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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간절곶 바닷가 언덕에 피어난 海菊해국처럼, 찬바람과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언제나 단아한 모습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바다의 짙은 해무에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추억의 바다를 표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 버린 것이었습니다. 치매였습니다. 어찌할 줄 몰라서 당황하고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남편을 바다에서 잃어버리고, 간절곶 등대 아래로 돌아온 시신을 언덕 위에 묻고도 60星霜성상을 강인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간절곶 아버님 산소가 있었던 언덕에는 올해도 海菊해국이 피어나겠지요. 대전 현충원에는 여름이 시작되면 노란 금계화가 피어납니다. 양가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담긴 아내의 글과 저의 부족한 글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살아가면서 보완해 가겠습니다. 꾸짖지 마시고 마음으로 봐 주십시오.

[책속으로 추가]

가마솥
김 정 식
연로하신 어머니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가마솥에 곰탕을 끓이는 것이다. 시골집 뒷마당에 가마솥이 걸려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우족과 사태를 고아낸다. 진한 곰국은 어머니에게는 보약 같은 음식이다. 어머니는 곰국을 좋아하신다.

오늘도 고기 상자를 들고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손에 들린 상자를 보시며 ‘그게 뭐꼬’ 하신다. 사태라고 하니 ‘요즘 비쌀 건데’ 하며 방으로 들어가신다.
손질한 고기와 뼈는 찬물에 담가놓는다. 핏물이 빠질 동안 불쏘시개로 불을 지피고 그 위로 장작을 엇갈리게 올린다. 장작에 푸른 불꽃이 일어나면 불이 제대로 붙은 것이다. 고기와 뼈를 가마솥에 넣는다. 가마솥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면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다. 오늘은 어머니 기분이 괜찮으신가. 요 며칠 어머니는 잘 웃지 않으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조용히 앉아 계시기만 했다. 이승과 저승을 저울질하고 계신지도 몰랐다. 부지깽이로 불을 다스리던 누나가 한마디 한다.
“울엄마 아들이 오니까 웃네.”
어머니가 오랜만에 활짝 웃으신다. 오늘처럼 곱게 웃으시면 좋을 텐데.

가마솥은 우리 집안의 역사와도 같다. 마을에서 두레로 일을 할 때 밥을 많이 지었다. 길흉사 때는 돼지를 삶고 국수를 끓이기도 했다. 목욕탕이 없던 시절에는 명절이 오면 목욕물을 끓여서 온 가족이 씻기도 했다. 요즘은 농촌에도 농기계의 보급으로 공동 작업이 없어지고 가족단위로 일한다. 된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를 쑬 때나, 소죽을 끊이는 것조차 없어졌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보리밥을 지어먹고 구수한 누룽지 숭늉을 먹으면서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풍습도 사라졌다.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혔다. 산아제한운동이 일어나면서 가족 형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 제도로 변화했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은 무겁고 두꺼운 무쇠 솥을 거부했다. 가볍고 편리한 양은 냄비를 사용하게 되었다.
가스가 들어오면서 불의 질도 달라졌다. 장작불은 두껍고 깊이가 있어 곰국을 끓이기에 안성맞춤이다. 높은 불로 초벌 끓이기를 한 후 낮은 불로 뭉근하게 장시간 끓이게 되면 뼛속의 모든 영양분이 국물 속에 빠져 나와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내게 된다.
반면 가스불은 얕고 경박하기 짝이 없다. 저 혼자 푸르르 끓고 저 혼자 사그라진다. 고기와 뼈를 양은찜통에 넣고 가스 불에 끓여 보면 가마솥과 장작불에 견줄 바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정도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이 아닐까.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가마솥처럼 두텁고 깊은 정이라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양은냄비처럼 얄팍한 정이 아닐까.

솥뚜껑을 열고 고기를 꺼내 도마에 놓고 썰기 시작한다. 뼈가 고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차 맛을 보시라 드리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너나 많이 먹으라고 하신다. 주름지고 나약해진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울컥한다. 애써 웃는 낯으로 어머니의 숟가락에 고기를 올려 드린다. 맛있다고 하면서도 조금밖에 드시지 않는다. 가마솥에는 한 솥 가득 곰탕이 끓고 있는데. 이제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등지게 되면 가마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은이의 글 /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제1부 / 해국
海菊해국 / 가마솥 / 추억 만들기 / 어머니의 몸무게 / 霧散무산 소리 / 마지막 전화 / 갑자기 닥친 휴가 / 바이칼 호수 / 선생댁 / 투석실에서 / 마지막 문상객 / 하늘나라로 여행 떠나셨습니다. / 할머니의 시계

제2부 / 몽고정
몽고정 / 빵점 사건 / 도전 / 여 명 / 戀歌연가 / 오만과 편견 / 폭풍의 구름다리 / 죽음의 공포 / 關雲長관운장 / 다섯 개의 龍용 발톱 / 여덟시 삼십 삼분 / 아메리카노 인생

제3부 / 몽돌
몽돌 / 머릿발 / 古木고목 / 아프니까 청춘 / 아줌마 / 희망 풍경 / 황제 결혼식 / 어떤 결혼식 / 賻儀부의 / 하트 / 金鷄花금계화 / 귀에 걸린 달 / 獨立독립 / 餘白여백의 美學미학 / 가을 바람 / 삶과 죽음

제4부 / 은모래
은모래 / 빈(Wien)의 여인 / 내 마음의 풍경 / 귀신통 / 不老불로 古墳고분 / 교차 / 떨켜 / 촛불 집회 / 인생 풍광 / 山水畵산수화 / 키위(Kiwi) 새 / 가을꽃

평설(성기조) /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