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라는 고미숙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고미숙 작가의 톡톡 튀고 점잖을 빼지 않는 유쾌한 문체 덕에 무척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그때 고미숙 작가를 통해 만난 연암은 선뜻 이런 사람이다 라고 정리하기가 힘든 낯설고 어색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 무렵 <정약용의 형제들1,2>, <다산의 재발견>을 통해 알게 된 다산 정약용에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던 때여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삶을 바꾼 만남>, 그리고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흑산도에서 작성한 <현산어보>과 같은 책들을 읽는 동안 연암은 여전히 관심밖에 있었다.

하지만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를 통해 홍대용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시 그의 절친이었던 연암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이 책, 소설 연암 박지원은 어디선가 한 번씩 들어 봄직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백성들의 안팍의 삶을 이롭게 해 주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어진 목민관으로서의 연암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이 책에는 백성을 위한 이용과 후생 뒤에 정덕이 있다고 믿었던 연암이 백성들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해 한 고을을 지혜롭게 경영하고 나라의 녹봉을 받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하는 모습이 쉽고 재미있게 펼쳐진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어서 <열하일기>와는 또 다른 모습의 연암을 만날 수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연암을 소개할 때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다.  

연암이 나날이 기울어 가는 가세를  더 이상 나몰라 할 수 없어서 떠밀리듯 벼슬길에 나선 것이 그의 나이 쉰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벼슬길에 나서 이런 저런 자리를 오가다가 벼슬길에 나선 지 5년만에 안의 현감에 부임하게 된다. 이때는 이미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형수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처음에는 계속 벼슬길에 나서는 것에 대해 망설임도 있었으나 일찍이 뜻을 같이 했던 지기들과 학문을 하며 품었던 마음을 기억하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열하일기에도 등장하는 창대와 장복만을 대동하고 안의로 떠난 연암은 그곳에서 자기 잇속만 차리는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데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이 소설의 시점이 연암 자신의 일인칭 시점이다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들과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연암의 인물됨과 사상을 담으려는 작가의 시도가 다소 부자연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고 작은 일화들이 연암의 인물됨을 자연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다.

연암은 본래 사람의 사람됨을 보고 사람을 사귈 뿐 그사람의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처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호방하고 격의없는 사람이었다. 타인을 향해서는 세상의 가치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졌으며 매사에 옳고 그름, 이편저편의 분별에 얽매이지 않는 호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늘 엄격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여 적용하였으며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킴에 있어서는 공명정대하고 공평무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뜻은 그 누구도 쉽게 꺽을 수 없는 높은 기개를 가졌었다.

이 책을 통해 연암의 면모를 접하고 보니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연암에 대한 존경과 연모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연암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세상의 판단이나 가치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 세상에서 말하는 부와 명예에 유혹되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되 평생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배움을 향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사람, 평생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의 우정을 가슴 깊이 간직했던 사람, 일찍 세상을 떠난 지기와 아내를 향한 신의와 순정을 지켰던 로맨시스트였던 사람, 연암. 그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다행히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라는 제목으로 고미숙과 그의 동료들이 번역한 열하일기와 정민 교수의 연암론에 해당하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가 연암에게 한걸음 다가서고자 하는 나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 두 책을 통해 만나게 될 연암, 기대된다.  

제대로 된 영화를 본 기억은 없는, 그저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영화에서 이런 저런 우스꽝스런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코미디 배우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관심은 전혀 없던 스티브 마틴이 쓴 소설, 레이시이야기를 읽었다.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배우 스티브 마틴은 실제로는 이미 몇 편의 영화 대본과 한 권의 소설을 발표한 어엿한 작가였으며 폴 매카트니와 딕시 칙스와 공연할 정도로 수준높은 뮤지션이라고 한다. 게다가 연예계에서 엘튼 존과 더불어 소문난 미술수집가이다. 

<레이시 이야기는>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특히 미술수집가로서의 작가 자신의 취향과 경험을 잘 살려낸 이야기로서 소더비, 첼시 그리고 업타운, 다운타운 갤러리 들을 배경으로 미술계 딜러들과 수집가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다루고 있었다. 시간적으로는 1993년부터 2009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동안의 중요한 사건과 상황들이 미술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어 레이시라는 한 인물이 20년간 펼친 도전과 모험, 성장과 실패와 동시에 그녀가 속해 있던 뉴욕 미술계의 격변과 성장 그리고 몰락 역시 한 맥락 안에서 흥미롭게 다루어지고 었다.

미술계 내부의 사정을 누구보다 휜히 꽤뚫고 있는 저자의 경험 덕에 이 소설이 나온 후 작가는 미술계로부터 '사악하고 집요하고 유쾌한 내부고발자'라는 별칭도 얻었다고 한다.

미술계를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경매회사 소더비와 첼시, 그리고 딜러들과 수집가들 사이의 기묘한 공생과 생존경쟁, 그리고 미술품을 둘러싼 탐욕스런 돈의 흐름이 실제로 거래되는 작품들의 사진과 함께 화려하게 펼쳐 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공신화를 꿈꾸는 한 여성의 무모할 정도의 도전과 모험은 참으로 자극적이었고 흥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470 페이지 달하는 제법 긴 소설을 나름 열심히 끝까지 읽은 후에 내게 남은 것은 약간 씁쓸하고 불쾌한 뒷맛이었다.

여주인공 레이시의 화려한 남성편력이 성공을 위한 댓가는 물론 아니었다고 작가는 작중화자 대니얼의 입을 통해 줄곧 강조하고 있지만, 그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화를 가능하게 한 미국 사회의 개인의 성공과 욕망에 대해 겉으로는 드러나는 과장된 관대함이나 실체야 어떻든 미국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빛나는 가치에 대해 내 개인의 어떤 윤리적인 잣대나 어설픈 도덕철학을 내세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생각은 없다.

레이시에게는 자신의 욕망과 성취를 위해 무한한 열정과 집중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떠 올리게 하는 점도 있었다. 비록 완벽히 성취되지 못했지만 성취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그것이 정당한 방법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그들 모두에게 성공으로 향하는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레이시 역시 자신의 욕망과 성취를 위한 노력과 과정에서 한점 부끄러움도 주저함도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당당했다는 점에서 크게 보자면 레이시도 개츠비나 스칼렛과도 같은 인물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도 봐 줄 수 있겠다. 하지만 개츠비나 스칼렛과 달리 이<레이시 이야기>에서는 레이시라는 인물 어디에도 영혼이 있다는 단서를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공, 성취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를 그토록 달려가게 했던 것, 즉 그녀가 꼭 지켜내고 싶었던 소중한 것이 과연 있기는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점에서 개츠비와 스칼렛에 공감하고 그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레이시를 이해하거나 사랑할 수가 없었다. 사랑은 커녕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마치 단세포 동물처럼 온몸 전체가 충동적이고 즉물적인 욕구충족을 향해서만 반응하는 듯한 레이시를 보며 작가가 뭔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있어서 자신이 만났던 이런저런 여성들로부터 가장 극단적인 속성들만 조합해서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 레이시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공의 인물로만 여겨지는 부자연스러움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불편해서 <레이시 이야기>에서 정작 '레이시의 이야기'에는 몰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니 영화 속의 인물이나 설정 자체가 도저히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도 망각할 수 없었던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었다.

게다가 레이시의 착하지만 멍청한 이성친구 대니얼의 캐릭터는 또 얼마나 한심한 지 모른다. 이 소설의 시작은 친구를 돕는다는 순진한 발상에 빠져 얼결에 레이시에게 말려 들었던 대니얼이 결국 그 일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잊지못할 중대한 실패와 오점을 남긴 뒤, 레이시에 대한 애증과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치료법이자 복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대니얼의 찌질함과 달리 레이시는 그로 인해 자신의 20년간의 삶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어딜가나 기죽지 않을', 매우 쿨한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경마장이나 도박장에 못지 않은 요지경 속과도 같은 뉴욕 미술계나 그 속을 누비고 다니는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나 내게는 참으로 공감하기는 커녕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조차 받아 들이기 힘든 불가해한 세상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나 일생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그런 세상이었다는 점에서 어떻든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행복전도사로 알려져 있던 어떤 분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생전 방송에서 보여주던 그분의 생생하고도 활력넘치는 모습, 빨간색이나 초록색으로 부분 염색을 했던 모습을 기억하던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쉽사리 입을 떼기가 어려웠었다. 그리고 그분의 남편이 혼자 부인을 떠나 보낼 수 없다며 그녀의 죽음을 돕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무겁게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왔고 인생의 결말도 함께 했던 그들의 선택을 단순히 삶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던 어느 불행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이었다고 지나치기에는 내게도 삶은 간단치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D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앞서 말한 행복전도사의 죽음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고르는 그의 아내 도린이 82세 되는 해에 그녀를 위한 이 책을 썼고 이 책이 발간된 후 지난 24년간에 불치병으로 고생한 아내 도린과 함께 삶을 마감했다.

아내 도린이 불치병에 걸린 후 그는 아내를 위해 20년간 일했던 신문사를 떠나 시골로 갔고 그곳에서 24년간 도린을 돌보며 살아왔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도린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말했고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썼지요.(다른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본질이니 그 본질이 없으면 나머지는, 당신이 있기에 중요해 보였던 것들마저도, 모두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앙드레 고르가 이렇게 고백한 것은 그와 아내 도린이 처음 만났던 60년전부터 도린이 그에게 "그녀의 삶 전부와 그녀의 전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에게 남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기를', 그리고 그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에게 온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아내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이토록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온 존재를 내어 주는 이런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D에게 보낸 편지>는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쓸모없는 존재' 였던,  상처받고 방황하던 영혼이 아내 도린과의 사랑으로 인해 자기 삶의 실존적인 전환, 즉 불안한 정체성을 바로잡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과 감사의 헌사이며 유언이었다. 

앙드레 고르는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한 사상가이며 언론이다. 그는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초기 이론가 자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 책에 담긴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냉철하고 지적인 언론인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시켜 온 앙드레의 글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90페이지의 짧은 책 속에 담긴 그의 글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그의 진심에서 우러난 울림은 그 어느 걸작에 못지 않다. 그의 삶과 철학, 사랑이 그 어느 것보다 깊고 진한 여운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니 앙드레와 도린의 흑백사진이 눈이 들어 온다. 문득 눈 앞이 흐려진다. 이 사진과 함께 책 표지를 장식한 두 사람의 젊은 날의 사진이 겹쳐 진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 온 그들의 겉모습은 세월에 따라 변했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완성시킨 두사람의 영혼은 여전히 아름답다. 생기로 가득한 젊은 날의 도린의 밝고 화사한 미소와 조용하고 지적인 앙드레의 수줍은 미소는 세월을 비껴가고 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2006년 3월 21~ 6월 6일 "

 

그리고 2007년 9월 22일 그들은 시골마을 정든 집에서 마치 잠자듯 침대에 나란히 누워 주사를 맞은 뒤 오랜 삶을 자유의지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