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에 관해서 사유하는 가장 생산적인 방식은

담론을 기호의 체계나 텍스트의 확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는 대상을 체계적으로 형성시키는 실천’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Michel Foucault-

1. ‘나무’와 ‘물결’의 혼돈

  이탈리아계 미국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 세계 문화사의 형성을 ‘나무’와 ‘물결’이라는 은유적 기표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나무는 통일성으로부터 다양성으로의 이행’을 ‘물결은 최초의 다양성을 삼켜버리는 동일형식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한 민족 문화의 형성은 민족 구성원의 찬동과 상관없이 전통문화의 고유한 자산을 유지해 나가려는 속성(나무)과 외래 문화의 이식 수용을 통한 세계화의 흐름(물결)을 통해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역사적 근대의 태동과 더불어 인류 문화사의 지형적 흐름을 정찰함으로써 그 논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사실, 자국문화를 세계화하려는 노력과 세계문화를 자국화 하려는 노력으로 인해서 20세기 후반 세계 각국에서는 민족적 문화구조와 경제구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자국의 문화적 경계선 확정과 그 영역의 보장은받게 되었다. 결국, 민족문화와 정체성이라는 전통성은 ‘글로벌 스페이스’(Global-space) 속에 그 역사적 지지기반을 더 이상 존속하기 힘든 시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단순히 전통의 단절이라는 민족적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는 세계 문화 체제가 중심부와 주변부의 종속적 지배 관계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우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필두로 한 다국적 문화의 유입과 무분별한 수입은 경제 논리와 동일하게 민족 문화의 내면에 깊게 침윤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제 우리는 서구 문화의 몰주체적 추수를 벗어나 세계 문화의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한국의 정치․경제적 근대의 역사적 기점을 끌어올리려 했던 부질없는 노력을 벗어나, 탈근대를 부르짖는 현재에 비추어보았을 때 완전한 근대성의 확립은 선행되었나하는 문제를 모색해야 한다. 더욱이 탈식민주의를 바탕으로 제3세계 문화권에 속해있던 주변부의 국가들이 서구중심주의 담론의 해체를 표방하며 새로운 주체로의 발돋움을 시도하는 일련의 흐름들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언제까지 문화의 주변부로서 ‘객체’로서 뒷따라갈 것이 아니라, 세계 문화의 ‘주체’로 발돋움하기 위한 지적 토대를 수립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객체에서 주체로의 복권을 위한 지적 토대의 근원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서구식 근대화의 이념과 가치관은 이미 그 정신사적 황폐함을 드러냈다. 인간성 상실과 계몽적 이성의 도구적 이성으로의 전락, 19세기에 이미 확인되었던 자유주의 이념의 내재적 모순들. 결코 그것은 탈근대를 지향하는 새시대의 담론으로서 그 지위를 상실했다. 이것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사적 원류를 다시금 더듬어 올라가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역사적 시기상으로도 가장 근접해 있던 (한국 사회의 전통적 원형으로서) 유교 문화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2. 담론의 시대, 그 속의 ‘유교담론’

  21세기 초입에 돌입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20세기를 평가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들 중 하나가 바로 ‘담론의 시대(Period of the Discourse)’라는 압축적 수사일 것이다. ‘담론’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단순히 ‘이데올로기’ 혹은 ‘패러다임’의 그것과 동일한 범주로 취급할 수 없다.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라는 ‘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경우에 있어서나 전문 연구자에 있어서까지 ‘담론’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담론’의 개념 정립에 대한 문제는 푸코에서부터 시작되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확정된 무엇이라기보다 지속적인 변화의 변화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담론 자체가 ‘담론의 담론’을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담론이라는 용어의 이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대개 사회적 이슈, 혹은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체 기표로서 ‘담론’이라는 용어의 차용을 긍정해왔다. 물론, 이것 역시 ‘담론’이 지칭하는 범주와 무관하지는 않다. 하지만, ‘담론’이라는 용어는 그 안에 무수한 하위 담론을 생성시키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분절되는 자기증식성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성격을 지닌다. 단순히, 한 시대에 국한된 문제의식의 탐구는 담론의 본질을 간파할 수 없으며, 다양한 시공간적 좌표에서 각각의 독립적 의미를 획득하는 문제에까지 다가서야 한다. ‘담론 이론’에 입각한 연구와 ‘담론 분석’을 수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 담론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바라보고 이들 상호간의 함수관계를 포착한다는 전제 조건을 선행하는 것이다. 

  푸코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에서부터 출발한 담론의 탄생은 20세기 근대의 지난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담론은 그것의 개념 정립을 위한 푸코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재라기 보다는 그 밖의 다른 것 (발화, 개념, 효과)을 생산하는 무엇이다. 담론의 구조는 특별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관념․견해․개념․사유 방식․행동 방식의 체계성 덕분에, 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행동 방식의 효과들 때문에 감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의 무수한 생산과 증식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의 이념과 전통적 현재성을 더듬어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담론 연구’이다. 단순히 특정 대상에 대한 내연을 더듬어가는 것이 아닌 안과 밖의 경계에 놓이는 모든 잡다한 것들까지도 아우르는 관계의 지형학, 그것이 담론 연구인 것이다.

  담론과 담론 연구의 의미에 대한 앞서의 논의가 장황하게 이어진 것은 필자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는 ‘유교 담론’의 그 실체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임을 굳이 밝혀두는 바이다.

  ‘유교 담론’이라는 용어는 쉽게 말해 ‘유교’와 ‘담론’이라는 용어가 결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교에 관한 담론’ 정도로 쉽게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담론’이라는 용어가 결합됨에 따라 ‘유교’의 의미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당위성을 떠 안게 된다. 이 때에, 유교는 공자를 정점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한 종파로서 지니는 단선적 의미망을 벗어나, 서구의 자유주의와 개체주의적 사회관이 지니는 모순과 대항하는 다층적 의미로 분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유교’에 대한 연구와 ‘유교 담론’에 대한 연구가 지니는 차이점도 이와 같다. ‘유교 연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 이념의 내적 가치 체계를 이루고 있는 상관 관계의 해명, 그리고 그것의 파생과 전통적 변천사의 포착이라는 내적 속성들의 파악들로 집약된다. 그것의 범위를 아무리 넓혀본다 한들 유교의 현대적 변모와 ‘동아시아적 가치’ 속에 내재된 유교의 의미, ‘유교 자본주의’, 혹은 ‘유교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장될 따름이다. 하지만, ‘유교 담론 연구’로 확장되었을 때 그것은 전연 다른 영역의 문제로 돌입하게 된다. 유교를 둘러싼 권력의 계보학을 추적해가며 앞서 언급했듯 ‘유교’에 대해 언급하는 발화자로서 그 주체와 담지자로서 객체,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바라보고 이들 상호간의 함수관계를 포착해야 한다는 선행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실, 담론의 차원에서 유교를 연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학문 연구에 있어서 그 정치성과 목적성을 드러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의 정신사적 공황과 부조리를 극복할 대안으로서 유교를 연구하는 작업이 시대적 상황과 별개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이 또한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실은 그간 유교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그 담론의 형성과 변천이 서구와 동양의 공간적 변화와,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좌표의 변모에 따라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우선 정치하게 탐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법론적 도구로서 ‘담론 분석’의 중요성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3. ‘오리엔탈리즘’, ‘아시아적 가치’의 허구성 폭로와 유교의 재해석 

  이제 유교에 대한 구체적 지형도를 정찰하는 데에 있어 ‘담론 연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한 권의 저서를 토대로 전통과 현대에 있어서 유교의 의미와 근대의 모순을 타개할 대안으로서 가능성을 타진해보도록 하자.

  이승환의 ꡔ유교 담론의 지형학ꡕ(2004, 푸른숲)은 머리말에서 저자가 명시하고 있듯 “유교를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다양한 담론들을 사회․정치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양에서 진행된 기독교 선교 시기의 유교 담론, 그리고 후기 근대적 시점의 유교 담론은 비록 유교를 둘러싸고 벌어진 담론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각기 다른 효력을 발생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 차이를 양산해낸다”(8면)는 저자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재차 강조하거니와 담론 분석/연구의 가장 큰 목적성은 ‘주체와 객체, 영향력’이라는 세가지 층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유교와 관련한 여러 담론의 공간적 좌표가 동양이냐, 서양이냐 혹은 동양 내에서도 유교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냐 한국․일본이냐 하는 따위의 문제들은 그 하나 하나가 독립된 변수로서 ‘유교 담론’이라는 상위 담론의 방향을 상이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 기저에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대한 인식과 서구 중심주의의 해체에 대한 명백한 지향점이 설정되어 있다. 더욱이, 그러한 논의의 중심에는 ‘아시아적 가치’ 논쟁과 ‘유교 민주주의’, ‘유교 자본주의’에 이르는 서구 중심의 담론, -주지하다시피 ‘아시아적 가치’ 혹은 ‘유교 자본주의’라는 용어의 최초 개념화는 동양이 아닌 서구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동양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복속시키려는 제국주의적 야망이 숨겨져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 그 배면에 놓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서구중심주의(Eurocentrism)의 폭로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유교 문화’를 비롯한 전통 일반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전통의 어떤 부분을 선별해서, 산포하고, 써먹으려 하는가가 문제이지, 일괄 폐지론을 외치거나 부흥론을 외치는 일”(11면)이 아님을 지적하며 유교 담론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화, 이분법적 논리의 극복을 호소한다.

  시각의 다양화와 이분법적 논리의 극복. 물론, 전통에 대한 현대적 수용의 문제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과 실천적 인식안으로 체득시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장애물이 놓여 있다. 전통과 현대의 변증법적 합일점을 지향하면서도 그 논의의 말미에 가서 지극히 근대주의적 입장으로 전통의 폐기를 요구하거나, 감상적 민족주의에 도취된 채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된 전통의 부흥을 주장했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 바 있다. 우리의 경우, 조선의 근대화 초창기 행해졌던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 -계몽적 민족주의(전통 부정)와 자강적 민족주의(전통 긍정)-을 통해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임이 확인된다. ‘지독한 편견은 무지와 같다(Prejudice is ignorance).’ 전통을 보수와 정체로 연결짓는 인식론적 편견은 전통에 대한 창조적 수용이 진보/변화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승환의 저서가 보여주는 기존 유교 담론에 대한 ‘뒤집기(전복)’는 이러한 인식론적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ꡔ유교 담론의 지형도ꡕ는 각 장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거의 모든 담론을 망라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세부적 담론의 전개 과정에 대한 설명이야 소략한 면이 없지 않았다 치더라도 경제․역사․문화 방면에 이르는 다양한 참고문헌과 저자의 관심사는 ‘담론 분석’의 차원으로 유교를 바라봄에 있어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실패한 양대 체제로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노선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하며, 그 대안으로서 ‘비판적 지역주의에 근거한 전 지구적 연계’라는 주장은 저자의 ‘독설(毒舌)’아닌 ‘독설(獨說’)이 빛나는 부분 중 하나이다.(260-261면) 사실, 이 부분 역시 ‘중간노선’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완전히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이론 또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부분적 혼합 -공적부문의 국유화, 복지정책의 실현 등- 을 통한 중간노선을 채택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대안 없는 비판’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인문학자로서의 비판적 성찰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사실, 10개의 장(章)으로 분류된 내용이 각각의 다양한 소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적 대의에 있어서는 크게 두가지로 압축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째가, 오리엔탈리즘․아시아적 가치 속에 함의되어있는 서구중심주의 시각의 폭로이며 둘째는 유교 정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파생된 우리 안의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다. 유교 담론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를 안과 밖의 차원에서 고구하는 것은 사뭇 중요하다.

  먼저,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적 가치 등 서구인의 시각을 동해 동양을 바라보려 했던 유교 담론 속에 농후하게 배어나는 서국중심주의,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을 가늠해보자. -이에 대해 이승환의 저서에서는 1장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과 2장 ‘서양의 유교 이해에 대한 담론학적 분석’, 그리고 제8장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담론’을 통해 상술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은 오리엔트라는 개념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서구인의 인식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오리엔트는 서구인들이 자기 지역 이외의 문화권을 자신들과 분리해서 차별화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낸 의미론적 고안”(41면)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화의 논리는 오리엔트를 신비롭고 몽환적 정신세계를 함유한 중세로 규정지음으로 인해 서구에 의해 근대화시켜야 할 객체로 상정하는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서구중심주의의 시작이자 제국주의 논리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서구인에 의해 상정된 오리엔탈리즘의 배면에 놓인 야만적 자본주의의 침략 정책을 인식함에 있어 우리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ꡔ오리엔탈리즘ꡕ이라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고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서구중심주의(Eurocentrism)'의 담론 주체는 서구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상정하고 타문화권과 차별화시키는 인종차별적 발상은 ‘자유주의’와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서 타문화권을 정복해 나간다. 하지만, 자신(동양)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는 현장(오리엔탈리즘 담론) 어디에도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담론 역시 동일하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명명은 종교․인종․언어에 있어서 다양하기 그지없는 아시아의 정체성을 하나의 획일화된 범주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의 설정이 “미국의 전 지국적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조작․유표․선전”(278면)되고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유교 정신과 문화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우리 안의 편견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는 담론의 주체가 서구로 집중되었던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적가치 논쟁 못지 않게 유교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되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원인 규명의 회의석상에서 언제나 도마 위의 생선처럼 혹독한 논란의 화두에 놓이는 것이 바로 ‘유교문화’와 ‘유교적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지역연고주의와 가부장제가 빚어놓은 권위주의적 습성과 폐쇄성이 경제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쳐 노동구조의 폐쇄성,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의 불균형, 세계화에 역행하는 국수주의적 사고 방식 등을 빚어냈다고 우리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 경전에서 언급하는 ‘공사관(公私觀)’은 오히려, 지역연고주의 혹은 공사 개념의 무분별함을 경계하고 있다. 전통적 ‘공(公)’개념의 변천사는 단순히 지배권력․지배영역의 의미 뿐만이 아닌 윤리적 의미와 다수․공동의 의견과 이익이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5장 ‘한국 전통의 공(公) 담론과 근대적 변용’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또한, 가부장제를 기틀로 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질서는 한국의 경우 군사독재와 문민독재 시절의 권위주의적 병폐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자유주의 이념 자체가 또다른 불평등을 심화시켰던 19세기 유럽의 상황과 동일하게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속성은 자본의 축적과 경제의 성장만이 최선의 가치라는 도그마를 교묘하게 포장된 형태로 심화되었던 것이다. 이승환은 더욱이 우리의 자본주의를 ‘유교 자본주의’로 규정짓는 발언에 함의된 서국중심적 태도와  반유교적 속성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241～254면) 우리 스스로 반유교적인 사실을 가지고 유교적이라 평가하여 매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유교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합리성에 근간을 둔 학문이며 담론 체계이다. 서양의 관념론적 철학의 흐름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자애로운 가면을 쓰고서 인종차별적 만행을 뒷받침하는 동안 유교 문화권의 그것은 ‘천하공심(天下公心)’의 회복을 수신(修身)으로부터 전인적으로 확산시켜 가고자 하였다.

4. 객체에서 주체로의 열망

  유교 담론을 둘러싼 그간의 논의는 유교 자체가 담론의 주체로서 설정되기보다는 권력과 정치, 경제의 논리에 복속되어 들어가는 역사를 보여준다. 문화는 인류의 정신사적 계보학을 반영하는 상부구조로서 결코 하부구조로서 물적 토대에 침몰되서는 안 된다. 유교와 유교문화는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싱가포르의 수하르트 정권이 그러했듯 부당한 정치 권력의 정당화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유교 정신의 본질이라고 착각해서도 아니 된다. 지배 권력에 대한 야합과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의 감시자로서 민중의 역할을 중시했던 것이 유교 정신의 본질이다. 유교 문화는 수 천년간 동양의 중세를 떠받들고 역사적 생명력을 지속해왔다. 그것이, 그렇게도 권위주의적이고 불합리로 가득찬 모순의 결정체였다면 결코 십 수세기에 걸친 지배 이데올로기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담론의 객체’에서 ‘주체의 담론’으로 유교 담론에 대한 비판적 복권을 시도해야 할 시기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서구인의 선민의식을 예증하는 도구적 이념으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동양인들 스스로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온전한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유교 자본주의’의 반 유교적 속성을 유교적이라 개념 짓는 우둔함을 벗어나야 한다. 권력의 시녀로서 지식과 사상이 변질되어왔던 과거 유교 담론의 지형학을 골수에 사무치게 인식해야 한다.

  문제는 아시아적 가치를 개념짓고 평가하는 주체의 선두에 아시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유교 정신에 내포되어 있는 반근대적 불합리성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인냥 거짓 유포하고자 하는 서구중심주의 시각의 극복이다. 유교와 유교문화를 절대적 선으로 규정짓는 감정적 전통론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를 조우하며 민족적 주체 이념으로서 유교 문화를 복권시키려는 일련의 움직임은 분명히 소중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서구식 근대성의 이념에 동등하게 자리시키기 위하여 유교의 개념들을 현대적으로 환치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중세를 토대로 발생한 유교 이념의 가치가 시공간적 좌표를 달리한 현대에 동일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맹신하는 것은 다분히 이상적이다. 그러나, 근대가 배태시킨 정신사적 공황의 황폐함들. 가족주의의 붕괴와 개체주의적 사회관에서 파급된 인간 소외, 자본의 논리에 민족 문화의 정체성이 함몰되는 작금의 사태에 유교 문화를 포함한 전통적 가치관의 소생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대동(大同) 정신을 통한 공동체 연대의식의 복권, 효경(孝敬) 사상을 통한 세대 단절의 극복, 전통적 공사관(公私觀)에 입각한 지역연고주의의 철폐와 부패 청산 등은 유교 문화의 긍정적 가치관을 현대에 부활시킴으로 인해 기대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복권의 성패가 인문학의 사명과도 맞물려 있음을 주체적으로 성찰해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