idealism in Medicine (J. Am. Med. Assoc. 54:4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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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word: On history and historians

역사와 역사가에 관하여

 

History is not the study of origins; rather it is the analysis of all the mediations by which the past was turned into our present.
- H. Butterfield

역사는 최초의 기원(origins)에 관한 연구가 아니다; 역사는 오히려 과거가 우리의 현재로 바뀌게 된 <모든> 생각들에 관한 분석이다. (H. Butterfield)

 


The working scientist who entertains the notion of writing a history of his discipline must do so with diffidence and no little trepidation. While he may know more of the facts and scientific interrelationships within his specialty than does the professional historian, nothing in his training or experience has prepared him to deal in the special currencies so familiar to the historian in general, and to the historian of science in particular. If he is to write more than a mere encyclopedia of names, dates, places, and facts – an unappealing venture – then he must deal with such unfamiliar concepts as the sociology and epistemology of science, cultural relativism, etc. Such recondite ideas rarely enter into the formal training of the biomedical scientist, and never into his scientific practice. Indeed, if he considers such concepts at all, it is probably with suspicion and perhaps disdain, relegating them to that special limbo which he maintains for the "impure" social sciences, firm in the conviction that his is a dependably precise "pure" science.

자기 분야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현직의 과학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추호의 혼란없이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과학자가 그의 전공 분야 내에서 사실들과 과학적 상호관계에 대해 전문적인 역사가(역사저술가)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해도, 과학자의 수련이나 경험 가운데 어떤 것도 일반적인 역사가에게 그리고 특별히는 과학사가에게 익숙한 특수한 표현수단을 다루도록 준비해주지(도와주지) 않는다. 만일 과학자가 이름, 날짜, 장소와 사실의 순수한 백과사전--이것은 매력이 없는 시도이다-- 그 이상의 것을 쓸 작정이라면, 그는 사회학, 과학의 인식론, 문화 상대주의 등의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그런 난해한(순수 과학자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각들은 드물게는 의생학 과학자의 공식적인 훈련과정에는 포함되기도 하지만, 의생학 과학자의 과학적 활동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정말로, 과학자가 그런 개념들을 일단 고려하게 되면, 그것은 아마도 의심 경우에 따라서는 경멸감을 지닌채, 그 개념들을, "순수하지 못한" 사회과학에 비해서 자신의 과학은 믿을만한 정밀한 "순수" 과학이라는 과학자의 확신을 굳세게 해주는, 특수한 중간지대(limbo)에 맡기게 될 것이다.

 

But this is not the most serious challenge to the practicing scientist-turned-historian. Assuming that he has overcome the typical scientist's feeling that Santayana's maxim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applies only to politicians, diplomats, and economists, he has a yet more difficult preparatory task before him. This involves nothing less than a re-examination and perhaps rejection of some of his most cherished beliefs – beliefs rarely stated explicitly, but so implicit in all of the scientist's training and education and so permeating his environment as to have become almost the unwritten rules of the game.

그러나 이것이 활동하는 과학자에서 옮겨온 역사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심각한 도전은 아니다. 과학자에서 옮겨온 역사가가, "과거를 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과거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는 Santayana의 금언을 오로지 정치인들, 외교관들, 그리고 경제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는 전형적인 과학자의 사고방식을 극복했다고 가정해봐도, 그는 여전히 그 앞에 놓인 훨씬 더 어렵게 예비된 과제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제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지녀온 믿음들--대외적으로 공표된 믿음들은 드물고, 오히려 과학자의 훈련과 교육 전부에 무언으로 내포되고 과학자의 주변에 널리 퍼져있어서 거의 불문율이 되어버린 믿음들--의 일부분을 적어도 재검토하고 때로는 포기(거부)하는 것을 포함한다.

 

The first of the beliefs to be re-examined is that of [the continuity of scientific development]. By this I mean that most mature scientists, and all students and members of the novitiate, tend to suppose that all that has gone before in a field was somehow aimed logically at providing the base for current work in that field. Thus, there is a general view that the history of a discipline involves an almost inexorable progression of facts and theories leading in a straight and unbroken line to our own present view of the workings of nature. (Historians refer to this as "Whig history,"(*주1) and condemn its practice.) Put in other terms, the scientist is tempted to regard the development of his science in much the same way that most of us seem to regard the origin of species – as a sort of melioristic evolution, following a preordained path toward the acme of perfection and logical unity: in the one case man, and in the other our present science.

그 믿음들 가운데 재검토되어야 할 첫번째는 [과학적 발전의 연속성]에 관한 믿음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숙련된 과학자들 그리고 모든 학생들과 수련을 받는 구성원들은, 어느 분야에서 앞선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업적을 그 분야의 현재의 작업에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목적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분야의 역사란, 자연의 작동에 관해서 오늘 우리 자신이 가진 견해에 단절없는 곧은 직선의 형태로 이어지는, 사실들과 이론들의 거의 불변의 연속적인 진보를 다루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역사가들은 Whig history(*주1)라 부르며, 그런 방식을 꺼린다.) 다른 말로하면, 과학자는 우리의 대부분이 종의 기원--일종의 <개량주의적 진화>로서, 완벽함과 논리적 통일의 절정을 향해서 <미리 정해진 길>을 따른다고 생각하며, 하나의 예는 인류의 진화이며, 다른 예는 오늘날 우리의 과학이다--을 바라보는 것과 많이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도록 이끌어지고 있다.

(*주1) Butterfield, H.,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New York, W.W. Norton, 1965.

 

But this is not really surprising, when we consider how most science is practiced and reported, and especially how scientists are trained. In the first instance, the scientist chooses a problem to work on that could scarcely be justified as other than the next logical step in the progress of his discipline – i.e., the next obvious question to be asked and problem to be solved. Then, having successfully seen the research to its conclusion, he submits the work to the scientific literature (the unsuccessful excursions generally going unreported). Now, for a variety of reasons, including ego, space limitations, and the implicit cultural view of how science ought to function, our author prepares his manuscript so that not only is the work presented as internally logical and the result of an ordered sequence from start to finish, but the background introduction and its supporting references from past literature are also carefully chosen to demonstrate that(**) this work was eminently justified in its choice, and in fact was the next obvious step forward in a well-ordered history. Each communication in the scientific literature thus contributes modestly and subtly, but cumulatively, to a revision of the reader's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of his discipline.(*주2)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이 수행되고 알려지는 방식, 특히 과학자들이 훈련되는 방식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은 아닌 것이다. 첫번째 단계에서 과학자는 그의 분야에서의 논리적인 다음 단계의 진보가 아니라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현재의 과학적 관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는) 문제, 이를테면 (연속적인) 다음 단계의 분명한 질문과 해결해야할 문제를 연구대상으로 고른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연구가 <결론>에 도달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보고,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를 과학 저널(scientific literature)에 제출한다(빗나가서 실패한 내용들은 보통 알리지 않는다). 자존심, 지면의 제약, 그리고 과학의 역할에 대한 암묵적인 특수한(cultural) 관점을 포함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이제 우리의 저자는 그의 원고가 내적인 논리를 갖춘 작업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있는 연속의 결과일뿐 아니라, 배경(근간)의 소개와 과거의 발표로부터 그것을 지지하는 참조들(references)을 주의깊게 골라서 그로인해 자신의 작업이 현저하게 정당화되며 사실상 잘 짜여진 역사의 명백한 다음 단계의 진전임을 증명하게끔 자신의 원고를 준비한다. 그렇게해서 과학 저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견교환은 조심스럽고 은연중에 그러나 누적적으로 그의 분야의 역사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를 바꾸는데 기여하게 된다.(*주2)

(*주2) Julius H. Comroe's essay "Tell it like it was" speaks well to this point: Comroe, J.H., Retrospectoscope: Insights into Medical Discovery, Menlo Park, Von Gehr, 1977,
pp. 89–98.

(**to demonstrate that 이하 두 번의 was는 가정법이기 때문에 현재형 대신 쓰였다. 문법적으로는 were)

 

There is, however, a far greater force in science which operates to impose an order and continuity on its history, manifested not only by an influence on the types of problems deemed worthy of pursuit, but more importantly in the way in which young scientists are educated. There is in any scientific discipline, and there ought to be, a priesthood of the elite. These are the guardians of the scientific temple in which resides the current set of received wisdoms. These are the trend-setters and the arbiters of contemporary scientific values. They are also, not coincidently, the principal writers of textbooks and the most soughtafter lecturers, as well as the principal researchers in whose laboratories young people serve their scientific apprenticeships. They are, in brief, the strongest and most vocal adherents of what Thomas Kuhn, in his provocative book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주3) has called "the current paradigm." In Kuhn's usage, a paradigm in any field is the current model system and the accepted body of theories, rules, and technics that guide the thinking and determine the problems within that field. Kuhn points out that when a change in paradigm occurs within a discipline (he insists that this is inevitably the result of an abrupt revolution), the textbooks must be rewritten to reflect the new wisdom. This invariably involves a revision in the interpretation of what went before, so that the new paradigm can be shown to be fully justified as a step forward in scientific progress, and worthy in all respects to command the attention of the current community of scholars. Since the object of a text is pedagogy, the facts many and the concepts complex, what went before must necessarily be winnowed, abstracted, and digested, in order to provide the student with what is required to follow in the illustrious footsteps of the current priests. Therefore, the modest history that is included in most texts, and the routine appeals to the idols and heroes of earlier times, are more often than not subconsciously slanted to help justify the current paradigm and its proponents; they serve to reinforce the impression of a uniform continuity of scientific development. Assuming that one is a reputable member of a current scientific community, and thus a subscriber to the current paradigm, the scientist-turned-historian must be especially on guard not to contribute also to a revisionist history of the field. One might then be rightly accused of presentism,(*주4) the interpretation of yesterday's events in today's more modern terms and context.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 질서와 연속성을 부여하도록 작동하는 더 큰 힘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의 종류에 대한 영향력에 의해서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젊은 과학자들이 교육되는 방식에서 드러나게 된다. 과학의 어떤 분야에도 엘리트 집단이 존재하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이들은 (과거에서) 전수되어 이루어진 현재의 과학 지식이 존재, 활동하는 과학적 사원(temple)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과학적 가치들의 유행을 선도하며(trend-setter) 동정(identification, discernment)을 좌우하는(arbiter)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 꼭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교과서의 주요 저자이고 대부분 인기있는(sought-after) 강의자이며, 동시에 이들의 연구실에서 젊은이들이 과학적 수련을 받게되는 주요 연구자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Thomas Kuhn이 그의 도발적인 책 <과학혁명의 구조>(*주3)에서 "현재의 Paradigm"이라고 불렀던 것의 가장 강하고 시끄러운(vocal) 옹호자들이다. Kuhn의 용법으로는, 어느 분야에서의 Paradigm이란 현재의 model 체계이며 해당 분야 내에서 생각을 지도하고 문제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 위해 받아들여진 이론, 법칙, 기법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Kuhn은 어떤 분야에서 Paradigm에 변경이 일어나면 (그는 그런 변경은 필연적으로 갑작스런 혁명의 결과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식을 반영하기 위해 교과서(과학적 성과를 정리한 모든 것)은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예외없이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것에 관한 해석의 변경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새로운 Paradigm은 과학적 발전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완전히 정당화되고 현재의 과학자 집단의 주목을 일으킬만큼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게 된다. 수많은 과학적 사실들과 복잡한 개념들로 구성된 텍스트의 목적은 교육이기 때문에,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것은 필수적으로 선별되고(winnowed) 발췌되고(abstracted) 정리되어서 현재의 엘리트 과학자들(priests)의 걸출한 예를 학생들이 본받는데(follow in the footsteps)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텍스트들에 포함된 적당한 역사와 이전 시대의 우상과 영웅들에 대한 일상적인 원조요청(appeals)은 종종 현재의 Paradigm과 그 지지자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돕는 경향이 있다; 즉, 텍스트에 실린 역사와 우상과 영웅들에 대한 원조요청은 과학적 발전이 통일된 연속성 아래에 이루어진다는 인상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누군가가 현재의 과학자 집단의 평판이 좋은 일원이며 그리하여 현재의 Paradigm의 지지자라고 생각해보면, 과학자에서 옮겨온 역사가는 그 분야의 수정주의자들이 만드는 역사에 함께 이바지하지 않기 위해 특히 경계를 해야한다. 그 평판있는 과학자는,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의 훨씬 발전된(modern) 용어와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것을 뜻하는 Presentism(*주4)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정당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주3) Kuhn, T.,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2nd ed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주4) See, for example, G.W. Stocking's editorial "On the limits of presentism and historicism ...," J. Hist. Behav. Sci. 1:211, 1965.

 

이하 번역은 생략 또는 연기하기로 합니다. 영문의 마지막에 있는 Notes 이하에 리뷰가 계속됩니다.

 

The second of the beliefs that require re-examination – one also nurtured by our traditional system of scientific pedagogy – is that of [the logic of scientific development]. We have already seen that the investigator justifies the choice of a research problem (not only to scientific peers but also to the sources of financial support) by demonstrating its logic within the context of the accepted paradigm. This is, of course, eminently reasonable, since a paradigm lacking in inner logic (i.e., unable to define the nature of the problems to be asked within its context or to assimilate the results obtained) would scarcely merit support. But the existence of a logical order of development during the limited lifetime of a paradigm is often extended to imply an overall logical development of the entire scientific discipline. Moreover, the concept examined above of a smoothly continuous maturation of a science implies also that its progression has been logical – the step-by-step movement of fact and theory from A to B to C, as the Secrets of Nature are unfolded and Ultimate Truth is approached. Indeed, to accuse science of illogic in its development would, to many, imply the absence of a coherent unity underlying the object of science's quest – the descrip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physical world.


And yet, there is so much that is discontinuous and illogical in the development of any science. On the level of the individual research activity, much attention is paid to the beauty and strength of that eminently logical process, the Inductive Scientific Method. The working scientist, however, who thinks about the course of his own research must wonder sometimes whether the description is apt. One of the few biologists who reflected aloud on this problem was Sir Peter Medawar, in his Jayne Lectures before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Following the lead of philosopher Karl Popper,5 Medawar6 challenges the popular notion:


...Deductivism in mathematical literature and inductivism in scientific papers are simply the postures we choose to be seen in when the curtain goes up and the public sees us. The theatrical illusion is shattered if we ask what goes on behind the scenes. In real life discovery and justification are almost always different processes... [and later] Methodologists who have no personal experience of scientific research have been gravely handicapped by their failure to realize that nearly all scientific research leads nowhere – or if it does lead somewhere, then not in the direction it started off with. In retrospect, we tend to forget the errors, so that "The Scientific Method" appears very much more powerful than it really is, particularly when it is presented to the public in the terminology of breakthroughs, and to fellow scientists with the studied hypocrisy expected of a contribution to a learned journal. I reckon that for all the use it has been to science about four-fifths of my time has been wasted, and I believe this to be the common lot of people who are not merely playing follow-my-leader in research. [And finally]...science in its forward motion is not logically propelled. ...The process by which we come to formulate a hypothesis is not illogical, but nonlogical, i.e., outside logic. But once we have formed an opinion, we can expose it to criticism, usually by experimentation; this episode lies within and makes use of logic...


Even this last concession to the logic and continuity of the scientific method may overstate the case somewhat. But in any event, it certainly must be restricted in its application to the micro-environment of the normative science of a given time – that is, to a working hypothesis developed within the context of the accepted beliefs (paradigm) of the day. Within the macro-environment of a scientific discipline in transition, these rules often fail. Not only may bold new formulations be insusceptible of formal "proof" by logical application of the scientific method, but the bases for their acceptance or rejection by individual members of the community are generally anything but logical: witness, in chemistry, the transition from the phlogiston theory to Lavoisier's oxygen theory (Priestley went to his grave denying that oxygen was a separate entity); in optics, the transition from corpuscular to wave theory to an ineffable something in between; or in bacteriology, the century-long dispute between believers in spontaneous generation and those who claimed omnis organismus ex organismo (Pasteur carried the day less for the compelling logic of his experiments – most had been done before him – than by his reputation and forceful disputation). In the field of dynamics, also, it is difficult to subscribe to the idea that Newtonian theories represented a smoothly continuous development over Aristotelian dynamics, or that Einstein's theories emerged smoothly and logically from Newtonian requirements. Again, in immunology, the transitions represented by Pasteur in 1880, by the conflict between theories of cellular and humoral immunity in the 1890s, and by Burnet and the onset of the immunobiological revolution in the 1960s were hardly smooth evolutions, and perhaps not even logical progressions.

 

Many of the great advances in the sciences, whether arising from a new theoretical concept or from a discovery which redirects a discipline, are in fact quantum leaps – daring formulations or unexpected findings hardly anticipated or predictable within the context of the rules and traditions of the day. Kuhn makes the interesting suggestion that it is only when the normal state of affairs in a science becomes unsettled, when the accepted paradigm no longer provides satisfying explanations for new anomalies which perplex its theories, when, in fact, the paradigm may no longer even suggest the proper questions to be asked, that a crisis stage is reached, and the old paradigm is likely to be replaced – abruptly and discontinuously – by a new one. And often, the critical discovery or novel formulation is made by someone not committed to the old paradigm and to the old approaches and mind-set that it enforced – by the uncommitted young, or the unconfined outsider from another discipline. At such times, members of the "old guard" seem to view their science through lenses ground during the previous era. One is reminded of the hero in Voltaire's L'Inge´nu who, brought up in feral innocence

 

...made rapid progress in the sciences. ...The cause of the rapid development of his mind was due to his savage education almost as much as to the quality of his intellect; for, having learned nothing in his infancy, he had not developed any prejudices. ...He saw things as they are...


Here again, the scientist-turned-historian must modify the customary approach to a discipline and consider the significance of the blind alleys of research, the premature discoveries, the mistaken interpretations, and the "erroneous" or supplanted theories of the past. Without these our history, while more concise, would lack some of those condiments that are so very important for its full flavor.


The final one of the cherished (but essentially implicit) beliefs of the scientist which requires re-examination concerns the impetus for scientific development. By this I mean those forces which act to determine not only the direction but also the velocity of scientific activity and discovery. Most scientists seem to feel that this impetus is inherent within their discipline – an imperative driving force that dictates at least the sequence, and perhaps even the rate of its development. Thus, the scientist is fond of the notion of the "idea (or experiment) whose time has come," and supports this with case-histories of simultaneous and independent discoveries. To a certain extent, of course, this concept is apt, especially within the context of the current paradigm, as we saw above. But even leaving aside those major discontinuous and unlogical advances already mentioned, we are still left with anomalous developments. How to explain, for instance, a "premature" discovery whose significance goes unrecognized at the time (Spallanzani's refutation of spontaneous genera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Mendel's genetics; the Koch phenomenon)?


More interesting yet are those extra-scientific forces which impose themselves upon the course of scientific discovery and development. All too familiar is the effect of war upon science – the development of radar, of nuclear energy theory and practice, of transplantation immunology, to name but a few. One need only recall the Church's view of the Galilean heresy; the serious economic plight of the French silk industry whose appeal helped to direct the course of Pasteur's future work; or the benevolent view of science by Bismarck in Prussia and by Congressman James Fogarty and Senator Lister Hill in America, that did much to establish the scientific leadership in their respective countries. The ability of the Prussian Minister Friedrich Althoff to recognize talent and to reward the Kochs, Ehrlichs, and Behrings with university professorships and with their own institutes was one of the chief factors in German pre-eminence in bacteriology and immunolog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By contrast, Pasteur in France was forced to build his institute himself through public subscription, and later the operating funds of the Institut Pasteur came in no small part from its herd of horses to be immunized and from the commercial sale of antitoxins. The development of a yellow fever vaccine certainly owes much to the American occupation of Cuba after the Spanish-American war, and to the building of the Panama Canal. Similarly, not the least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the polio vaccine was the affliction of Franklin D. Roosevelt, while the critical choice between a killed versus an attenuated virus vaccine was made for mainly political reasons by a non-scientist, Basil O'Connor, Director of the Polio Foundation. Finally, when an American President and Congress declare a "War on Cancer" or on AIDS, and appropriate massive funds in its support, all of science changes in both direction and velocity.

 

These are but a few of the well-explored and documented instances of profound socio-political influences upon the course of scientific development, but there are many others deserving of the attention of the historian (and scientist), and some will be found in the text that follows. No history of a science would be complete or even fully comprehensible without their inclusion, and they add spice to what might otherwise be a rather dull and tasteless fare.

 

 

Notes

 

1. Butterfield, H.,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New York, W.W. Norton, 1965.
2. Julius H. Comroe's essay "Tell it like it was" speaks well to this point: Comroe, J.H., Retrospectoscope: Insights into Medical Discovery, Menlo Park, Von Gehr, 1977, pp. 89–98.
3. Kuhn, T.,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2nd ed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4. See, for example, G.W. Stocking's editorial "On the limits of presentism and historicism ...," J. Hist. Behav. Sci. 1:211, 1965.
5. Popper, K.,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6. Medawar, P.B., Induction and Intuition in Scientific Thought, Philadelphia,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69.

 

 

 

2012-11-13 오전 10:00

번역에 매달려 있다가 리뷰를 마치지 못할 것 같아서 못다한 번역은 생략 또는 연기합니다.

 

Thomas Kuhn, 그리고 Arthur M. Silverstein의 <A History of Immunology>의 Foreword 전부를 인용한 이유는 미래(변화)예측 혹은 Trend-Spotting에서 가장 자주 일어나는 오류가 <현재>의 사고를 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중간쯤에 나오는 Presentism은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의 훨씬 발전된(modern) 용어와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사고를 과거로 연장하는 오류는 <미래>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Lindkvist는 이것을 <모든 것을 오늘의 연장이라고 보는 직선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직선>은 단순화된 상징적 표현이고 사실은 어떤 경로든 예측이 가능한 것을 뜻한다. 그래서 152-4쪽에서는 수열의 빈칸 예측을 예로 들어서 Graph 또는 Mapping Theory에 해당하는 <예측가능한 사고법>을 설명한다. Graph 또는 Mapping Theory라는 것은 Lindkvist가 쓴 표현 그대로 <만약 X라면 그럼 Y다>(155쪽)라는 논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소위 그래프의 형상이 무엇이든 독립변수에 대응하는 종속변수(함수값)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일차원의 직선이든, Sine/Cosine 곡선이든, Log나 Exponential 그래프든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Lindkvist의 <직선적 사고방식>에 해당한다.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이 <전혀 별개의 기준을 근거로 한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해답들>이다. 이를테면 2, 4, (2), (4),... 또는 2, 4, (36), (9),...(160쪽) 등이다. 

Presentism 또는 직선적 사고야말로 변화예측에 실패하고 창의적 사고를 방해하는 매우 커다란 장애물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SF영화에 등장하는 아무리 흉측한 외계 종족도 사실은 우리의 인식틀 안에서 상상된 것이다. 우주 안에 실제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정말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형상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서 또 하나의 오류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인류보다 더 고등의 능력을 가질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방향으로의 추정은 사실상 아무런 지적인 근거가 없다.

Lindkvist는 <인류의 "인식"이란 우리 시대의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201쪽)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Lindkvist가 왜 <우리 시대의>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 하며 인류가 멸종하는 순간까지 극복되지 못할 현상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탈무드를 인용하자면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그 사물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대로 보는 것'이다.>(201쪽)라고 말한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 말은 정말 유명하지 않은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아는 만큼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이란!--이것은 나의 탄식이다!> Lindkvist는 (1)아무런 패턴도 없는 데서 어떠한 패턴들을 보려는 경향, (2)확실한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자기결정 정당화), (3)선입관으로 갖고 있던 편견들을 써먹으려고 하는 경향(자기사고의 강화)를 들고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편리함--소중한 두뇌 자산을 절약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정신적 지름길>이다.

 

<설득의 심리학> 시리즈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진 치알디니 교수(Robert B. Cialdini)는 그의 책에서 이에 해당하는 수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심리학의 근본 뼈대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맹목적이고 자동화된> 사고방식(1권 초판 지은이의 글)이라는 메커니즘에 해당한다. 한가지 사례를 보자. 경마장에서 사람들은 특정 말에 돈을 건 후에는 돈을 걸기 전보다 그 말이 경마에서 우승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Knox & Inkster, 1968, 치알디니 1권 "일관성의 법칙", 106쪽) 심지어는 방금 전에 내가 짧은 리뷰를 쓴 김자영 교수의 <말을 디자인하면 경영이 달라진다>에서도 발견된다.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예'라는 대답을 유도하여 청중을 심리적 갈등에 빠지게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렇죠?'라든지 '정리정돈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중요한 일을 맡기겠어요? 그렇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죠?'처럼 동의를 구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예'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정리정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자꾸 '예'라고 대답하게 됨으로써 심리적 갈등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연설자의 말에 공감하거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85쪽)

 

젊은 남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여자다루기>의 한 방법도 마찬가지다. 아주 쉽고 작은 질문으로 'YES'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조금씩 질문의 난이도를 올리다가--이 과정은 개별 질문이라면 'YES'가 쉽게 나오지 않을 질문들에서 <단계적으로> 'YES'를 이끌어내는 게 핵심이다--마지막에 원래 목표하던 질문을 던져 'YES'라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런 기법을 foot-in-the-door techniqu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승낙이 사람의 마음을 구속하는 현상--Commitment>(*주1)를 이용한 것이다.(<이제는 절대로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는다>, 이토 아키라 & 나이토 요시히토, 이선희 역, 47쪽 / <말을 디자인하면 경영이 달라진다>, 김자영, 147쪽)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일관성의 법칙>과 <인지부조화로 인한 심리적 갈등(불편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동일한 현상을 어떤 쪽에서 접근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라는 말이다.

(*주1) Commitment는 일반적으로는 위임, 약속 등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억매임, 구속>의 뜻이고--Commitment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좀 어려운 단어인가보다. 개입, 책임, 헌신 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회심리학에서는 <어떤 결정이나 행동에 관여한 정도>를 말한다고 한다.(<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이철우, 87쪽)--경제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매몰비용(Sink Cost) 역시 Escalation of Commitment(몰입상승, 출처: http://meeast.blog.me/10056843178)이라고도 표현한다고 한다. 게임이론에서 Commitment는 <자신이 미래에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상대에게 확신시켜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이 경우도 특정한 전략에 억매는(고정하는) 것이므로 같은 의미라 하겠다.(<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박찬희 & 한순구, 161쪽)

 

심리학이 인간에 대해서 증명해주는 사실은 <인간은 완전히 바보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는 개인의 차원이든 사회의 차원이든 <조작의 대상>인 것이다. 사기꾼과 정치인들은 이 수법의 단골고객들이다.

 

어쨌거나 심리학과 인간의 심리에 대한 통찰없이 소위 Trend를 다룬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다. 치알디니의 사례와 비슷한 것으로 <도박사의 오류>(Lindkvist, 167쪽)도 있다. 일관성이니 인지부조화니 하면 어렵지만, 편리함이나 자동화된 사고방식이라고 하면 훨씬 쉽다. Lindkvist의 수학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모아서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하는 순간,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93쪽)

 

심리학적 오류 가운데 최악의 후보에 당연히 올라야 할 것이 있다.

 

자기한테 약이 되는 비판을, 자기를 기만할 뿐인 칭찬보다 더 좋아할 만큼 지혜를 갖춘 사람은 아주 드물다(프랑소아 드 라 로슈코프, 135쪽)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정보에 반복해서 노출될 경우에, 그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아주 많다(137쪽, 파라드 만주, <소문이 나는 이유들>, 뉴욕타임즈, 2008년 3월 16일자)

 

마지막 인용 구절은 놀랍게도 <억울한 범인을 만드는 세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사례는 지난날의 어두운 우리 역사에서 흔히 발견된다. Trend를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든 사람과 사회현상 가운데서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꿰뚫어본 진실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또다른 어려운 주제다. 책 제목 <Everything We Know Is Wrong!>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리뷰 제2부 끝)

 

 

 

 

 

 

제1부 Have you ever been a Neoteric?

 

2012-11-06 오후 18:37

 

 

Magnus Lindkvist의 <Everything We Know Is Wrong!: The Trendspotter's Handbook>

이 책에 대한 진짜 서평은-그러니까 책을 읽은 다음의 서평은 제2부에서 쓰기로 하고

번역된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변화를 읽지 못하는 7가지 사각지대!

'아는 것'이란 함정에서 벗어나라!

 

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George Leonard가 쓴 <MASTERY - THE KEYS TO SUCCESS AND LONG-TERM FULFILLMENT> (달인 Mastermind, 강유원 역)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prdNo=204030039&bid1=search&bid2=product&bid3=title&bid4=001

에 나오는 대목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해 늘 변화를 결심한다. 그건 아주 의미 있는 변화다. 다시 말해 정기적인 연습을 해가는 달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렇게 결심하고 나면 대부분 친구에게 말한다. 결심을 써서 벽에 붙여둔다. 실제로 변화한다. 그러면 모든 게 제대로 흘러가면서 기분도 좋아진다. 행복해 진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행복해 한다. 인생이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그 다음이 되자 곧바로 퇴보한다.

무엇 때문일까? 정말 의지력이 박약한 멍청이여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퇴보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의미있는 변화에 저항하게 된다. 우리의 몸, 두뇌, 행동은 좁은 범위 안에 머무르며 변화가 일면 제자리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인간의 천성이므로 아주 당연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체온이 10퍼센트 위아래로 움직인다면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혈당도 마찬가지며, 다른 신체의 많은 기능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평형 조건, 즉 변화에 저항하는 본능을 항상성(생체 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라고 한다. 이는 박테리아에서 개구리,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가족과 같은 소집단에서 사회조직, 전체 문화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자기조절체계다. 이는 육체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상태와 행동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략)

문제는 사태가 썩 좋지 않은 상태에서조차 항상성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중략)

사실 항상성은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 기능은 모든 변화에 저항한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고 20년을 지내왔다면 그 사람의 육체는 앉아서 지내는 생활을 '정상'이라고 간주한다. 더 나은 변화가 시작돼도 그 질적인 특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늘 해오던 방식이 아니면 위협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금슬금 다시 차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게 된다.

(중략)

어떤 조직이나 문화가 변화를 거부하고, 설혹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과거로 되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저항이 좋은 변화, 나쁜 변화와는 관계없고, 다만 변화의 크기와 속도에 비례한다는 것만 알아두자. 어떤 조직이나 문화가 개혁을 원할 때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을 경우, 그것은 터무니없이 나쁜 아이디어나 터무니없이 좋은 아이디어 둘 중에 하나 때문이다."

 

George Leonard의 책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숙달 - 성공의 비결과 장기적인 성취> 정도가 되겠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10장 왜 작심삼일인가?"의 일부다.

 

그것이 성공이든 행복이든 우리가 목적달성에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의 방향과 내용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변화를 관리하고 우리의 목적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YES라고 대답한다면 순진하거나 착각이거나 거짓말하는 것이다.

<변화>를 연구하는데 아주 좋은 사례는 정치판의 <선거>다. 요즘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대통령선거는 그러므로 대단히 훌륭한 텍스트다. 사람들은 나쁜 변화에만 저항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변화 그 자체>에 저항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불편한 진실>이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하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제대로 통할 것 같은 오늘에도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Magnus Lindkvist의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틀렸다>에는 <Know>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Wrong>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온전히 지식(Knowledge)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지(Recognition)에 가까운 주제라고 해야할텐데, 이 분야는 <사람에게> 특히 <21세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근래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 <심리학>이 관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뜻이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질문 자체가 옳은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George Leonard가 말한 항상성(Homeostasis)에 관한 설명을 보면--아래의 설명은 <The New Penguin Dictionary of Biology> (8th ed., 1990, M. Abercrombie, M. Hickman, M. L. Johnson & M. Thain)에 나오는 것이다.

 

Homeo는 same 즉 "같은"이라는 뜻이고, Stasis는 stand or stay 즉 "(어떤 상태로) 있다"라는 뜻이다. Homeo를 Homo와 혼동하면 안 된다. 그리고 Biology는 "생물학"이고 Physiology는 "생리학"이다. 생리학은 "생물의 기능(Function)이 나타나는 과정이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생리학이 속하는 생물학은 생명현상을 물질론적 입장에서 분석하여,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네이버 두산동아 백과사전)

 

HOMEOSTASIS. Term given to those processes, commonly involving negative feedback, by which both positive and negative control are exerted over the values of a variable or set of variables, and without which control the system would fail to function.

번역:

HOMEOSTASIS(항상성) 보통은 Negative Feedback을 포함하고 있는데, (1)하나의 변인 또는 변인들의 집합에 대해 Positive 및 Negative Control이 개재(작동)하는 과정, 그리고 (2)그런 Control이 없을 경우에는 개체의 모든 시스템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


~ (1) Physiological. Various processes which help regulate and maintain constancy of the internal environment of a cell or organism at appropriate levels. Each process generally involves: a) one or more sensory devices (misalignment detectors) monitoring the value of the variable whose constancy is required; b) an input from this detector to some effector when the value changes, which c) restores the value of the variable to normality, consequently shutting-off the original input (negative-feedback) to the misalignment detector. In unicellular organisms homeostatic processes include osmoregulation by contractile vacuoles and movement away from unfavourable conditions of pH; in mammals (homeostatically sophisticated) the controls of blood glucose (see INSULIN, GLUCAGON), CO, and pH levels, and its overall concentration and volume (See OSMOREGULATION), of ventilation, heart rate and body temperature provide a few examples.

번역:

(1) Physiological (생리학에서의 항상성) 하나의 Cell(세포) 또는 Organism(생명체)의 내부 환경의 일관성을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고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과정들. 각각의 과정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a)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감각기관들(잘못된 조절을 탐지하는 기관들)이 일관성이 필요한 변인의 수준(value)을 모니터링(감시)한다; b) 변인의 수준(value)이 바뀌면 이러한 감각기관(탐지기관)에서 다수의 수용체(effector)로 신호가 통지(input)되고 c) 원인 변인의 수준을 정상치로 되돌려놓고나서 잘못된 상태를 탐지해낸 감각기관으로 들어가는 원래의 신호(input, negative-feedback)을 차단한다. 단세포 생물에서는 항상성 유지과정에 [수축성있는(contractile) 액포(vacuole)들의 삼투압조절(Osmoregulation)]과 [바람직하지 않은 pH(산성도) 조건으로부터의 탈피]가 포함된다. (항상성유지 측면에서 복잡한) 포유류의 경우에는 혈액 내의 포도당(gluecose) (INSULIN, GLUCAGON 항목 참조), 일산화탄소(CO), pH 수준, 그리고 혈액의 전반적인 농도와 양 (OSMOREGULATION 항목 참조), 호흡(ventilation)과 맥박수 및 체온의 조절을 항상성유지의 사례로 들 수 있다.


(2) Developmental. Mechanisms which prevent the FITNESS of an organism from being reduced by disturbances in developmental conditions. The phrase {developmental canalization} has been used in this context.
(3) Genetic. Tendency of populations of outbreeding species to resist the effects of artificial SELECTION, attributable to the lower ability of homozygotes than heterozygotes in achieving developmental homeostasis.
(4) Ecological. Several ecological factors serving to regulate population density, species diversity, relative biomasses of trophic levels, etc., may be thought of as homeostatic. See DENSITY-DEPENDENCE, BALANCEOFNATURE,ARMSRACE.


나머지 부분은 번역을 생략하기로 하자. 그런데 생물학 또는 생리학 지식에 대해서 이 리뷰를 보는 분들보다 <전혀 나을게 없는> 내가 왜 이런 수고를 하고 있을까? 이유는 이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러나 <자동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수없는 복잡한 활동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심박수에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은 심부전 등의 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인슐린 수치에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은 당뇨병을 앓는 분이다. 물론 <건강염려증>이라는 새로운 말이 등장할 정도로 건강에 관한 관심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날마다 사람들이 <체크하는> 정도는 <생명현상>에 비하면 정말 <웃기는 수준>에 불과하다. 다른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슈퍼컴퓨터>다. 아니 슈퍼컴을 능가한다. 정보의 처리량과 속도면에서 모두 그렇다. 이러한 측면은 단순히 Brain의 기능에만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분이 값비싼 기능성 화장품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각질>도 정말 놀라운 정보처리 및 생명현상의 결과다. 그러한 세포 단위보다 더 Micro한 수준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다. 리보솜이니 미토콘드리아니 DNA, RNA 등 수많은 세포생물학 용어는 학문적으로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커다란 항상성 체계의 일부에 해당한다.

번역에 앞서 인용한 네이버 두산동아 백과사전의 생리학(Physiology)의 설명에 기능(Function)이라는 단어와 물질적인(Material or Physical)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항상성(Homeostasis)는 생리학의 차원 즉 물질적인 차원에만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Psychological) 영역, 더 나아가 생명의 <개체(Individual)>를 넘어선 조직과 사회 그리고 문화의 차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George Leonard의 인용에서 확인된다.

컴퓨터공학에서는 <사용자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러나 자동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프로세스>를 흔히 Background Processes라고 부른다. 이제 인간의 심리와 기타 측면에서 작동하는 Background Process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Carl Gustav Jung(융)이라는 훌륭한 심리학자 덕분에 아주 좋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심리학은 이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심리학 가운데서도 어려운 분야인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Sigmund Freud에서 유래한 Ego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Id, Ego, Super-Ego라는 Freud식 분류 대신에 Carl Jung은 Self, Ego, Shadow라는 인식틀을 제시한다. Self(자기) = Ego(자아) + Shadow(자기에서 자아를 뺀 나머지) 라고 할 수 있는데,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Ego(자아)는 양지로, Shadow는 음지로 부를 수 있겠다. 여하튼 Shadow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기 어렵고 다소 부정적이고 어두운 측면의 Self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그림자에 해당하는 Shadow를 썼다. 생리학과 마찬가지로 Jung에 대해서도 非전문가이기에 Jung이 학문적으로 사용했던 정확한 용어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적절한 수준의 논의를 상정하고 이 문제는 충분히 양해가능하리라 믿는다.

Jung이 직접 했다고 하는 유명한 말이,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 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한다.

Good Person이 아니라 Whole Person이 되고 싶다는 말의 뜻은 Jung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Good을 추구하는 게 아니면 Bad나 Wrong을 추구하는 것이냐?" 아마도 즉각적인 반문이 들어올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반문에 대해서 Jung 심리학이 친절하게 답변을 한다. Jung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한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도덕적인 탄식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대사회다. 기술의 진보는 <범죄의 민주화>라는 예상치 않았던 파괴적인 부수효과를 가져왔다. 존재론적, 목적론적, 수단론적이라는 모든 차원에서 범죄는 그야말로 <민주화>되었다. (사실 Jung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기술적, 수단적 관점을 반박한다. 범죄의 민주<화>가 아니라 원래 그런 특질이 누구에게나 내재되어(Native)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매우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성직자도 내면에 범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고, 더욱 나아가서 실제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Wholeness가 결여된 도덕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미술관 큐레이터와 최고위 경제관료의 스캔들에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그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든 누구나 자기 내부의 숨겨진 어두움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인식된 문제, 해결해야할 과제가 심각한 것이든 아니든 여러 곳에서 <Change(변화)> 아니 <Reform(개혁)> 심지어 <혁명> 또는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실패할 수 있다. 그것도 처절하게!

Why? 도대체 왜?

Jung은 개인들이 각자의 Shadow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 <끔찍한 파괴>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인류역사의 비극적인 장은 모두 투사(Projection)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증오의 정치>, <테러리즘>, <인종청소>, <학교폭력>, 심지어 <고부갈등>이나 <부부싸움>도 근본원인은 투사(Projection)이라는 심리적인 메커니즘 때문이라는 것이다.

 

Robert A. Johnson이 쓴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낮선 나>(고혜경 역, 에코 리브르)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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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Owning Your Own Shadow: Understanding the Dark Side of the Psyche>(1991)이다.

역자인 고혜경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껴안는 작업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이다. 그림자 감싸안기는 분명 고통스러운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도 필연적인 절차다."라고 말하는데 옮긴이의 말의 타이틀은 <빛과 어두움, 그 창조적 통합>이다.

그러면서 <모순에서 역설로의 진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Johnson의 주장의 핵심인데, 모순(Contradiction or Inconsistency)이란 <서로 충돌하는 Polarity(대극)의 존재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역설(Paradox)는 그러한 모순이 <창조적으로 통합>된 상황이다. 항상 논쟁의 근원이 되는 용어의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개념에 집중해 주기를 바란다.

Johnson은 Ego와 Shadow가 어떤 양상의 Self를 만드는가를 설명하면서 시소(seesaw)를 사용한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그 시소말이다. 이 시소의 양쪽에 각각 Ego와 Shadow가 놓이게 되는데 사실 별로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Johnson은 정말 놀라운 제안을 한다.

"이 시소게임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신(God)이 부여한 온전한(Whole) 특질은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시소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만 가능하다." (25쪽)

이것은 Jung의 심리학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좋은) 프레임(Frame)일 것이다. George Leonard의 책에서 언급되었던 <항상성(Homeostasis)>가 Johnson의 책에서도 등장한다. 그것이 같은 리뷰 공간을 채우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우리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고, 산과 알칼리의 비율을 조절하고, 그 밖에 수많은 평형을 유지하듯이 심리도 이와 같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인 균형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심리적 균형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26쪽)

Johnson에 따르면 Jung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통찰력 가운데 하나는 "우리 의식의 특질이 더 정교해질수록 반대편에는 더 큰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란다. (32쪽)

<달인>을 다루는 Leonard의 책과 <자기의 그림자>를 다루는 Johnson의 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정말 놀랍게도 핵심개념에 속하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또 하나의 키워드는 <순수 천재성>(Johnson, 33쪽) 또는 <제2의 순진함>(Leonard, 184쪽)이다.

Leonard가 <제2의 순진함>이라고 표현한 특질은 심리학자 Abraham H. Maslow(인간욕구 5단계설 주장)가 <잠재력이 비상하게 뛰어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어린이처럼 순진한 행동 특성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붙인 것이다. 애슐리 몬태규가 Mozart나 Einstein 같은 천재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Neoteny(뜻-새롭게 태어난) 역시 마찬가지인데 Leonard의 책을 구성하는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바보스러울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Johnson이 주장하는 천재적 예술가의 특질은 "최종 산물인 자신의 창작품에 어두움을 포함시켜서 그림자(Shadow)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광의의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순수 천재성이다. 이런 예술작품의 특질을 전일성(Wholeness), 건강, 신성함으로 들 수 있다. 작품의 생명력은 생기가 없는 일방적인 선(Goodness)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다 포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본래 성인(Saint)의 특질이란 이런 것이다." (33쪽)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고 오직 좋은 것만을 수용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미래의 전망에 관해서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문제에서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철저하게 은페한다>. Jung도 Johnson도 바람직하지 않은 특질을 드러내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그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남에게 투사(Projection)하게 되어있고 그것은 <(책임의) 전가>라는 형태로 일상에 등장한다.

"그림자를 <전가>하는 최악의 상태는 부모의 그림자를 자녀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중략) 만일 부모가 자신들의 그림자를 어린 자녀에게 부가하는 경우, 자녀의 마음은 <분리>된다. 자아와 그림자의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자녀들은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짊어지는 그림자보다 훨씬 더 큰 그림자를 성장기에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결혼을 하면 다시 자녀들에게 그림자를 전가하려 든다. 인간의 죄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선물,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면 자녀들에게서 자신(부모)의 그림자를 덜어주라." (50쪽)

Johnson의 책에는 "내면의 천국과 지옥을 직면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의력인 것이다"(56쪽), "우리가 영웅을 숭배하는 것은 순전히 그림자 때문이다"(59쪽),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어두움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대신 상대방이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 이 경우도 상대에게 대단히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둘째, 자기 그림자를 내던져버림으로써 스스로 황폐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황홀경을 경험할 지렛대(시소)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64쪽), "진정한 창조적 행위는 온전한(Whole)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지 부분적으로(Partially)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빛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가 더 큰 실체를 보지 못하고 더 큰 비전(Vision)을 갖지 못하게 한다"(72쪽) 같은 구절도 나온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생활에서의 그림자>도 재미있는,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주제이지만 그 부분은 책을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원래 이 리뷰는 Magnus Lindkvist의 책 <Everything We Know Is Wrong>에 대한 리뷰이고, 따라서 <변화>가 주요 키워드였다. 이제 <성장과 변화의 기회> 그리고 <더 큰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한다.

변화, 개혁, 혁명 또는 혁신이라는 용어간의 구별이 무엇이냐는 이 리뷰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수준이든간에 <왜 실패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리뷰의 출발이자 마지막이다.

너무나 단순화된 결론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모든 종류의 변화실패의 기저에는 <어두운 면에 대한 이해부족>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개인의 차원이든 사회의 차원이든...

Jung 심리학과 Johnson의 책은 이에 관한 답도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예로 든 예술가의 창조적 행위가 그렇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예술가처럼> 소위 <전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또 <예술가>라는 칭호가 모든 것에 대한 사면을 뜻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어두움의 승화>다. 이것이 어떻게 처리되는가가 개인의 그리고 사회의 성패와 궁극적으로는 변화 그 자체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승화>라는 단어가 어쭙지않은 <타협> 혹은 <봉합>을 뜻한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잘못이다. <변화 리더의 조건>이라는 경영학자의 책도 있지만, 변화에서 리더가 중요한 이유는 그만큼 변화 프로세스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경영학자는 조직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변화 리더라는 말이 가능하지만, 개인이 변화해야 한다면 그 변화의 리더는 누구일까?

승화라는 말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서의 변화 리더라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류의 개인주의적이고 인식론적인 접근방식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문제의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논쟁>이 아니라 <결과>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의 필요성도, 이유도, 그리고 처방까지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변화들이 실패한다는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이것은 변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변화의 실패를 잉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구분이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의 진짜 문제는 <진짜 문제>를 숨기는 게 유리하게 되는 구조적인 차원 즉 잘못된 유인체계를 갖는다는 약점인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형식주의>와 <위선>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장 위대한 변화는, 아니 작은 변화의 성공조차도 <솔직함>에서 출발한다. 짐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가 공저한 <Built To Last>에는 "더 멀리 가고, 더 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려는 열정은 어떤 외적인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발전을 향한 열정을 통해 비전 기업은 자기 비판과 강한 자신감을 함께 보여 준다. (중략) 외부 세계가 요구하기에 앞서 자기 비판에 의해 스스로 변화하고 개선시켜 나간다. 따라서 비전 기업은 스스로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가 되는 셈이다." (125쪽)

나는 경영컨설턴트의 기업가적인 관점을 수용하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어두움에 대한 솔직함> 그리고 <인정과 승화>야말로 변화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병은 널리 소문내라"는 옛말이 있다. 그 말의 취지는 널리 좋은 방안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A의 병을 B의 병으로 둔갑해서 널리 소문을 내면 엉뚱한 일이 일어난다. 의학적인 병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좋은 방안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다른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5W1H 모두가 원래의 정확한 대상에게 돌려져야 진짜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Johnson이 책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투사(Projection)이나 책임의 전가는 변화 그 이상의 실패로 귀결된다.

심리학과 경영학 그리고 기타의 많은 책들을 읽어보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본다. 사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변화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변화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이유는 <완전히 솔직하지 못한> 때문이다. Jung이 Wholeness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처럼, 전체를 다루어야 변화할 수 있다. 일부만, 특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만을 대상으로 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George Leonard의 영감이 가득한 한 문장으로 이 리뷰를 맺을까 한다.

 

"시스템의 일부가 변하려면 시스템의 전체가 변화해야 한다." (123쪽)

 

99.9%의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가짜인 0.1%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농도 9%짜리 솔직함을 내세우면 망한다. 그런 까닭에 변화는 <위대한 결단>의 결과물일 뿐이다.

Magnus Lindkvist의 책에 대한 리뷰는 제2부에서...

 

 

 

참고용 구절

"부정적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는(Crying) 소리를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실과 대면해 움직이라는 뜻이다." (Leonard, 134쪽)

 

"윌 슈츠 박사에 따르면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협력 에너지를 높여주는 일은 없다.' (중략) 어떤 회사의 보고에 따르면 1시간 30분 하던 미팅(회의)을 이제는 20분에 끝낸다고 한다. 즉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뭔가를 말하지 않으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거짓말과 비밀은 조직에서는 독약이다. 유용하게 써야 할 에너지가 속이고, 숨기고, 누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쓰여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실수도 줄어들고 생산성은 늘어난다." (Leonard, 135쪽)

 

"궁극적으로 해방(Liberty)은 한계의 수용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Leonard, 138쪽)

 

"사실상 세계의 많은 침체와 불만족, 그리고 심지어 범죄와 전쟁을 초래하는 악한 행위들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 발산되지 않은 잠재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Leonard, 141쪽)

 

"접시 닦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이를 서둘러 되는 대로 해치울 수도 있다. 주된 목적은 가능하면 빨리 이것을 끝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명상이나 무용처럼 할 수도 있다. (중략) 성급한 행동을 삼가는 것이다. 일을 끝내고 다른 것을 할 때도 그 순간과 그 순간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무엇보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서두르지 않아도 보통 때보다 훨씬 빨리 일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면 일이 끝났을 때 기분이 좋아질 확률도 높아 진다.

우리 인생은 서두르지 않는 달인의 리듬을 훈련할 기회들로 가득하다. 이 기회들은 성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리듬은 우리 사회의 표준인 서두르고 목표지향적인 리듬보다도 짧은 시간에 더 많고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한다." (Leonard, 156-7쪽)

 

"그리고 결국 우리 삶의 모든 의미 있는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과 발전은 <정체상태>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Leonard, 158쪽)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인생에는 늘 갑작스러운 충격이 닥쳐온다. 그것도 거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다. 좋아하는 보석을 잃어버리는 일부터,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리는 일,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일, 친구와 헤어지는 일, 이 모두가 심리적, 육체적 타격을 남긴다. 더러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 불행들과 맞서 싸우지만 결과적으로 그 불행에 힘만 실어주고 만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고통과 충격을 <부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감정을 억눌러 타격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까지 봉쇄해 버린다. (중략) 우리를 낙담시킨 어떤 불행도 결국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 (Leonard, 169-171쪽)

 

"'힘'이라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이 능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든 힘은 이완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근육도 긴장을 하면 힘을 잃게 되듯이, 경직되고 긴장한 태도는 결국에 실패를 불러온다." (Leonard, 173-4쪽)

 

"'말해주시오. 어떻게 하면 배우는 이가 될 수 있는지.'

내 마음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다. 나는 그저 '아주 간단합니다. <기꺼이 바보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Leonard, 181쪽)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다시 연결하고, 원천과 하나되는 상태로 돌아가며, 분리된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는 문명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분열되고 소외된 세계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는 영적인 과제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문명을 이룩한 다음에는 문화가 표방하는 이상과 덕목 때문에 상실하게 된 전일성(Wholeness)을 되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분리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며, 진화가 거듭될수록 분리로 인한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Johnson, 23쪽)

 

"자신의 특질 중에서 어두운 면을 부정하고 거부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의 다른 곳에 그 어두움이 <저장되고 축적된다.> 이것이 나중에는 우울한 기분, 육체적 심리적 질병, 혹은 무의식적으로 고무된 사건이나 사고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빛은 숭배하고 어두움을 거부하여 축적된 면들이 현재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잔재가 바로 정쟁이나 경제적 혼란, 파업, 그리고 인종차별 등으로 <드러난다.> 어떤 신문이든 1면은 <집단의 그림자>를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장이 된다. (중략) 파열된 우리 세계를 치유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용기와 통찰을 지닌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류 내면에 투사(Projection)의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면 외부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현대 심리의 가장 위험한 면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우리가 아닌 '그들', 즉 이웃이나 다른 민족, 혹은 다른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 세기에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발발해서 현대세계가 이룩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누구나 개인적으로는 전쟁을 비난하지만 <집단>이 되면 전쟁을 일으키는 쪽에 찬성한다. 이런 파괴와 혼란을 초래한 주체는 괴물 같은 이상한 존재들이 아니라 <집단의 그림자>였고,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림자 형성에 <기여했다.>" (Johnson, 42-3쪽)

 

"융이 지적하기를,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길고 복잡한 전쟁을 벌이려면 세련되고 규범화된 사회가 필요하다. 전투를 고도로 발달시킨 것은 바로 <문명화된 우리들>이다. 위대한 문명을 이룩하면 할수록 그 자체의 파괴성도 증가한다." (Johnson, 45-6쪽)

 

감추어진 부분,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서

"영화의 고전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하는 동안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대연회 장면을 찍을 때 들인 지출을 놓고 벌어진 소동만큼 전설적인 이야기는 없다.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감독이 대연회 장면을 위해 주문한 실크 속치마 값 수천 달러가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David Selznick) 앞으로 청구됐을 땐 이미 예산이 한계를 넘은 상태였다. 카메라 앵글이 어디에 맞춰지는지 알고 있던 셀즈닉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플레밍에게 달려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실크 속치마라고! 관객은 그 속치마를 볼 수 없어. 그 장면은 모두 허리 위만 잡는 거잖아!'

플레밍이 말했다. '그래요, 모두 허리 위만 잡죠. 하지만 관객들은 춤 추는 사람들의 눈 속에서 실크를 보게 될 거에요.'" (339쪽)

David S. Pottruck, Terry Pearce 공저, <CLICKS AND MORTAR: PASSION-DRIVEN GROWTH IN AN INTERNET DRIVEN WORLD>(2000) 한글번역본 <클릭 앤 모르타르>(구본성 역, 2000,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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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09.09.23]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군사편> 서평단 모집 이벤트  | 기본 2009.09.25 22: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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