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서 안에 갇혀 있으면 삶을 관조할 수가 없다. 질서를 구획하는 기준을 따라 마치 경주마처럼 그저 숨 가쁘게 앞으로 내달릴 뿐이다. 그렇게 쌓은 부, 그렇게 획득한 지위, 그렇게 행사하는 권력으로 사회적 존경을 얻게 될 리 만무하다. 세상을 끌어안는 정신의 풍요로움은 증발해 버린 꼴인데, 그 위태로운 도박과도 같은 삶이 하나의 표상으로 우뚝 서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삶은 충실하게 살 일이되 삶과의 거리를 확보하여 느슨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인)문학은 이러한 여유로부터 시작한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그랬다.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가. 산처럼 우뚝한 곳에서 보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시시비비의 조그만 차이를 넓게 파악하여 감싸 안을 수 있으며, 이로써 뭇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한 여유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仁)을 지향하는 사람의 산을 닮고자 하는 지향이 요산(樂山)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촐라체》(푸른숲)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가령 “정상에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정상은 허공을 이길 수 없다”(111쪽)라는 구절을 보라. 인간이 삶을 살아내는 과정은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아서 텅 비어있는 근거를 확인하고 거기에 의미를 덧입히는 행위와 닮아 있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죽음, 그러니까 허공(虛空)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허공과 맞대면하면서 각자가 나름의 의미를 찾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마지막까지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있기는 하다). 결국 내려올 산임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오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가 박범신이 ‘작가의 말’을 쓰면서 제목을 〈여기, 존재의 나팔소리를 들어보라〉라고 붙일 수 있었던 근거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내야 한다.

자, 여기 촐라체 빙벽을 오르는 형제가 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자씨만한 의심을 키우니 순간 어찌할 수 없는 원망과 적의는 거대한 폭풍우처럼 몰아친다. 원망과 적의가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 그를 위해서 ‘나’ 하나의 목숨을 버려도 좋을 것 같다. 어릴 적 은폐되었던 기억이 갑자기 찾아들기도 한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정신분석학의 명제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뒤섞인다. 의혹과 믿음이 뒤죽박죽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데 엉킨 채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절박하게 이끌면서도 하나의 문장으로 간결하게 정리하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만년빙하층에서의 잠은 말로만 잠일 뿐 꿈과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전혀 없다. 어디가 수면 속이고 어디가 수면 밖인지 구별되지 않는 어둠 속 터널이다.”(165쪽) 이런 방식은 소설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인 배다른 형제 ‘상교’와 ‘영민’의 관계에서 작위적인 측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촐라체》를 뒤덮고 있는 긴장감은 그러한 부분을 충분히 극복하고 있다. 일인 대 만인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 우리 사회의 야만이 답답한가. 그렇다면 우선 《촐라체》에 오르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일 성싶다. 거기에서 우선 물어보라. 나는 과연 무엇인가.

 

최근 신인 작가들의 장편을 읽어보면 각 작품의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가령 제13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은 김진규의 《달을 먹다》(문학동네)를 보면, 조선시대의 풍속을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측면에서는 훌륭하지만, 다 읽고 나면 도대체 남는 것이 없다. 장편에 들어맞는 서사의 축을 확보하지 못한 까닭이다. 김사과가 발표한 《미나》(창비)의 경우, 자기 세대의 세계를 깊이 있는 사유로 파헤치고 있다는 장점이 두드러지지만, 소설의 의장을 걸치지 못한 상태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날 것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읽을 만한 신예들의 작품은 대략 그러했다. 그래서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 지켜보자’는 것이 신인 작가들에 대한 나의 기본 입장이다.

《판타스틱 개미지옥》(문학수첩)을 읽었을 때 작가 서유미에 관한 느낌 역시 비슷했다. 백화점을 대상으로 택해 소비자본주의시대의 욕망을 그려 나간다는 점에서 서유미의 작가의식은 일단 진중했다. 욕망의 단면들을 파헤치는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각각의 면면들을 하나의 큰 줄기로 묶어내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이 부분만 보완한다면 꽤 기대를 걸 만한 작가로 성장하리라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판다스틱 개미지옥》은 제5회 문학수첩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서유미라는 작가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었다.얼마 후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의 수상자가 알려졌다. 《판타스틱 개미지옥》의 작가 서유미였다. 이번에 응모한 작품은 《쿨하게 한걸음》. 2007년에 굵직한 두 개의 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하였으니 퍽 화려한 출발인 셈이다.

《쿨하게 한걸음》에는 30대 초반 여성의 심리가 흥미진진하게 드러난다. 현재 상황에서 보았을 때 20대 후반, 30대 초반 여성들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제도적인 방어막이 되어준 대학은 이제 졸업한 상태다. 어떻게든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여야 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한편, 어렵게 취직을 하였어도 자신의 능력에 맞춤한 자리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결혼 또한 그러하다. 사회적인 활동은 자아의 확인 과정이 될 수 있지만, 결혼을 선택하는 순간 그러한 부분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결혼대상으로 인해 자기 삶의 큰 부분까지 결정되지 않나.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30대 초반 여성은 자신의 지나간 삶을 진중하게 반추하게 된다.

《쿨하게 한걸음》은 이러한 심리를 흡입력 있게 쫓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세대가 느끼는 위기감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비루해진 표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기도 한다. 직장에서 퇴직한 쓸쓸한 아버지, 갱년기를 맞이한 신경질적인 어머니도 실상은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공감(共感)이 흐른다는 말. 작중 인물들 사이에 유통하는 공감은, 《판타스틱 개미지옥》의 한계를 뛰어넘어, 《쿨하게 한걸음》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서유미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커지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니 작가가 표하고 있는 30대 초반 여성의 위기감에 나 또한 공감을 표하며 글을 맺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한손에 저녁거리를 든 채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퇴근 후 수업을 들으러 가는 주경야독파들로 인해 학원가는 발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들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히 시간을 쪼개고 욕망을 유보하며 버티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았다. 잠시 현실을 망각했던 철없는 백수는 순식간에 불안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저 무리에 끼어서 함께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96쪽)      

 

우리는 두 개의 세계를 살아나간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헤르만 헤세는 밝은 세계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 엄격한 가풍, 광명과 맑은 공기들이었으며,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사롭고 청결했으며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세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 세계에는 도살장도 있고 형무소도 있었다. 곤드레만드레가 된 주정뱅이가 있는가 하면 아낙네들의 귀 따가운 입씨름도 있었다. 그밖에도 새끼를 낳는 암소와 거꾸러진 말들, 그리고 가택 침입과 살인과 자살의 이야기가 너절하게 넘나드는 곳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 개의 세계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부모의 보살핌 아래 밝은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존재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 자신을 휘감아오는 혼란과 고통이 더 없이 무겁더라도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그 무게를 기꺼이 감내해내야만 한다. 성장소설은 바로 그 과정을 대상으로 삼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널리 알려진 《데미안》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성장소설의 핵심을 명쾌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이명랑의 《날라리 on the pink》는 여상에 다니는 소녀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면모는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네들의 인생은 벌써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가는 곳은 달라도 하는 일은 하나!’라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상, 어느 쪽으로든 확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반에서 몇 등을 하든지, 무슨 자격증을 몇 개나 보유하고 있든지 간에, 대기업에 들어가든 통조림 가게에 들어가든, 결국은 경리 일을 하게 될 우리의 미래도 오늘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125)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어두운 세계에 버려져 있으며,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는 봉쇄된 양상이니 고민에 값할만한 의식의 성장이 동반하기는 애초부터 글러먹었다고 판단해야 온당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적 인식은 대체 어디서 기원하는가. 학벌로 직조된 우리 사회의 현실에 뿌리가 있다. ‘여상’이란 위계적인 학벌 체계에서 가장 아랫자리가 아닌가. 교복 입은 그네들을 바라보는 사회인들의 시선에는 무시와 경멸이 녹아있고, 그들을 가리키는 교사들조차 교복을 벗고 사고 치라고 당부할 정도이다. 학벌의 재편과정에 경제적인 불평등이 개입하는 당연지사, 경제적인 문제 혹은 가정폭력, 근친의 성폭행 등이 여기에 포개지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며 시도한 가출이 결국 엄마가 걸었던 길의 반복임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각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극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날라리 on the pink》는 날렵하게 읽힌다. 십대의 자존심으로 빚어지는 ‘보다/보여주다’의 긴장이 엉뚱한 사건을 빚어내기도 하고,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네들의 삶과 인식이 발랄함을 덧입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써내려가는 이명랑 특유의 재치 있는 입심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아마 성실한 취재에 근거한 사건의 재구성이 생동감을 확보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