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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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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손택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을 펴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지 올해로 12년째인 시인은 앞서 두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는 문단 안팎의 호평 속에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과 “감성적 전통을 회복하는 실감의 언어”로 대변되는 [목련 전차]가 그것이다. “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신형철)의 한 축으로 문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그가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 [나무의 수사학]은 농경문화적 상상 인자가 지배적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도시인으로서 일상을 수락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애수가 유독 눈의 띈다. 녹녹잖은 일상적 삶을 끌어안고 하강함으로써 ‘민중’과 ‘전통’의 음계 속에서 다르게, 새롭게 공명하는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는 시의 진경과 삶의 진경이 연출해내는 독자적 음역을 경험하게 된다.

소멸과 모순의 현실을 관통하는 역동적 상상력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시인은 공들여 쌓은 성채를 무너뜨리고 끝없이 황무지를 향해 스스로를 추방하는 존재이다. 동어반복에 대한 두려움이 신생의 꿈을 호출한다. 손택수의 이번 시집은 앞선 시집들의 시풍을 견지하면서 그동안 획득한 ‘색채’를 애써 흩뜨린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수채]) 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문법을 지우면서 새로운 말들을 견인하는 고투의 흔적들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거기에는 “쓸모없어진 부리를 탓하며 굶어 죽는 대신 스스로 부리를 부숴버린 독수리”([얼음의 문장])와 같은 어떤 결연함마저 느껴진다.
시인은 그 결연함으로 ‘나란한 것’들의 사이를 걸어간다. ‘나란한’의 의미가 삶과 죽음, 지상과 지하, 수평과 수직과 같은 대척점에 위치한 것들의 병치를 가리킨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제가끔의 사물은 시적 공간에서 아프게 존재하는 삶의 구체적 세목들이다. 시인은 일상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물들을 흩트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냄으로써 거부할 수 없는 소멸의 운명을 길들이고자 한다. 여기서 ‘은유’로 대변되는 전통적 동일성의 미학은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저마다의 가치를 긍정하는 열린 미학의 지평으로 확대된다. ‘꽃과 단추’([꽃단추]), ‘망치와 붕어’([망치]), ‘아파트와 모내기’([아파트 모내기])처럼 전혀 다른 사물들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만날 때 일상적 풍경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역동적 이미지들이 탄생한다.
박수연 평론가는 “(이번) 시집은 ‘죽음’의 터전 위에서 펼쳐지는 의미들의 집산지”라며 새로운 ‘서정’의 근거로 시집을 관통하는 ‘죽음’을 읽어내고 있다. 사물의 죽음과 태어남, 시인의 개인적 죽음 체험, 도시적 삶의 불모성 등을 경험하면서 시인은 사물들과 새로운 관계의 은유를 형성했다. 구체적 삶으로부터 육화된 은유들은 전통 서정 미학을 갱신하면서 강한 현실성을 띤다. 그의 상상력은 추천사를 쓴 최두석의 말대로 “돌들이 모래알을 품고 있는 강으로부터 광고 문구를 애무하며 미끄러져내리는 빗방울로 힘차게 거슬러오른다”. 24시 싸우나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설산을 꿈꾸는 일상인의 비애([얼음 신발])와 도시적 삶의 불모성이 내면화된[나무의 수사학] 연작을 포함한 2부의 시편들은 그 실물적 이미저리다.
이와 같은 상상력은 농경문화적 상상력을 축으로 한 3부의 시편들과 부딪치면서 생명력 넘치는 카오스를 선물한다. 설화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이 충돌하며 길항하는[백년 동안의 바느질]이나 땅 아래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주말농장 체험을 드러낸([구름 농장에서]) 시편들에서 우리는 문명과 자연이 팽팽하게 맞서며 뿜어내는 긴장미를 읽을 수 있다. ‘가계-민중-전통’의 관성을 안고 도시의 일상을 사는 시적 ‘카오스’의 세계가 “모순의 현실”([표4])을 만나 “자신의 중심을 물들”이며 “추락”할 때 “얼얼한 꽃빛이 땅땅 쇠종 소리”([동백 사원])를 내는 공명음이 들려온다. 시인은 얼음처럼 단단히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곳의 사물과 함께 물로 녹고, 번지고, 지워짐으로써 그 “관계에 바치는 언어구성체”([해설])를 잉태하였다.

추천의 글
손택수의 품은 넓고 깊다. 우리 사회의 온갖 국면을 넘나들며 그가 품어낸 삶의 모습이 다양하고 그러한 소재들을 숙성시켜 뜻과 맛을 우려내는 내공이 웅숭깊다. 그의 상상력은 돌들이 모래알을 품고 있는 강으로부터 광고 문구를 애무하며 미끄러져 내리는 빗방울로 힘차게 거슬러 오른다. 또한 24시 싸우나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논물 속에 고인 아파트 모판에 모내기를 한다. 그리고 겨울이면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풍경소리를 내는 동태의 뱃속에 눈보라로 몰려와 산란을 한다. 만약에 ‘화엄의 상상력’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모순 덩어리인 이 땅의 현실을 종횡무진으로 꿰뚫고 가로지르며 반죽하는 시인 손택수에게 가장 어울릴 듯하다. (최두석, 시인)

목차

제1부
꽃단추
육친
감 항아리
모과
얼음 물고기
얼음의 문장
얼음 이파리
수직 파문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수채
수정동 물소리
흰둥이 생각
송아지
바늘구멍 사진기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구만리 바다
눈 내리는 밤의 日記
숨거울
松韻

제2부
빛의 감옥
나무의 수사학
나무의 수사학 2
나무의 수사학 3
나무의 수사학 4
나무의 수사학 5
나무의 수사학 6
광화문 네거리엔 전광판이 많다
햇볕 한 장
서울에서 1시간 50분
두만강 검은 물에
망치
스프링
강철 거미
63빌딩 수족관
쓰레기왕
풍선인형
곰을 위한 진혼곡
쥐수염붓
귀머거리 개들이 사는 산
얼음 신발

제3부
동백 사원
굴참나무 술병
은유
감자꽃을 따다
바위를 쪼다
구름 농장에서
물통
푸른 밧줄
아파트 모내기
죽은 양귀비를 곡함
초승달 기차
자전거 안장
시골 버스
남해 밥집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빙어 해장
물고기 입술을 기다림
백 년 동안의 바느질
새의 부족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지리산과 나의 불편한 관계

해설 박수연
시인의 말

본문중에서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수채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
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
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
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
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
하디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성미산 너머 북한산 쪽으로 간다
한강에서 날아오른 물새 두엇이 물풀 냄새를 끼치며 선
교사 묘지 위로 날아간다
버스가 오기 전 둘 데 없는 눈으로 나는 바닥에 구르는
모래알을 보고, 모래와 모래가 등을 부비는 사이의 반짝
임, 흩어지면 사라지는 틈을 보고, 여위면서 바래가는 가
로수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
대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
는 아내와 시래기 마르는 처마 아래서 나물을 다듬는 어
머니의 집 간난도 설움도 불빛 하나로 단촐해진 지붕을
찾아가리라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
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
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
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

나무의 수사학 1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나무의 수사학 2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 나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 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수로를 잃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그
아찔하던 순간도 잠시
빈 소매를 펄럭이듯,
팔 없는 소맷자락 주머니에 넣고 불쑥
한 손을 내밀듯
초록에 묻혀 있는 나무
환지통을 앓는 건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새다
허공 속에 아직도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갯짓
날갯짓만 하다 돌아가는,

동백 사원
동백이 무슨 쇠종이라도 된다는 듯이 눈보라가 꽃망울
을 치고 간다 겹겹이 뭉친 망울 속엔 동박새 울음이 들었
고, 가지를 쥐고 흔들던 시월의 서리 묻은 바람이 들었고,
한 방울 머릿기름을 얻기 위해 눈보라 속을 걸어오던 발
소리가 들었다
묵언에 든 동백을 찾아 기억에도 없는 무슨 인연인가에
이끌려 땅끝까지 내달려온 길 둘 데 없는 마음은 미황사
처마처럼 벌어지는 꽃송이와 함께 얼어붙은 대기라도 살
짝 밀어젖혀보고 싶은데
멀리 꽃향기를 날리는 대신 다리에 쇳덩이 추를 달고
떨어지는 독한 것, 동백은 죽어 제 그늘 위에서 다시 피어
나는 꽃이다 산문을 닫아건 채 자신의 중심을 물들이며
추락하는 저 얼얼한 꽃빛이 땅땅 쇠종 소리를 낸다

새의 부족
새들의 노래로 지도를 만드는 부족이 있었다지
새들의 방언에 따라 국경선과 도계를 긋고 살았다는
사라진 부족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더라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
수백 킬로쯤 끌고 온 국경선을 강물에 풍덩 빠뜨리고
산정에서 끝난 도계를
노을 지는 지평선까지 끌고 가 잇기도 했을 테지
그런 선들이 악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끝없이 출렁이는, 새로 그려지는
풍경들은 아마 음표를 닮아 있었겠지
악보를 읽는 일이 지도를 보는 일과 같았을 때
그들의 귓속으론 별자리가 흘러들었을 거야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도라지멍울이나 개암열매가 터지듯이 울고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나뭇잎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를 내며 울다가
수면 위로 막 뛰어오른 물고기 비늘이
햇빛과 부딪칠 때의 순간처럼 반짝였겠지
노래의 장단과 고저를 따라 해발이 시작되고
강의 시원과 하구를 측량하던 그때
측량할 수 없음을 측량하던 그때
저 부신 부리 끝 좀 봐, 나침반처럼
사라진 지도의 한쪽을 콕 찍으며 날아가는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0~
출생지 전남 담양
출간도서 23종
판매수 5,118권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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