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10년 넘는 시간을 공들여 지켜본 나름의 애정이 아니어도

尹은 주목할 작가이다.

바위처럼 좀체 변할줄 모르는 그의 소설은

언제고 그 자리에서 독자를 기다릴줄 안다.

짐짓 은어를 기다리는 남대천의 젖가슴처럼.

삶이 위태로워 버둥대는 것마저 잦아들 무렵이면 출간되는

그의 글은 차라리 독에 가깝다.

더욱이 봄날에 윤대녕의 소설을 집어들었다면

책 옆에 여행 가방 하나를 준비해야 한다.

 

어떤 치들은 - 아마도 尹의 모든 작품을 챙겨보지 않은 -

고급 연애소설과 신파적 멜로의 대부격으로 그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것이 사회역사적 상상력이 지나치게 압도하고 있는

한국 문단에서 - 물론 이마저도 퇴락일로에 접어든지 오래이나 -

이만큼의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다.

지독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연하고도 실낱같은

관계의 허상과 탈색된 삶의 가벼움을 탐구하는 그만의 방식은

그래서 박하사탕의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

 

늘상 수해전 스쳐지나간 연인으로부터의 전화,

그로 인해 시작된 고작 며칠간의 여행,

귓속에 바람처럼 감기는 지명과 상점들,

그림 한 점, 또는 대중가요 몇 구절의 애상을 쫓는

참으로 진부하기 그지없는 방식일지언정

마치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을 소설로 옮긴것마냥

표정없는 문장들이 어울려 이룩하는 긴장이란

그야말로 '상춘곡'이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그의 소설들이 환기시키는 감성의 <대설주의보>는

언제나 나를 뜨겁게 달군다.

 

결국, 신에게 귀의한 몇년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포말처럼

잔상으로 남아 있는 글쓰기에 대한 식은 정조가

다시금 尹의 글을 읽으며 부활한다.

 

하지만

누구라도 삶이 몰고온 결락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이라면

소소한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어떤 미세한 자극이라도

오기만 와봐라 용수철처럼 뛰쳐나갈 자세가 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결코 봄날 윤대녕의 소설을 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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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도 작품집 말미 해설은 맡은 신형철과 내가

공통적으로 밑줄을 그은 몇 문장을 소개한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직식과 이해의 의지조차 없이

우리는 그녀와 만나왔고 또 무감하게 헤어졌던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대설주의보-

박민규에 대한 대중적 열광과 평단의 찬사가 도리어 그와 나 사이를 멀게 만들었다. 
에니메이션 <나인(9)>을 연상시키는 은하계 모양의 선글래스며 
지극히 음란해보이는 그의 수염. ‘나 꽤 난 놈이야’라고 시위하듯 득의양양하게 다문 입술. 
한 장의 프로필 사진만으로도 난 득의양양하게 박민규에게 레드카드를 먹였다. 넌 Pass!
 단 하나의 소설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아니, 애당초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음란한 수염 따위를 문제 삼고, 문창과 출신이기에 특유의 농익은 상업적 문장을 구가할 것이라는 상투적 이해는 그야말로 삼류다.
 결국 <아침의 문(門)>으로 2010년 이상까지 거머쥔 그는 
그 음흉한 미소로 자신의 득템을 보란듯이 자랑했다. 
권영민과 김윤식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게 만든 그의 서사 앞에 
삼류 독자의 오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상 머리에 올려놓은지 벌써 일주일. 
그러나, 단 한페이지도 넘기지 않은채 대치상태를 지속했던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이 죽어버린 사회에서 그의 동생까지 누나의 뒤를 이은 그날 밤, 
왜 하필 유독 <아침의 문(門)>이 날 향해 열려있었는지. 

설마 계시 혹은 환상일까? 

죽음의 올가미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진실의 동생이 혹 이 소설을 읽었다면 
스스로의 우발성을 과연 철회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이 건너편 옥상에서 가랑이 사이로 쏟아지는 생명과 만나고서 삶에 대한 낙관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물론 소설의 엔딩을 ‘낙관’으로 해석하는 것의 객관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언제나 열린 결말이란 늘 그렇듯 소비자의 몫이니까.- 자살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죽음을 공동구매했던 남자. 하지만 억세게도 운이 나빠 자기 혼자만 살아남은 그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값싼 비스킷과 우유 한모금을 들이킨다. 그리고는 시체 세 구가 나란히 엎드려있는 방으로 돌아와 보다 확실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 시간 그가 들렀던 편의점의 알바녀는 그녀의 배를 졸라맨 압박붕대 틈새로 묵직한 태반은 때가 다 되었음을 알려온다. 사랑 없는 욕정의 출산은 늘 그렇듯 슬프고 외롭다. 아랫도리가 모두 쏟아지는 통증을 틀어쥐며 그녀가 해산의 장소로 선택한 곳은 공교롭게도 남자의 옥탑방 창문을 통해 바라다보이는 건너편 건물의 또 다른 옥상. 결국 힘껏 벌린 가랑이 사이로 쏟아지는 생명이 올가미 사이로 모가지를 들이민 또 하나의 생명과 마주한다. 그리고, 죽음을 작정했던 생명은 또 하나의 생명에게로 달려간다. 올가미라는 죽음의 문(門)과 생명의 문(門)은 그렇게 하나로 통했다. “불쑥, 튀어나오는 머리를 그는 그만 보고 말았다. 그 무언가와, 그래서 왠지 눈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눈코입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서로의 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이 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는 그렇게 서로를 대면하고 있었다.”

가시 네 잎으로 무장한 장미꽃 한송이, 활화산 두 개와 휴화산 하나, 그리고 세 그루 바오밥나무가 살고있는 소행성의 어린왕자가 지구에 불시착한 이야기를 처음 만났을 즈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법 소년의 모습이었고 나의 입에서는 그가 연신 되뇌이던 것처럼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라는 말이 습관처럼 붙어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왕자가 내뱉는 말들을 더 잘 이해했는지 모른다. 문고판 서적의 낡은 제본과 쉽지 않은 번역투 문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락한 비행기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대화를 비교적 쉽게 이해했다.
가령, '별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꽃이 한 송이 있기 때문이야...' 라든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문장의 의미를,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결코 사전을 들추어 머리에서 시작하는 마지막에 가서야 오감으로 끝을 맺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언제나 마음에서 출발해 오감을 거쳐 머리에서 끝이 나는 그런 의미 말이다.- 특별한 수고를 기울이지 않아도 나의 몸은 이미 알고있었다. 머리가 먼저 수리작용을 시작하기 이전에 나의 마음이 먼저 말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소행성에 해가 수천번은 뜨고 졌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과거에 비해 훨씬 명료해진 지식과 팽창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 중심에는 문자에 대한 해독능력이 대부분이 되겠지만, 나는 내가 읽은 동화책의 줄거리조차 다시금 되뇌일 수 없다.

 

그간, 나의 뇌구조가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인지 혹은 나도 모르는새 사막에서 사라진 쌩텍쥐페리가 살아돌아와 개정판을 발간했는지도 모를 일, 나는 어린왕자와 추락한 비행기조종사의 대화를 전연 알 수 없다. 

이 짧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이야기 속에서 서른 하나인 내가 확인한 것이라고는 어린왕자가 만났던 소행성의 이상한 어른들을 어느 순간 내가 감싸고 있다는 사실과 사실 일정 부분 -아니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하는 그 이상- 나는 그들과 닮아있으며, 어른의 물음에 철인(哲人)같은 모습으로 과장된 말을 쏟아내는 어린왕자의 태도에 일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을 확인한 것 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딘가에 숨어있을 샘의 존재만으로 만족하기보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샘이 없음을 목말라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가 살고있을 그 어떤 수많은 별들이 아니라 그저 나의 소유로 공인된 단 하나의 별이 없음을 분노하고 있다.

 

도대체 지난 시간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나는 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것조차 알지 못한채
심지어는 하루의 해가 언제 저무는지 유심히 살펴본 날이 언제였던가 한참을 고민해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나 스스로의 변화 앞에 무심해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읽어줄 때쯤
나는 아무런 감정없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 생선장수처럼
그저 베스트셀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아이가 이 책에서 눈물 한 두방울 쯤 흘려주기를 기대할지 모른다.
술을 마시는게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술꾼이 오히려 나보다 행복해보인다.

 

그래서일까
비행기 조종사와 헤어지는 마지막 날 어린왕자가 내뱉던 그 말은 꼭 지금의 내 마음이다.
"오늘 저녁엔 더 무서울 거야......"

 

 

아내가 10분 간격의 진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