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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개정판을 내면서

작은 나의 밭에 거름을 주고, 땀 흘려 언어의 씨를 뿌렸습니다.

씨앗들은 거친 바람 속에서도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이슬로 뿌리를 적시고, 잎들을 내어 햇빛을 빨아들이다, 오늘에서야 알곡을 맺는 긴 꿈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천근의 무게로 말이죠.

첫 시집을 낸 지 3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개정판을 냅니다.

이번 시집에는 두 가지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약자와 평범한 사람의 따뜻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과 변화하는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움츠리지 않고 행동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제 의도가 얼마나 시집 속에 담겨있을지는 독자의 몫이겠지요.

시집의 제목을 『양미리』로 정합니다.
‘잠시 곁을 주는 누군가 있다면 내 몸 던져 그의 요깃거리가, 마음 따뜻한 시인이 있다면 그의 빛나는 언어가 되어도 좋겠다.’는 ‘양미리’의 헌신을 좇아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앞으로 ‘양미리’는 제 시의 방향이 될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제가 경험하여 얻은 보석 같은 언어를 갈고 닦아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시를 꾸준히 쓸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 자유와 민주, 삶의 성찰, 사랑에 대한 칠십 편의 시가 시집에 담겼습니다. 아흔 넘으신 부모님, 나의 시를 기다려 읽어 주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시인의 자세를 일러주신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2023년 가을에
고용석

평설
일상의 현실 속에서 사실과 상상이 빚어내는 정감의 언어 공간

「양미리」에서 시인은 “온갖 악다구니 판치는 세상에서/ 마음 따뜻한 시인이 있다면/ 통째로 내 몸 던져/ 그의 빛나는 언어가 되어도 좋겠다”고 “가난한 어부의 그물에” 잡힌 양미리의 독백을 통해 시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시의 기법이 예사롭지 않다.

「칼날 위에 서다」는 2021년 ‘자유민주시인상’ 대상 수상작으로, 시인은 “작두 날 위에 늙은 시인이 섰습니다/ 바람이 두 발 사이로 흐르고,/ 하늘과 땅을 잇는 시대의 조종(弔鐘)을/ 칼날 위에 서서 시인이 울”린다고 칼날 위에 선 자신의 행위를 이 시대의 조종을 알리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 시대의 상황을 매우 불안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끝부분에서 “대한민국이 칼날 위에 있습니다/ 아찔한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직설적으로 외치고 있다. 남북분단의 시대에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시인의 마음이 뜨겁게 느껴진다.

-심상운 평설에서

004 자서

Ⅰ

012 양미리
013 섬에서 그대를 보내다
014 꽃눈 뜨면
015 낡은 구두
016 늙은 사자
017 저녁밥을 먹으며
018 소리를 듣다
020 나는 오늘도 흔들린다
021 강릉 바닷가에서
022 생각을 비우다
023 안녕하신가
024 자작나무 숲에서
026 늑대가 되고 싶다
027 모두 곁을 떠나고
028 다음 우리 만남은
029 강릉, 겨울 바다
030 못
031 넥타이
032 노숙자 김 씨와 비둘기
034 정선아라리
036 꽃에 대한 단상
038 모놀로그

Ⅱ
040 칼날 위에 서다
042 자유는 봄날 잎처럼
043 못 박힌 몸
044 시인이 시인에게
046 인간 사냥
048 가시박
049 부끄러움
050 4월의 봄꽃은 다시 핀다
051 큰 산 우화
052 지렁이 울음을 듣다
054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056 전흔
058 눈물꽃
060 만달레이의 눈물
062 정복할 수도, 정복되지도 않는
064 눈물의 아가

Ⅲ
066 수의
067 명자꽃 사랑
068 느티나무
069 엄마의 지팡이
070 명자꽃
071 애기동백 꽃차
072 유년의 마당
073 엄마의 봄날
074 지귀
075 미련
076 산사에서
077 골목길
078 어머니의 걸레
080 성장
081 불면
082 서른 나기
083 논개는 소리도 없이
084 초당 꽃잎에 스러지다

Ⅳ
088 한탕강
089 황간역
090 불목하니의 봄
091 봄꽃이 말합니다
092 꽃진 자리
093 풀꽃 피다
094 오동꽃
095 오동꽃 편지
096 함박눈
097 새벽
098 꽃귀경
100 가을 편지
102 겨울눈을 보며
104 북한산 자락길에서

평설
105 일상의 현실 속에서 사실과 상상이 빚어내는 정감의 언어 공간 / 심상운

양미리


나는 겨울에만 오는 나그네다.
모래 속에 묻혀 잠을 자다
새벽녘 먹이를 찾아 바다를 떠도는
그러다 가난한 어부의 그물에
스스로 내 삶을 저당 잡힌
이름조차 낯선 존재다
보잘것없고, 기억 받지 못하기에
내 몸뚱어린 온통 눈물이다
아픔 많고, 사연 많은 세상살이
눈물은 눈물로만 치유(治癒)되느니
잠시 곁을 주는 누군가 있다면
연탄 화덕에 몸뚱어리 가로누워
내 눈물의 몸이
그대 막걸리 안주로 사라져도 괜찮겠다.
갈수록 영악해지는
온갖 악다구니 판치는 세상에서
마음 따뜻한 시인이 있다면
통째로 내 몸 던져
그의 빛나는 언어가 되어도 좋겠다

차가운 이 겨울
바다는 그저 거칠고
그대 양식으로 다가온
양미리는 마냥 거룩하고

- 12쪽 ‘양미리’ 전문

저녁밥을 먹으며

재짝 찾아 자식들 훌훌 떠난
휑한 밥상에
아내와 앉아
김치찌개에 숟가락 부딪혀가며
밥을 먹었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이 자꾸 목메어
무심하게 돼지고기 한 점 집어다
아내 밥에 올려놓고
나는 헛기침하며 딴전을 부렸다
푹푹 익은 김치찌개 같은
당신 속마음 다 안다고
끓고 끓어 구수한 건더기로 남은
당신 이야기 다 듣고 있다고
부부는 그렇게 익어가는 거라고
아내와 함빡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창밖으로 후두둑
꽃잎이 내렸다


- 17쪽 ‘저녁밥을 먹으며’ 일부

나는 오늘도 흔들린다

신부전으로 투석하는
아흔의 장모를 뵙고
병실을 나오며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몇 번이고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밤낮없이 불러대는 노랫소리에
숨 막히게 보채는 짜증에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기억조차 온전치 못한
안쓰러운 존재 앞에서
나는 우화를 생각했다

병실을 나와
시골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나도 그렇지만 살아 있는 몸 어쩌냐
늙으면 다 산 사람 괴롭히는 쇠귀신인데
섣불리 목숨 재촉한 잘못 들킨 것 같아
나는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꺼져 가는 목숨을 움켜쥐고
제 엄마보다 더 야위어가는 아내의 몸이
아프게 눈을 찔러 왔다

- 20쪽 ‘나는 오늘도 흔들린다’ 전문

넥타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가르쳐주었나. 아침마다 내 목을 단단히 조여야 살아가는 방법을. 어른이기 위해, 가장이기 위해, 시민이기 위해 너는 날마다 나를 단단히 묶는다. 스스로 목을 매어야만 하는 기막힌 복종. 살기 위해 묶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 너에 묶여 출근하고, 너에 묶여 끼니를 잇고, 너에 묶여 갈지자로 늦은 귀가를 하고. 아내와 자식의 잠든 얼굴을 본 뒤에야 구겨진 자존심을 풀어 내리는 고단한 하루. 잠을 청하자. 밤마다 힘겹게 풀려 신음하는 건 나인 건지, 너인 건지. 아침이면 나는 거울 앞에서 다시 목을 바짝 조이겠지. 풀어야 함을 알면서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안고, 삶의 영원한 물음표를 안고.

- 031쪽 ‘넥타이’ 전문

수의
너무 애끓지 마라
너흰 어미의 마지막 옷이라고
안쓰러워하지만
저편 하늘에선 첫 옷이니
어미는 설레고 기쁘다
아버지나 너희가
날 항상 가볍게 해 주었으니
새털구름처럼 가벼운 옷을
기쁨으로 만들란다
수의 짓고 나서
마당 꽃들도 옮겨 심고
장독대도 반짝반짝 닦아 두면
매듭진 남은 날들 눈이 부실 것이다
그런 날 수의를 입었으면 좋겠다
관에는 국화꽃을 넣어주고
세상 얘기 바람결에 실컷 듣도록
한 줌 내 몸은 길가에 뿌려다오
며칠 뒤 수의를 거풍하면
잠시 쉬고 싶다
머잖아 긴 잠 올 것이다
- 66쪽 ‘수의’ 전문

황간역

달리는 게 힘에 부칠 때
무거운 몸 내려놓고 싶을 때
쫓기듯 내달렸던 열차 같은
시간 접어 두고
그대, 잠시 황간역에 내리게
항아리 시 곁에 앉아
바람에 날린 꽃잎들 앉혀 놓고
구름 불러 놀다가
드문드문 역을 찾는 사람들
세상 얘기에 빠져 보게
듣다가 내 얘기 같으면
퇴역한 역장 불러
올갱이국에 막걸리 한 사발
시 안주하여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거요
시끄러운 세상 싫거든
떠난 사랑 견디기 어렵거든
어서 오게
고향이 그림처럼 남아 있는
황간역으로

- 89쪽 ‘황간역’ 전문

풀꽃 피다

놀랍네,
정말 놀라워
댓돌 고무신에 꽃이 피다니
구름이 가고, 비 내리고
햇빛 나고, 바람 불면서
풀숲으로 꽃씨 숨은 줄 알았는데
다 헐은 내 고무신에
꿈을 갖고 들어와 앉아
너, 눈부시게 작은 꽃 피웠구나
텅 빈 집 굳게 지켰구나
들고양이 고라니도 만나고
마당 앞 뭉게구름과 수다도 떨면서
잠들어 있던 기억 펼쳐
너, 꽃의 언어로 내게 다가왔구나
꽃 피우는 일은
시 쓰는 일
아하, 그게
같은 말이었구나

- 93쪽 ‘풀꽃 피다’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