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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를 쓴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니냐는 반론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시인의 본분인 시를 쓰는 일을 등한히 하면서 쓸데없는 일에 시인들이 나선다면 얼마나 생뚱맞겠습니까?
시를 쓰는 것이 시인이 해야 할 일 중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지난 2019년 봄에 뜻있는 시인들이 모여 ‘공감과 치유’ 동인회를 구성하고 동인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목표는 봄가을 두 번 내기로 하였는데, 쉬워 보이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아, 네 해가 되는 이번에 6집을 내게 되어 아쉽다는 뜻이요, 고맙다는 말은 아무런 보상도 없는 데도 계속 동인지를 내는 데 참여하는 우리들의 노고를 스스로 칭찬하는 뜻입니다. 김애란, 신남춘, 임하초 동인은 1집부터 6집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참여한 개근생인 셈이구요, 김영희 동인은 5회 김기준, 명재신, 염정금, 홍찬선 동인은 4회, 이종범, 이한센, 정인경 시인은 3회 참여했습니다.

2019년 4월 30일 발행한 1집의 타이틀은 정인경 동인의 시 제목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를 인용했고, 2집 「나는 다시 헤세를 펼쳤다」는 김기준 동인의 시 구절, 3집 「인생은 눈부신 선물」이나 4집 「사람은, 모두 그립거나 슬픈 꽃」 5집 「슬픔은 나의 힘」 등은 본문에 나오는 시 구절을 따오거나 조합해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6집의 제목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김종숙 시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동인지에 참여한 동인들도 이런저런, 자신과 가족, 또는 세상일로 아프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들보다 세상의 더 많은 분들이 슬프고 아픈 일로 고통스러울 때가 많겠지요, ‘공감과 치유’라는 동인회의 이름처럼, 우리들이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감’을 줌으로써 그분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펴내는 이 동인지가 조금이라도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동인지 속의 시 한 편, 한 편이 독자들을 위로하는 작은 힘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고향 문학을 추구하는 동인회

‘월간시동인회’는 ‘월간시’와 ‘월간시인’을 통해 등단하여 서울시인협회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시인들로 이루어진 시동인회이다. 동인들은 서울시인협회 2023년 사화집으로 발간된 테마시집 『우리동네』 주제에 발을 맞춰 ‘고향’을 테마로 한 동인지를 발간하고자 뜻을 모았다.

이는 동인들에게 문학과 신앙의 지표가 되는 월산이 남긴 ‘고향문학’ 정신을 승계하고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고향문학’ 정신을 실행하는 시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좋은 작품들로 월산시동인회의 동인 활동이 계속 발전하리라는 소박한 희망을 갖는다.

003 동인들의 말
006 월간시동인회에 대하여

POEM

010 김성준 ㆍ 달과 별은 유난히 빛났다
024 김윤태 ㆍ 미아리에게
038 김의진 ㆍ 봉지 쌀과 참기름 한 병
050 김지유 ㆍ 목포의 설움
064 윤영돈 ㆍ 오냐, 내 새끼
078 이한센 ㆍ 그 시절 그 동네
090 이향연 ㆍ 엄마의 숲
104 임하초 ㆍ 헐렁한 바지
118 한나나 ㆍ 할머니 흰 고무신 한 켤레

ESSAY

022 김성준 ㆍ 야반도주
036 김윤태 ㆍ 판잣집
047 김의진 ㆍ 시장 풍경
062 김지유 ㆍ 초승달
076 윤영돈 ㆍ 가족의 탄생
087 이한센 ㆍ 누렁이
102 이향연 ㆍ 개구리들의 합창소리
116 임하초 ㆍ 단감의 첫 맛
130 한나나 ㆍ 고추장

달과 별은 유난히 빛났다

정든 고향 떠나 상경한 낯선 응봉동 달동네
유난히 밝게 수놓은 수많은 별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
그날 밤 어린 기억 새록새록

큰 보따리 한가득 짊어 메고
무엇에 쫓겨 급히 상경했는지
아홉 식구 등장에 당황한 큰고모
넉넉하지 않은 삶에 걱정 한가득

어려운 우리 형편 아시는 큰고모
선뜻 안방 내어주시고 얼굴엔 수심 가득하다
늦은 밤 배고픔에 깊은 잠 이루지 못해 뒤척이고
부엌에서 큰고모 우리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

손때 묻은 누런 벽지
검게 그을린 바닥 장판
작은 쪽문 다락방 거미줄
찌그러진 요걍 삐거덕거리는 재래식 화장실

땅 꺼지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
낯선 환경에 잠 못 이루는 서울의 첫날밤
유난히 밝게 빛나던 달빛 아래
어머니의 눈물 멈추지 않았던
아, 그 옛날 그날 밤

- 18쪽 ‘달과 별은 유난히 빛났다’ 전문

참기름 한 병


저녁밥을 지으시던
어머니가 참기름 사 오라신다

내리막길 냅다 뛰어간
깨 볶는 냄새가 진동하는 기름방

작은 신문지에 싸인
참기름 병을 받아들고
오던 길을 뛰다

말아놓은 신문지 틈으로
미끄러져 깨져버렸다

쏟아진 기름이 아까운 것보다
실망하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맺혔다

터덜터덜 빈손에 사색이 된 나를
괜찮다 하셨다
그럴 수 있다 하셨다

어머니 나이가 되어보니
괜찮다
그럴 수 있다가 왜 이리도 힘든지
모르겠다

- 43쪽 ‘참기름 한 병’ 전문

늦은 고백

큰아이의 짐을 싣고 대학 기숙사에 넣어준 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의 마음을 읽었다
남편의 소리 없는 운전을 옆에서 지켜보며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담에 짓눌렸을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한 딸을 서울 고모네 집으로 보내는 날
소갈비 잘하는 식당에 밥 한 끼 사 먹이려고 해도
네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갈 수 없었던
아빠의 형편을 왜 다 헤아리지 못했을까
빠듯한 살림에 첫 학기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왜 그때는 아빠의 고충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짐을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아ㅃㆍ의 말이 듣기 싫다고 짜증만 내었을까

고속도로 위 까마귀가 까악거리며 떼지어갈 때
내 소리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가는 까마귀한테
너무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되뇐다

- 59쪽 ‘늦은 고백’ 전문

아버지의 문

볕들지 않은 방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고

감옥 같은 어둠은
구름처럼 가득해

햇살 한 주먹 먼지 한 톨
허락할 틈이 없어

언제쯤 열린 문으로 들어가
겨자씨 하나 심을까

일곱 살 전쟁의 기억은
평생 볕들지 않는 방엣 살고 있어

볕들지 않는 방에
아버지가 아버지를 가두고 있다

- 99쪽 ‘아버지의 문’ 전문

사랑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장항 제련소가 보이는
작은 아버지 그림 한 장에는

오랜만에 고향 동네에
놀러 온 조카들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길모퉁이 서성이며
그저 지그시 바라만 보는
당신의 마음과

그렇게도 애써봤던 삶의 언저리에
고단함과 아쉬움만 남고
어린 조카들에게 향했던
애틋함이 그림에 녹아
더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던
못내 미안한 마음까지

그림을 보는 내내
나의 가슴에도 고스란히
서럽게 새겨집니다

- 123쪽 ‘사랑’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