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각각의 언어에는 나름의 역사성이 깃들어 있다. 그런 까닭에 생활세계의 역사가 급격하게 요동칠 때 언어 또한 상당한 폭으로 개념의 굴절을 겪게 마련이다. 예컨대 문학에 대한 재래의 관념을 청산하기 위하여 이광수는 1916년 『조선일보』에 「文學이란 何오」를 발표하였다. 이렇게 재규정된 근대적인 ‘문학’은 이전의 ‘문학’과 현격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의 분가꾸[文學]를 거쳐 수용된 서구의 ‘Literature’를 모범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광수의 ‘문학’이 서구의 ‘Literature’에 들어맞는가도 의문이다. 새로운 개념과 전통적 사고 사이의 긴장은 이광수의 주체적 의지에 반하여 근대적인 ‘문학’이란 용어 내부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긴장은 완고한 규정에 균열을 내면서 빈틈(여백)으로 우리 앞에 귀환한다. 그래서 언어의 역사성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근대의 한계에 직면하여 반성과 모색을 전개할 때 이러한 문제는 중요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서구의 반성을 그대로 모방하여 유행처럼 펼쳐나가는 반성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깃들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색 또한 방법론의 이식에 전적으로 기대는 양상인 까닭에 이 땅의 현실에 제대로 들어맞을 리 없다. 사태를 재현(再現)하는 언어는 항상 현실보다 모자라거나 넘친다. 거기서 빚어지는 긴장을, 그리고 긴장의 역사를 염두에 두지 못한다면 논의는 공허해지는 한편 구체적인 맥락을 왜곡하기 십상이다.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의 『근대계몽기 지식의 굴절과 현실적 심화』(소명출판, 2007)는 바로 그런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매일신보』를 분석하면서 용어의 기원과 맥락을 따지고 있는 것. 가령 권보드래 교수(동국대)의 「근대 초기 ‘민족’ 개념의 변화」를 보자. ① 일제강점기와 이후의 역사를 통해 ‘국가’ 및 ‘국민’을 비판하는 의미로 ‘민족’을 발전시켜온 한국의 상황은 ② ‘네이션’에서 국민=민족의 일체화된 감각을 읽어내는 영국, 프랑스의 정치 민족주의(political nationalism)와 ③ 문화적 민족을 토대로 해서 근대국가의 체제, 인식에 접근해간 독일의 문화 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의 틀로 수렴되지 않는다.

박태호 교수(서울산업대)는 「『대한매일신보』에서 역사적 시간의 개념」에서 “국민이나 민족이 모두 nation이라는 한 단어의 번역이지만, 그것이 역사의 법칙대로 발전해주지 않은 식민지 직전의 나라에서 번역되어야 했던 두 가지 방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민족은 단일한 핏줄로 표상되는 순수성의 관념, 과거의 위대한 역사를 다시 미래에 구현할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인 반면, “국민은 그와 반대로 현재의 퇴보나 퇴락을 말하면서 정신을 차려 합심하여 그러한 상태를 넘어서고자 촉구하는, 그래서 책임이나 권리, 의무 등의 단어들과 계열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 위에서 한국문학사의 몇 장면에 대하여 흥미로운 착안을 펼쳐나갈 근거를 얻게 된다. 예컨대 ‘민족주의문학’과 변별되는 ‘민족문학’의 성립은 국가와 민족의 대립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는 점. 이 순간 민족은 근대국가들 간의 대립적 질서를 극복하는 단위로 작동한다. 민족문학은 각 민족(국가)의 역사와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상호공존의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근대의 양면으로 파악하고,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일제강점기 김동리의 仙사상도 이해가 간편해진다. 그가 설정했던 韓民族의 위대성이란 서구 근대의 대립적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데 놓여있었던 것. 그리고 해방 이후 이태준의 선택은 국가를 뛰어넘은 민족들 간의 공존 가능성을 자본주의 대신 사회주의 질서 속에서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다른 연구들도 이처럼 착상의 흥미로운 단초들을 제공한다. 문명, 개인, 역사, 국가, 병리학, 영웅 담론 등은 그 목록들이다. 따라서 『근대계몽기 지식의 굴절과 현실적 심화』의 장점이라면 한국 근대의 기원을 둘러싼 중요한 용어들을 고고학, 계보학적으로 파헤쳐서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중국, 독일의 양상과 비교함으로써 그러한 용어의 특수성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면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