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풍기는 특별함은 작품에 담겨 있는 '주제의식'에 있다고 하겠다.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첨단 사회 속에서 황폐해지는 인간성과 더불어 병들어 가는 환경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철학적인 의식들이 함축적인 대사와 함께 영화 곳곳에 배어 있다. 먼저 '앨리스'가 고교시절 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하늘은 진짜가 아냐, 진짜 하늘은 이보다 더 파래", "인간은 왜 여기에 태어난 걸까 ?"라며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감독은 영화 말미에 앨리스가 시종일관 자신을 도왔던 남자와 웨이트리스 로봇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는 장면과 그녀의 대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야"라고.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하기보다는 혼자서도 컴퓨터를 가지고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임을 감독은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무너지는 기지 안에서 네로가 엄마인 앨리스에게 "행복해요 엄마랑 얘기할 수 있어서"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낳고 일찍 숨을 거둔 엄마와 이야기하고 싶어 그 시신을 컴퓨터 중앙에 위치시켜 놓고 그녀의 뇌파로 컴퓨터를 움직이게 했는데, 컴퓨터에 관한 한 도사였고, 컴퓨터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와는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그리움만 품고 있던 아들로서의 '네로'를 부각시킴으로써 인간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부분 외에 군데군데 적절히 배치한 시사적인 장면도 눈에 띤다. 앨리스가 자신을 보필한 웨이트리스 로봇에게 기기명인 'SS1X' 대신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는 장면과 로봇 '마리아'가 일행인 남자에게 "귀여워 죽겠네"라면서 사랑을 느끼는 부분, 그리고 '마리아'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장면 등은 코믹스럽게 묘사되어서 다소 가벼운 인상을 주긴 하지만 내면에 깔린 '인간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리 가볍게 웃어넘길 대목은 아닌 것 같다. 이 부분은 '터미네이터'와 약간 닮아 있다.
현대 영화의 최대 난관이라 할 수 있는 '소재 빈곤'이라는 문제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난 것일까 ? 몇 개의 고전들을 짜 맞춘 흔적은 역력하다. 주인공 캐릭터는 아예「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름을 따왔고, 배경 설정도 이상한 세계로 빠져든 주인공의 역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미래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시간여행의 소재는「터미네이터」의 기본 틀을,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이보그의 이야기는「공각기동대」나「블레이드 러너」와 어느 정도 흡사하다. 심지어 '네로'의 기지로 진입하는 좁은 통로는「스타워즈」에서 보여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따지자면야 모든 영화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 작품에서 굳이 아쉬움을 찾자면 이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짜깁기 속에서도 그 소재들을 다시금 새로운 내용으로 재 탄생시켰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동양의 가부장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무시되었던 여성의 역할이 21세기를 맞이한 현대사회에서 어느 정도 높아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작「공각기동대」의 주인공도 반 사이보그인 여자인데, 고도로 발전한 테크놀로지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 조종당하는 현실을 괴로워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앨리스」에서도 사회의 그릇된 발전을 모성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줌으로써 미래 사회에서의 여성의 막중한 역할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오한 메시지들을 '최첨단 3D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매체로 보여준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컬하다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해보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듯 그러한 발전을 인위적인 방법(여기서는 인구 억제)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희망을 갖고 2000년 현재로 돌아온 앨리스와 함께 이 세상을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