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신화(神話)에서 실재(實在)로의 혁명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우리나라에 전국적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통 설화 가운데 ‘아기장수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전승이 존재한다. 지역에 따라 모티프의 배열 방식과 세부적 묘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민중들의 삶을 억누르고 기만하는 폭압적 전제 정치가 지속된다. 민중들은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 힘센 장수를 구원자로 기대한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가난한 촌부의 집에 아기 장수가 태어난다. 아기가 성장하면서 겨드랑이에 돋아난 날개를 보고서 아이의 부모는 아이의 존재를 직감하지만 이내 근심에 휩싸인다. 그리고, 현실의 전복을 향한 이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기 장수는 겨드랑이의 날개를 거세당한 채 제 부모의 손에 의해 혹은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비극으로 종결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비극적 종결은 다시금 순환하는 구조를 지닌다. 이야기의 비극적 종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에서 분명히 제기되는 한가지 물음은 왜 아이가 전제 정치의 대리자들의 손에 의해 처형되지 않고서 민중의 손에 의해서 살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민중들은 분명 자기네 구원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이 파송한 구원자를 죽여버린다. 어딘지 석연찮은 결말과 모순을 떠안고 있는 이 설화의 모티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 전승의 한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바로 예수와 십자가 사건이 그것이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에 삶의 뿌리마저 드러난 히브리 민중들은 야훼의 약속에 따라 메시야가 강림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한 처녀의 몸을 빌어 메시야는 이 땅에 강림한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메시야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고 삼년 간의 사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비로소 새끼 나귀를 타고 수도에 입성했던 수일이 지나지 않아 고위층 종교 사제들과 민족 지도자들의 송사에 의해 로마 재판정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린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설화와 달리 역사적 실재이며 그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가 잘 아는대로 부활과 승천으로 진행되는 기쁨의 송영이지만 여기까지 떼어놓고 보면 아기장수 설화와 전연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아기장수 설화와 동일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예수는 로마의 전제적 지배체제의 판결 이전에 민중들에 의해서 십자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히브리 민중들은 예수의 날개를 꺽어버릴 기회를 로마 병정으로부터 강탈하고 지금껏 통곡의 벽에서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는가?
월터 윙크의 저작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은 앞서 아기장수 설화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민중의 모순된 행위를 유발시킨 무형의 ‘지배체제’에 대한 고발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폭력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분석, 대중문화와 정치체제 심지어 교회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맹목적 신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시도된다. 그리고, 그러한 숨가뿐 논의의 종착점은 결국 모든 지배체제를 극복하고 -심지어 그 지배체제마저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아- 전 민중/인류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탈지배적 하나님의 통치’로 명명된 새 시대의 완성은 예수의 사역을 원형적 모델로 삼는 ‘비폭력적 정면 대응’ 곧 ‘제3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욱이 ‘제3의 길’이라는 명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월터는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으로부터 완전한 이별을 촉구하며 그것들의 부당함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신약성경 -특히, 산상수훈의 ‘원수사랑’- 을 중심으나라 구축이 작자 자신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닌 역사적 실재로서 창세 때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사실, 나의 비폭력운동에 대한 선행지식은 일천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간디로 대표되는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차치하고서라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찬 러시아의 스킨헤드족, 십자가를 거꾸로 매단 형상의 문양으로 대표되는 60년대 미국의 히피들, 그것은 역사를 구동시켜나가는 하나의 실체라기보다 그저 근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월터의 논의는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읽어내고자 힘찬 약진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들과 맞서싸우기 위한 그의 다채로운 학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과 마주서야 하는 당혹감을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폭력 혹은 억압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방식 혹은 수단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더욱이 우리가 이것이야말로 악에 대처하는 정의롭고 평화적인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방식 전체에 대한 폐기처분을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기에 그 충격은 더욱 격심하다. 심지어 사법체계 자체에 대한 무용론마저 운운하는 저자의 방식은 실로 도전적이다. 그렇듯 비폭력에 의한 평화 구축이라는 상상력을 현실의 장으로 옮겨 놓으려면 결국 십자가의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사라져야 한다. 죽기를 두려워하기에 우리는 폭력을 선택한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도 나의 기성관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이라면 어쩔 것인가?’라는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만일 나의 가족이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면’, ‘만일 나의 국가가 침공을 당했다면’, ‘만일 내 교회 강단이 이단에 의해 훼손되었다면’ 따위의 무수한 경우의 수를 상상해볼 때 결국, 그간의 수고로운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방식으로서 비폭력을 내면화하고자 했던 부단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만일...이라면 어쩔 것인가?’ 라는 리트머스 시험지 앞에 결국 다시금 폭력을 유일한 수단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아의 폭력성과 다시금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월터의 답변은 단호하다.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된다.’ 폭력을 증오하는 우리의 모습은 폭력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참 무서운 논리다. 그러기에 더욱 이 땅에 존재하는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 무한한 증식력을 이겨낼 힘은 오직 예수의 비폭력적 정면 대응 밖에 없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그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말뚝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말뚝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가해진 채찍의 폭압적 고통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삶까지도 구속시킨다. 지배체제 피라미드의 하부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민중들은 이미 폭력의 지배구조 속에서 내면화된 노예근성과 그것에 침윤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자신들에게 찾아온 아기장수와 예수의 날개를 자신들의 손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과연 메시아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과 오랜 세월 권세와 국가가 연출하는 폭력의 지배구조에 동화되어버린 민중에게 있어서는 메시아와 평화를 맞이하는 것마저도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메시아를 공공의 적으로 십자가에 매달고 다시금 지배체제 속으로 굴복해 들어갔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에게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역사가 되풀이 될 일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십자가 죽음이 가져다 준 평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왼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까지 마저 내주고, 겉옷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주는, 오리를 동행하자면 십리까지도 동행해주는 도발적 비폭력의 맞섬을 통해서 폭력을 비폭력으로 무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3년이라는 불충분한 시간 동안 너무도 충분하게 보여주셨다. 단순히, 폭력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라 폭력과 억압을 생산하는 지배체제 전체에 대한 전복의 방법론을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월터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평화와 승리의 기쁨 역시도 초대교회 초반 3세기 이상을 지속시켜나가지 못했다. 예수께서 이미 완성해놓으신 평화의 사역, 마침표 하나만 찍으면 종결되는 그 사역의 마지막을 감당하지 못한 채 인류는 다시금 사탄의 체제아래 굴복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사탄의 체제와 권세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고, 여전히 잔존하는 가부장제, 권위주의, 노예제도, 인종차별, 독재정치로 분화되는 다양한 지배체제의 억압은 교회의 사명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도전적 청사진을 제공한다. 여전히 미국 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이 통학거리에 상관없이 한 학교에 혼합배정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의 상원은 1200만 불법pan>
평화는 결코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코 전쟁의 결과 혹은 보상 또한 아니다. 평화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평화를 이룩하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비폭력이 지닌 역동성을 통해서 증명된다.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에서 탱크 앞에 맨몸으로 행진했던 80년 광주의 봄까지 비폭력의 힘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재로 존재해왔다.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은 책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학술성과 논증적 탁월함과 별개로 나에게는 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한 너무나 솔직한 한편의 고백문으로 읽힌다. 그것은 과연 예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도전적 사명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물음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력으로 맺어진다.
월터의 논의에 대해서 맘속으로 감격하고 기뻐하며 그의 논리에 박수와 동조를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 움틀대는 폭력적 성향을 이겨내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한대로 비폭력을 내면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때로는 무력해보이고 때로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예수의 제3의 길’만이 탈지배적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길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평화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무저항과 비폭력의 예수의 삶을 인정할 때에야 모든 눈물, 사망, 애통, 곡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도래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국사회가 지배체제의 억압에 억눌린채 신음하던 70년대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발언에서 ‘문학’이라는 주어를 ‘비폭력’이라는 주어로 환치시킨 다음 다시금 읽어보았다. ‘비폭력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폭력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지배체제/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고발한다.’ 그렇다. 폭력을 배제시킨 비폭력의 길은 당장의 혁명적 전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장의 배고픈 거지를 구할 힘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배고픈 거지가 존재하는 지배체제 자체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만천하에 폭력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며 붕괴시킬 기반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결국 한 시대의 문제가 아닌 영원의 문제를 돌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후에야 우리는 찬송가 469장이 노래하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의 진정한 감격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