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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 변증법적 보법
강인한 시어들로 결집된 구와 음보들이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된 정형의 정신

김진길 시인은 이러한 통합적인 사유를 통해 ‘지금-여기’의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가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탐색하며, 성찰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 변증법적 보법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이 서로 맞물려 형성된 관계와 세계, 행위와 사유를 통해 순수와 근원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역행의 시학과 성찰과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순행의 시학으로 엮어내는 서정의 방식은, 시인의 인식체계에 포착한 사물과 대상을 통해 개성적인 너비와 깊이의 시조미학을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남성적인 힘과 강건함으로 빚어낸 시적 사유의 하드보일드한 맛 또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내적 특질이라 할 수 있겠다.
─ 임채성 시인

김진길의 작품세계는 강인한 시어들로 결집된 구와 음보들이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된 정형의 정신을 건강하고 야심 차게 내뿜는다. 단호하고 결기 가득한 무인의 기개와 함께, 섬약한 개인에게 야기되는 존재의 불안과 고뇌가 행간마다 성성한 자각과 성찰을 유도하며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시적 개성이야말로, 시조단에서는 드물게 고유한 특질과 강점으로 그 입지를 세우고 있다 할 것이다. 「新 어부사시사」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현대시조에 접목시키고 재해석한 심상치 않은 작의를 내비치는 특별한 가작이다. 고시조의 후렴구를 현대시조에 원용한 운율의 표현 효과가 시조의 격을 높이며 구태의 틀에서도 벗어난다. 천년 시조의 혈통에 오늘의 피를 수혈하려는 법고창신의 의지를 결연하게 구현한 노래일 것이다. 현대시조의 고민의 한 축을 불식시키며, 고금이 만나고 드나드는 작법의 범례를 제시한 이 작품이 창작현장을 향해 시사하는 바는 아주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오랜 과제와도 같은 자각으로부터 작의가 움텄을 「新 어부사시사」의 녹록지 않은 개성과 창법이, 시조 쓰기의 변용에 대한 깊은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게 된다.
─ 박명숙 시인

시인의 말 05

제1부 선인장의 기도

세상에 13
마태복음 5:39 14
자화상 15
서귀포에 가면 16
선인장의 기도 17
신의 등대 18
필장筆匠 20
바닥에 대하여 21
넝쿨장미 22
박제 시인 23
설국雪國 24
질경이 25
한계령 단풍 26
쌍봉낙타 27
먹감나무 28

제2부 거미의 협상술

그 섬에 관한 기억 31
新 어부사시사 32
연희네슈퍼 34
거미의 협상술 35
수저계급론 2 36
굴뚝새의 겨울 37
무지개를 좇는 풍경 38
산 65번지 40
섣달그믐 41
역학조사 42
블루길 43

제3부 봉홧불을 놓다

너는 섬이 아니다 47
정유일기 48
우둥불 49
담쟁이 군사 50
봉홧불을 놓다 51
기마행렬도 52
국보 제112호를 드로잉하다 53
금정산성 54
수어장대 55
알뜨르 비행장 56
명절 57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58
아무튼 약진하라 60
퇴역, 그 후 61
안중근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62

제4부 죽림마을&장생포

죽림마을 1 65
죽림마을 2 66
죽림마을 3 67
죽림마을 4 68
죽림마을 5 69
죽림마을 6 70
죽림마을 7 71
죽림마을 8 72
울산 고래축제 73
장생포 아트스테이 74
고래 꼬리 의자 75
공단지대 76
장생포 78
장생포 우체국 79

제5부 광야

작달비 보법 83
역逆에 관하여 84
황혼 열차 85
광야 86
세방낙조 87
환절기 88
경칩 무렵 89
폭염주의보 90
세한도를 부치며 91
어떤 세습 92
거미의 거울 93
장모님의 벽시계 94
외암마을 섶다리 96
섬진강, 황어 98
헌화 99
비상계단 100
십자가 101
간절곶 등대 102

해설_ 역행과 순행의 변증법 /임채성 104

선인장의 기도

계절이 바뀌는 동안 웃자란 몸의 가시
모공을 뚫고 나온 첫 동통은 간데없고
맨질한 얼굴의 창끝만 세상으로 향한다.

사막을 건널수록 첨단이 번뜩이는
예리한 침의를 갑주처럼 입고서
허방을 짚을 때마다 군상들이 휘청댄다.

저들이 스러질수록 덧나는 건 나의 자상
정욕과 교만으로 가시가 돋는 날엔
어두운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는다.

묵상의 채찍에다 종아리를 맡겨두면
돋았던 가시 대신 겸손의 순이 나고
지극히 낮은 무릎에서 낮은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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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장筆匠

살아서는 어찌 못할 야성을 다듬는다
포수가 쏜 탄환이 폐부에서 끓는 사이
한 움큼 아귀에 잡힌 잔 온기를 잘라낸다.

허기는 며칠째 등가죽에 붙었지만
저 붉은 육질 따윈 눈밖에 둔 지 오래
빼쭉 선 터럭만 안고 돌아서는 늦저녁.

두 발을 모아 뛰던 자귀가 저리 저물면
어둠보다 더 캄캄한 먹물 같은 죽음들을
올올이 엮고 엮어서 풀을 먹이는 필장.

빳빳한 저 뚝심도 맥없이 풀리는 날엔
칡넝쿨 마른 생에서 갈필葛筆을 발라내어
뿌리 끝 쓰고 단 맛을 묵향인 듯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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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협상술

볕이 든 유리창에 실금이 무수하다. 창틀 서로 깍지 끼고 태풍 몇을 건넜는데 그 여름 젖은 몸살이 지문으로 떴는 갑다.

조명의 각에 맞춰 스크래치 선명하고 상처는 상처끼리 어깨를 결속한 채 겹겹이 두른 의지를 허공으로 펄럭인다.

농성이 깊을수록 도지는 어질 머리, 북풍보다 한발 앞서 지상에 닿으려면 음각된 저 투명 창을 쩍! 갈라야 한다.

어쩐다 속보로 당도한 협상 소식, 견고하던 스크럼이 고공에서 흔들린다. 은밀히 패스트로프를 난간에 내리는 거미.


광야

나는 서 있네
널따란 땅 한복판에
사위를 돌아보면
아득히 먼 지평선,
맞닿은 하늘과 땅의 안쪽
그 어디쯤 서 있네.

지평의 끝 쪽으로
애를 써 다가서면
또 저만치 달아나는 요원한 술래잡기
길 잃은 대지 위에서
낙타처럼 서 있네.

헤매다 목이 타서
도시는 야위는데

낙타가 낙타인 줄 모르는 형벌 같은 오늘
광야에 나는 서 있네
나는 서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