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김규환의 『흔적들』은 크게 5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한상훈(문학평론가)
세상을 바라보는 온화한 시선과 따듯한 포용력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서정시는 그 기억의 단상을 건져서 재구성하는 언어 예술이다. 우리는 김규환 시인의 첫 시집 『흔적들』에서 언어를 다루는 능숙한 감각과 직관적 사유, 시적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등을 주목하게 된다. 특히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떤 비극적 상황 앞에서도 결코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 작은 목소리의 어조와 가벼운 화법으로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2023년에 ‘월간시인’ 3회 신인상으로 당선된 김규환 시인은 아직 등단한 지 1년도 안 됐다. 그런데 벌써 80편의 시를 썼고 때때로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노년 세대에 등단하여 평생에 시집 한 권도 내지 못하고 책상머리에서 끙끙거리다가 도중 하차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은 시대에, 김규환 시인의 이처럼 왕성한 시작 활동은 가히 놀랄만하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서정과 참신한 소재를 통해 개성적으로 그려나간 그의 시편들은 한국 현대시의 맥을 이어나갈만한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첫 시집 『흔적들』은 시인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인생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기록이며 자전적 고백이다.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김규환 시인은 그 흔적들에 대한 그리움을 순도 높게 세공하여 미학적으로 완성하였다.


지나온 기억들을 소환했다.
남은 흔적들을 찾아 헤맸다.
흔적들이 그 자리에 없어도 피고 지던 세월까지 잊힐 리 있겠는가.
쏟아놓은 향기가 묻히고 사라져도 가슴속까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세월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
그 청춘 발자국 다 새겨져 있는데….

비포장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객지에서 학교를 다니느라 늘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직장 생활을 마치고 퇴직 후 그간의 흔적들을 찾아 빙빙 돌아보았따.
내가 본 것은 분명 그 자리인데 어느 틈에 흔적들은 연기같이 사라져버리고 없다.
남은 흔적들을 가슴속에 주워 담았다.

그 흔적들을 글로 남겼다.
첫 번째 시집이다.

어느새 손자들을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항상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와 가족에 감사하다.

2024년 봄에
김규환

005 시인의 말

제1부-흔적들

012 흔적들
013 확독
014 겨울 꿈
015 어머니의 시간
016 나도 나이를 먹었다
017 섣달그믐날
018 자식 자랑
019 천 길 우물 속
020 낯선 고향
021 그리움
022 그날 사월은
023 사초
024 겨울 풍경
025 누님
026 흙의 향기
027 사랑의 곡예사
028 당신의 마음

제2부-그때 이야기

030 북어 이야기
031 시산제
032 벌거벗은 닭
033 빨강뚜껑
034 못생긴 돌장승
035 사람의 향기
036 흑백 테레비
037 육성회비
038 도시락 벌레
039 채변봉투
040 인생역정
041 여름 마당
042 도시락 상처
043 아버지 막걸리
044 작은이 딸
045 얼음과자

제3부-그립고 보고 싶은 곳

048 백련사 가는 길
050 까막섬
051 그립고 보고 싶은 곳
052 탐진만
054 신작로 추억
055 사초리 전어
056 오늘의 의미
057 가우도
058 청산도
059 학의천
060 흑석동 블루스
062 정동진에는

제4부-잊혀진 시간

064 잊혀진 시간
065 굽혀야 산다
066 은갈치
067 덧없는 인생
068 6가 뒷길
069 지게 아저씨
070 뜨거운 오후
071 노숙하는 비둘기
072 이천이십년
073 고독한 저자
074 달동네
075 녹슨 마음
076 청춘아 힘들지
077 꼬막 유감
078 상추쌈
079 천 원의 행복
080 한 잔

제5부-아내에게 쓰는 편지

082 어느 날 문득
083 어느 날 문득 2
084 아내
085 아내 2
086 세월
087 고드름
088 코스모스 아내
089 사탕발림
090 깨달음
091 뒤늦은 후회
092 우울한 당신
093 겨울 동백
094 가을의 속도
095 단비
096 아껴보는 가을
097 낙숫물
098 동백 아가씨
099 아내에게 쓰는 편지

평설
101 세상을 바라보는 온화한 시선과 따뜻한 포용력/한상훈

흔적들

어머니는 푸세식 측간을 그냥 두자고 한다
온 식구가 쏟아놓은 흔적들을 지우기가 서러워서
아버지 향기가 묻혀있고
객지로 떠난 자식들이 쏟아 놓은
흔적들이 영영 날아가 버릴까

흔적들이 땅속 깊이 묻혀 버린 날
숨어버린 향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가슴을 친다
남은 자국을 모아 속 깊이 주워 담는다
- 12쪽 ‘흔적들’ 일부


작은이 딸

동네 작은이 딸은
우리 집 대문 앞 골목길 지나
자기 키만 한 소주 대병 들고
작은이 술 받으러 간다

술에 취한 작은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작은이 딸은
또 소주 대병 들고
우리 집 앞 지나간다

자꾸만 쌓여가는
외상장부에 어느 날
작은이 이름이 지워졌다
작은이 딸도 보이지 않았다

- 44쪽 ‘작은이 딸’ 전문


굽혀야 산다

아버지 등허리는 반쯤 굽었다

밭 까뒤집는 쇠스랑 자루도 구부러져 있고
산 아래 논두렁도 굽이굽이 굽었고
산등성이도 아버지 허리처럼 굽었다

방에 들어갈 때는 허리를 굽혀야 들어가고
지붕을 떠받는 대들보도 굽은 채 받친다
대문 앞 굽은 소나무는 오래된 집을 지킨다

땅에 있는 것들은 구불구불 굽어야 살고
그 안에 사는 것들은 굽혀야 온전하다

- 65쪽 ‘굽혀야 산다’ 전문


아내

아침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
아내에게 온 핸드폰 벨 소리가
온몸을 떨리게 한다
사이드미러 접혀있는 걸
운전 중간에 알았다고
어떻게 하느냐고 금방 숨이 넘어간다

퇴근 후 식탁에 냄새가 풍성하다
이렇게 멍청한 일로 전화해도
화내지 않고 알려주어 고맙다고 했다
사실은 지하철 안에 사람이 많아
큰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 84쪽 ‘아내’ 전문

낙숫물

낙숫물이 떨어져 동그라미를 그리고
동그라미 안에 빗물이 고인다

빗물 안에 하늘이 한가득
그 안에 보고 싶은 얼굴 가득 떠있다

- 97쪽 ‘낙숫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