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일어났던 허구다. 반면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
- 앙드레 지드
몇 달간 니체의 저작들을 읽다 보니 후유증이 보통이 아니다. 무슨 책을 읽던 그 안에서 니체를 발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니체의 저작들을 읽는 동안 그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다른 책들은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니체의 책들은 어느 하나도 만만하지 않았다. 각 시기에 따라, 각각의 책들마다 문체도 다르고 담고 있는 내용이나 형식도 달랐다. 특히 잠언 형식의 책들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어서 머리를 쥐어짜며 읽고 또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으론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혼자 공부했다면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동료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니체를 읽을 수 있었다.
처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을 때만 해도 이 책에서 니체사상과 관련된 어떤 징후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기발한 상상력과 뻔뻔스러울 정도의 황당한 유머로 가득한 소설, <창문 넘어..>에서 니체 사상을 떠올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주인공 알란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강자, 귀족 도덕을 구현하는 강자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니체의 저작들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읽어야 했을 때 썩 내키지 않았다. 평소에도 개그나 예능 프로그램를 즐기지 않는다. 그저 웃고 말자는 영화나 드라마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냥 재미있고 유쾌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상엔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들로 가득하고 늘 시간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내 취향에 맞는 책들만 읽지는 않지만, 이 책처럼 마지 못해 읽어야 하는 책의 경우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한동안 인터넷 서점의 배너를 온통 장식했던 광고문안 그대로였다. 100세를 맞이한 어느 노인이 100세 생일 축하 파티가 열리는 날, 슬리퍼 차림으로 요양원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했다.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삐그덕거리는 관절 때문에 비틀거리고 절룩거리면서도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탄 100세의 노인, 알란이 주인공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불한당같은 어느 청년이 불가피하게 자신에게 맡긴 의문의 트렁크까지 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이제 겨우 이야기의 시작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웃고 즐기며 이 책을 읽었다는 지인이 말과는 달리 난 도통 이 책을 즐길 수가 없었다. 과연 앞으로 재미있어질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계속 읽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트렁크를 찾아 쫗아 온 갱단원을 우여곡절 끝에,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우연과 실수로 죽게 만들고 그 시체를 은폐하기 위해 이어지는 알란과 그와 의기투합한 노인이 벌이는 일련의 행각들을 읽다가 그만 울화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라고 이게 재미있다고? 도대체 뭐가 재미있고 유쾌하다는 거지?' 혼잣말로 분통을 터뜨리고 책을 집어 던졌다. 그러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보기엔 아무 의미 없고 개연성도 없는 아이들 장난처럼 여겨지는 이 이야기를 작가는 도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풀어가고 맺을 지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오기같은 감정이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을 것 같은, 두서없는 이야기와 사건들이 장황하게 펼쳐졌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과 더불어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건들이 줄곧 전개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문 우연과 반전이 이어졌다. 알란이 회상하는 그의 젊은 시절, 요양원에 갇히기 전까지 일생 이야기에 이르면 급기야 대륙을 넘나드는 세계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상상 이상으로 확장되는 이야기의 황당함에 결국 웃고 말았다. 우리의 숨은 영웅, 알란의 놀라운 활약은 전 세계를 무대로 내노라하는 역사적인 인물들과의 기가막힌 인연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세상에서 벌어졌던 매우 중요한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이쯤에서 아주 오래된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영화에서처럼 우리의 주인공 알란 역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해서 의도치않은 활약을 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세계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할 경우, 아인슈타인에게 정말로 외모는 똑같이 물려 받았으나 두뇌의 용량은 턱없이 부족하게 이어받은 이복형제가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누군가가 네이버 지식인에게 아인슈타인에게 이복동생이 있었는지 검색할지도 몰라 미리 밝히지만 이 부분은 완전 허구이다. 세계사를 뒤적이며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근거가 있는 사실인지를 찾다보면 재미가 반감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황당하지만 매우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며 이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를 궁금해 하며 검색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아무튼 '재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자면, 결국 난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뭐가 재미있고 유쾌하다는 거지?' 하고 분통을 터뜨린 직후, '난 왜 이 책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작가는 비록 악당일지라도 사람의 죽음을 왜 이렇게 하찮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파리 한 마리를 잡아 없애는 것처럼 가볍고 우스꽝스럽게 희화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도 했었다. 왜 나는 허구 속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불편해하며 하나하나 따지고 싶어하는 것일까? 경직된 사고, 정형화된 도덕과 가치의 틀에 갇힌 내 모습이 보였다. 허구의 세계,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채, 힘을 빼지 못하고 뭔가 '그래야만 하는 것'에 얽매인 내 모습이 보였다. 유쾌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읽지 못할 정도로 난, 자유롭지 못했다. 힘을 빼야만 했다.
본격적인 알란의 일생이 펼쳐지며 전 대륙을 넘나드는 그의 활약상을 읽다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작가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위트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나처럼 매사를 매우 심각하고 무겁게 바라보는 경직된 사고와 가치 체계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란이라는 인물을 통해 결과적으로 운명이나 필연처럼 여겨지는 역사적 사건도 실상은 매우 사소하거나 하찮은 동기에서부터 촉발된 것, 그저 스치듯 일어난 우연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즐기지 못하는 삶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무, 허무주의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삶이란 늘 심각하고 무겁고 진지한 무엇, 힘을 잔뜩 주고 투쟁하듯 이루어가는 무엇이 아니다. 삶이란 살아가는 그 현장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소한 우연과 순간들의 총합이다. 그저 찰나의 순간에 빛을 발하고 스러지는 무수한 불꽃들이 명멸하며 빚어낸 아름다움처럼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능동적인 행동 그 자체가 곧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과 공간을 놓치면 금세 사라지지지만 연속적으로 빛을 내고 스러지는 수많은 불꽃들이 만들어낸 형상은 불꽃들이 모두 사라진 후 찾아온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그 잔상을 남기는 것처럼 삶도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말이다.
알란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의 유쾌한 버전, 코믹버전이라는 생각을 했다. 포레스트 검프도 조르바도 항상 그 순간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고 그 현실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삶의 향한 그들의 역동성은 그들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삶의 중심에 당당하게 서있던 그들의 모습은 의도치않은 많은 변화들을 이끌어 냈었다.
알란 역시 그랬다. 그는 조르바처럼 삶의 가장 깊은 심연의 고통도, 가장 완벽한 기쁨의 순간에도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에게 가장 좋음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덕이나 가치, 신념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늘 자신이 할 수 있고 기꺼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에게는 이념도 사상도 부도 쾌락도 자기자신이 주인인 삶 그 자체를 대신할 진리가, 가치가 아니었다. 고통도 그에겐 두렵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고통도 쾌락도 그에겐 삶을 구성하는 요건일 뿐이었다. 고통이 회피하거나 수치스러워 해야 할 악이 아니듯 쾌락이나 행복이 그 자체로 추구해야할 절대 가치나 선이 아니었다. 그에겐 모두 다 현실 그대로의 삶 안에 녹아있는 요소들이었을 뿐이다. 그는 마치 그릇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물처럼 현실의 조건에 따라 반응하고 수용하며 끊임없이 움직였다.
니체는 말했다, 주인 도덕, 즉 고귀한 도덕, 귀족의 도덕은 다른 누구의 가치나 명령에 의존하지 않는 도덕이라고. 그에겐 오직 이것이 내게 좋음인가 아닌가만이 선택과 행위의 준거일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예 도덕은 주어진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동한다. 외부의 가치에 의해 '너는 그래야만 한다'는 명령이 먼저 주어진다. 노예들은 그 명령에 대한 선택을 할 뿐이다. 예 혹은 아니오라고. 노예 도덕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기의 좋음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힘이나 용기가 없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 규범이나 선악의 판단, 신의 의지나 명령, ' 너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명령이 주어지면 그것에 대해 예하고 긍정하거나 아니오라고 부정할 수 있다. 노예 도덕의 경우, 예나 아니오 둘다 긍정이 될 수 없다. 긍정하는 경우에도 그의 선택은 그의 좋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좋음에서 나오지 않는 명령은 그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본능, 그 자신의 어떠함을 거스르는 명령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늘 예라고 말한 그의 이성과 자신의 어떠함을 지키려는 본능이 갈등하고 고뇌한다. 이성은 본능을 그의 통제 하에 굴복시키려 하지만 본능은 쉽사리 통제되지 않는다. 그때 양심의 가책이 등장한다. 양심의 가책은 니체에 의하면 자기학대이며 가장 큰 질병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구와 그렇지 못하는 자신 사이에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스스로를 징벌하는 상태가 바로 양심의 가책인 것이다. 그 고통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게 하는 것이 절대 진리를 표방하는 지금까지 도덕이며 진리라고 외쳐온 형이상학적 철학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에 아니오 라고 말하는 경우에도 노예도덕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에게 주어진 A 대신 B를 선택한 것이 독립적인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B 를 선택한 그 역시 자신의 좋음에 따라 B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저 A의 부정이었기 때문에 역시 자신이 B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세상이나 사람을 향한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에겐 자신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 역시 자신의 고통 결핍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하는 복수의 마음을 품고 있다. 야만의 시대와 달리 현대에서는 자신의 복수를 직접 할 수 없다. 복수할 힘을 지니지 못한 그는 상상 속에서 복수를 꿈꾸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 독을 퍼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국 예이건 아니오건 둘다 노예도덕을 지닌 사람을 병들게 한다.
알란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나 결과를 떠넘길 대상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삶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에게 좋음 그 자체가 진리였다. 선택과 행위의 결과가 의도치 않은 실패나 성공을 가져 왔을 때도, 그래서 고통이나 행복이 주어질 때도 그는 그 결과에 매달리지 않았다.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어깨를 의쓱하고 잊으면 그뿐이다. 삶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붙잡을 수 없다. 늘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후회나 자책을 위한 시간이 없다. 멈춤은 그대로 무너짐이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역동적었다. 따라서 100세가 되었건 200세가 되었건 삶이 끝나지 않는 한 멈출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창문을 넘어 탈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조르바가 말한 것처럼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 멈추게 되어 있다. 멈추는 그 순간까지 우린 최선을 다할 뿐이지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아댈 필요가 없다.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고개길이건 오르막이건 급회전이 필요한 길이건 오직 그 길위를 달리는 일에만 집중해야 할 일이다. 저 모퉁이를 돌아 다시 평탄하고 넓은 길을 만날 지, 아니면 더 비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만날 지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삶을 즐기며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끝까지 달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은 웃음이다. 알란도 니체도 조르바도 그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의 삶이 어떤지 판단하려면 그의 걸음걸이를 보라고 니체는 말했다. 춤추듯 가벼운 걸음, 유쾌한 웃음 소리야말로 그가 삶에 지혜로운 자, 자유로운 사람의 증거라고 말이다. 발목에 족쇄를 채운 사람의 걸음걸이는 느리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의 얼굴은 시름과 피로로 일그러진다. 삶의 피로와 무게에 지친 사람은 춤을 추거나 웃을 수 없다. 경직된 사람, 삶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력의 영에 의해 자꾸만 땅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이 되지 않는 법, 중력의 영에 거스르며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웃는 법, 춤 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니체의 말했다. 알란의 모습이다.
지금 여기 있음이 삶이다. '지금 여기' 그 순간의 이어짐이 결국 삶의 시작이고 끝이고 전부라는 생각을 되새긴다. 삶은 말그대로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