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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다. 늘 그렇듯이 그 시집 숲을 동행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인생의 난간을 더듬어 보는 행위에 어리광까지 부려본다. 참으로 기쁘다. 시집《푸른 문신》을 감상하다가 이런 생각 하나 했다. 시인에게 있어서의 시집은 “영원한 안식공간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품어안고 정화시키는 우주”란 것을.

다시 말하면 왜 시인이 되려고 하는 그 이유가 바로 시집 안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신경을 집중하고 읽어보노라면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된다. 시란 영혼의 울림이고 동시에 자신의 삶을 짜 얽어내지 않으면 결코 자신을 정화 시키지 못함은 물론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아무런 이유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와 당위성을 위해서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이고 그 시를 쓰기 위해서 밤을 세워가며 고뇌하면서 갈등하는 등 고군분투하는 것이란 것쯤을 알아준다면 시집 읽기의 진지함을 가볍게 공유할 수 있을 텐데라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그러면서도 그 책임을 시인에게 돌리는 것은 요즘의 많은 시인들이 그런 책임, 소명의식을 잃고 시를 쓰기 때문이며 동시에 출판사와 문학관계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그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킴은 물론 시인들을 올바른 독행자의 길로 가는 독려 그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 현 시인의 이 번 시집을 읽다가 감동을 받았다. 시인의 삶이 송두리째 이 한 권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관계, 고뇌스러운 삶에 지친 시인과 동반하여 안식을 제공하는 온갖 꽃들을 품어 안은 자연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시전문지 ‘월간시’를 통해 등단한 양 현 시인의 첫시집은 잔잔한 감동과 함께 애잔한 역사를 추억하게 한다. 그 삶의 ‘푸른 문신’이 지금은 별빛이 되고 달빛이 되고 밝은 햇살이 되어 인생의 숲에 그늘을 드리우고 찬란하게 회화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귀한 시들을 창작해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 독자들을 위로하는 기회를 준 양 현 시인께 두 손 모아 감사를 드린다.(이충재)

양현 시인은 늘 조용하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인이다. 요란 떨지 않고 세상과 사물과의 적당한 거리에서 관조적 자세로 세상을 응시하고 묻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용한 듯하면서도 그의 내면으로 흐르는 정서는 옹골차다. 돌탑을 쌓듯 옹골차고 조화롭게 시를 직조해 낸다. 서정적 자아의 정서를 기조로 하면서도 감정 노출이 배제된 모던한 현대적 기법과 감각으로 창출하는 주지적 요소를 띠고 있는 것도 그의 시 기법의 한 특징이다.

양현 시인의 내면적 정서는 ‘아픈 불꽃’이다. 모든 예술의 정서는 아프고 슬프고 버림받은 세상의 ‘불꽃’에서 시작된다. 이 때 불꽃은 치열한 창작열과 치열한 창작에 대한 혼(魂)을 의미한다. 이런 불꽃이 없었다면 그의 시는 탄생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양현 시인의 ’불꽃‘은 곧 시인의 시적 대상인 사물과 사상(事象)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착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의미다. 애착은 곧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혈육지정을 비롯하여 인간애愛의 보편적 진리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소재의 대상은 서민들 삶의 애환을 그려낸 작품이 많다.

양현 시인의 시선과 시심(詩心)의 숨소리가 머무는 시적 대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양하고 넓게 전개되고 있다. 어린 시절 가슴에 맺힌 추억(「수학여행」)에서부터 이 세상 밑바닥에서 뿌리를 세우고 있는 서민들의 애환과, 그리고 혈육의 정에서 묻어나는 ‘슬픔’까지도 그의 시심의 발로로 시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의 자세’ ‘시인의 사명감’ 같은 도와 예의 덕목을 자성하듯 간구하듯 기도의 자세를 내면화 한 작품은 많은 사유를 유발케 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의 통로를 건너가는 일”이라는 명제처럼 앞으로 양현 시인이 건너가야 할 이 세상은 “아직 짓지 못한 나만의 성을 위하여/촘촘한 어둠 속에서 환한 길을 내며 간다”는 (「저녁의 명제」)와 같이 인생과 시작(詩作)에 새 지평이 열리기를 기원하고 기대한다.(시인 이영춘)

제1부
여름밤의 비몽悲夢
기억의 종말
폐타이어
하현달
등기우편
복숭아꽃
복주머니란
돌탑
구름도 쟁여 놓지 않은 하늘 아래
우산의 무덤
숫돌
요양병원 407호
엄마 생각
수학여행
시간의 문
북어 표류기
저녁의 명제
소양교 전적지戰迹地
오후가 책장처럼 넘어간다
첫눈
간헐천

제2부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바람에 넘어 간다
능소화 붓다
백목련
풍경소리
염화미소
적막을 건너가는 시간
너무 걱정하지 마
철쭉의 궤도
기도문 한 장
유정의 숲
월계수 잎 속으로 동그란 근심이 쌓이고
아픈 방
꽃의 소멸
우체부 아저씨
시간은 드문드문 깨지고
갈대의 발
효자동 벽화 골목
호두과자를 굽는 손
불면증
아침이 분무기처럼 햇살을 뿌리고
공지천

제3부
벗나무집 한 채
밤길
유년의 뜰
이엉 올리는 날
오후의 건널목
슬픈 목록
손톱꽃
오래된 슬픔
푸른 문신
청어 한 마리
엄마의 기억
여름 밤
감자꽃
호수
시간의 변방에 서다
12월의 건널목
시간
담쟁이
고독의 세포
곶감
여름이야기
아침 소묘
봉의산

제4부
하루의 젖은 허리가 언덕 같이 길다
곡선의 행진
튀밥처럼 지구가 돌다
강물이 저렇게 반짝이는 것은
낙타의 시간
수족관 속 금붕어들
생각을 종이학처럼 날리고
종달새 아리아
팽목항의 비명
그늘의 속성
별이 빛나는 밤*
햇살 밥
그대가 오는 소리
때론 슬픔도 소중한 위안이다
달빛에 젖은 시간을 풀고
나방의 꿈
김밥 친구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봄비
민들레 머리핀
푸른 섬
모바일 세상
길

평설 ; 정서적 체험의 환유와 시적 탄생의 의미(이영춘)

엄마 생각

책장 위에 앉아 있는 장바구니
엄마의 시장바구니 속에서
가끔씩 고등어 한 손 내려 온다
때로는 엄마의 동백기름이 굴러오고
입안 가득 퍼지던 블랙베리향이 나던 풍선껌
풍선껌 몇 통이 내려 온다
말없이 바라보면
엄마처럼 말을 건다
춥지 않았니 ?
배고프지 ?
엄마의 여름이 가득 담겨서
기우뚱거리던 날들
돌다리를 휘청거리며 건너오시던, 엄마의 여름날
엄마의 여름이 빈 들판이다

수학여행

오전 수업을 마치고
코스모스 손 흔드는 들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은 마당 가득히
콩을 털고 계신다
목젖까지 차오른 그 말,
그 말 차마 꺼내지 못한 채
도리깨질에 힘을 싣던 어린 시절
파란 하늘에 흰 구름도
저희끼리 어울려서 몰려가고
혼자 마루 끝에 걸터앉아
흰 구름 멀리 따라가다가
대추처럼 마른 부모님 얼굴
그 얼굴 바라보면서
잘 여문 콩을 쓸어 담는다


북어 표류기

북어채를 손질하다가
살갗에 붙은 뼈를 발려내다가
북어의 지난 생애를 따라간다
북태평양 어느 연안에서
펄떡이던 그의 여름이 물빛으로 반짝인다
부레마다 차오른 숨을 고르며
바닷물이 양수인 듯 지느러미를 키운 시간
튀어 오르고 뒹굴고
뒹굴다가 달려간 그물의 집
누구는 허공에 매달려 바람이 되고
누구는 황태로 말라 저녁이 되는 시간
북어채를 다듬다가
북어의 긴 생애를 따라간다
서걱이던 소금길 모두 내려놓고서
뽀얗게 우러나는 국으로
너는 마지막을 누군가에게
뜨거운 한 그릇의 국이 되었다
북어국 한 그릇에 담긴 그의 푸른 생
국그릇 안에서 파도 소리로 출렁인다

저녁의 명제

어슴푸레한 저녁이 곳곳마다 달집을 짓는다
별이 뿜어내는 숨소리들이 자욱한 안개로 일고

일터의 난간을 휘어잡고 오른팔로 견디는 사람들
저녁의 두꺼워진 등을 밀고 밀림 속을 걸어간다
물젖은 신발 끈을 단단히 묶어두고도
시린 것들은 언제나 또 다른 해양의 닻을 떠올린다
짙을수록 환해지는 아이러니의 터널 같은

산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의 통로를 건너가는 일
덤블링처럼 덤벼드는 넝쿨식물의 본성 같은 세상이라는 파도
아직 짓지 못한 나만의 성을 위하여
촘촘한 어둠 속에서 길을 내며 간다

저녁은 빛바랜 시간을 어제처럼 걸어나오고
희미한 초승달 너머의 둥근 세상을 꿈꾸며
아직도 희망적이라는 명제를 걸어본다

오후가 책장처럼 넘어 간다

안개인지 근심인지
앞산을 가리고 서서 일어설 줄 모른다
물기가 빠져나간 동공을 들고
안과엘 갔다
치명적이진 않다고
그렇다면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는걸까
말의 혀들이 공굴리기를 하듯
굴곡의 협곡을 빠져나가는 사이
침울한 동공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손에 쥔 눈물이 똑똑, 뚝뚝
갈라진 동공에 물을 댄다
별일 아니라는 듯
실실 웃으며 차트를 넘기는 두꺼운 손
나이가 있으시니까요
오후가 책장처럼 넘어간다
물기가 빠져나간 논바닥 위로
봄물 차 오르던 모습
잠간 눈을 비비다
마른 눈을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촉촉한 눈들이 경광등처럼 반짝이고 있다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바람에 넘어 간다

지금은 꽃게 철
시장 바닥에 꽃게가 탑처럼 쌓여
한 바구니 만 원, 만 원
밤송이 같은 하루가
시장 바닥에 엎드려 있다
내 손님일까 아닐까
흥정을 놓고 벌이는 고수들
날선 눈동자에 불꽃이 튄다
손님의 꼬투리 어깃장에도
흔들림 없는 고수들
밀고 당기는 한 판승(勝)이다
곶감 같은 얼굴에 웃음기 돌아오고
하루가 또 산을 넘어 간다
굴비 속처럼 엮인 하루의 노을 속으로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바람에 넘어간다

능소화 붓다

한낮 도로 한켠에
고깔모자 쓴 능소화

꽃이 된 붓다

참선의 몰입에 든
침묵의 입술이 붉다

꽃기둥으로 세운 궁전
깍지 낀 손들의 붉은 합장

세상 한 켠에서 선문을 열고
제 몸으로 향을 사르는

그 향 속에서
설법이 핀다
석탑 같은 담장에서


풍경소리

어둠을 견디는 날선 지붕 끝에
천명처럼 받아든 울음소리 감긴다
바람이 밀어주는 허공의 그네줄에
가뿐한 몸 한 채 싣고서
천공天空을 날아오른다
설법이 뜸을 들이는 시간
제 울음소리로 절간을 깨우고
동자승의 번뇌를 소리로 쓰다듬는다
오르내리는 염불 소리 따라 외우다
바람 팔에 안겨서 선잠을 자는 동안
하늘빛이 갈라지고
새벽 쪽빛 움이 터 오면
온몸을 정좌하고
울음소리로 세상의 빛이 되는 길
바람 실패에 감긴
풍경소리,
풍경소리가 운다

염화미소

한겨울 햇살을 이불처럼 끌어다 덮고
베란다에서 핀 만다라
입술 볼록하게 세우고 서서
꽃잎 한 장씩 오른쪽으로 여민다
절간 법당 안에 피어 있는
연꽃 같은 얼굴로
초록이파리 손바닥 위에 앉아
법구경을 읽는다
나 이대로도 괜찮다는 듯이
꽃잎 속에 갇힌 무념의 시간들
한낮의 소음들을 잠재운다
지나가는 햇살 나그네처럼 기웃거리다가
연꽃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법구경을 읽는 오후
철이 없는 철쭉 한 송이가
시간의 불룩한 심장을 두드리면서
우주의 궤도를 천천히 돌리고 있다

적막을 건너가는 시간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구름 속으로 날아간다
팽팽한 하루가 어깨를 세우고 하늘로 솟는다
낡은 기와집 지붕 위에서
햇살이 담쟁이들을 빗질 한다
어린이집 원생들이 놀이터에서
적막을 넝쿨 채 흔들고 있다
옥상 위에서 흔들리는 빨래
빨래의 무중력 속으로
부레 속에 갇힌 시간이
물잠을 자고 있다
구름의 행간마다 뒤엉킨 입자들
하늘이 하나씩 풀어내는 동안
햇살이 나뭇잎을 밟고 간다
바람의 손길이 허공의 잠을 깨운다
부레 속에 잠든 시간
그 시간 위로 적막이 쌓인다
박새들 적막 속을 흔들며 날아간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치고 힘이 들 때
안 그런 척
목 빼고 앉아도
마음이 아파 와
혼자 눈물 흘릴 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너의 손
잡아 줄 테니
매일 만나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그의 위로는 받는 날
사그락사그락 몸 비비며
잎들이 내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을
가만히 귀담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