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영국땅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어느날 노부부는 자신들의 사는 마을사람들이 기억을 자꾸 잊어만 간다는 문제의식을 느낀다.
이에 마을을 벗어나 그 원인을 찾고 잊고 있던 아들도 찾으러 다니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안개.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바로 어제의 일도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것은 암룡의 입김이었다.
노인 액슬은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을 궁금해 하면서 동시에
그 기억이 되살아나면 밝혀질 진실들에 대한 두려움에 불안해 한다.
기억을 잊는 사람들이라 횡설수설 지루한 400페이지 가량을 읽어내느라 인내심이 필요했다.
요즘 판타지 소설 중 워낙 뛰어난 작품들이 많으니까 ...
그래도 작가가 이 이야기의 끝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확인은 하고 싶었다.
망각.
결국 이 기억이라는 것은 개인의 일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거시적으로 집단기억, 역사에 대한 망각을 언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브리튼족과 침입한 색슨족이 평화협정으로 잘 지내다가 전쟁으로 브리튼족의 색슨족 학살이 벌어졌던 일이 있었고,
암룡의 입김으로 그러했던 기억들을 잊고 가장된 평화, 사상누각 위에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어렵고, 알게 됨으로써 또 다른 증오를 낳고 은원의 고리가 이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도
진실 위에 서야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작가가 어떠한 사건을 염두해 두고 쓴 글인지는 모르지만
일본계 저자이다보니 한국독자로서는 일제 과거 만행에 대한 것과 현재의 한일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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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젠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부탁하건대 이 땅을 떠나요.
케리그 (암룡)가 조금만 더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요. 한두 계절일 거요, 기껏해야 그 정도 밖에 살지 못해요.
하지만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거요. 이 용이 간신히 목숨 줄에 매달려 있는 걸 봐요!
자비를 베풀어 이 땅을 그냥 두고 떠나요.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가웨인 경, 내 대답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이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야 해요."
4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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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는 오로지 우리의 소중한 기억만을 생각하면서 케리그의 종말을 간절히 원했지요.
하지만 이제 이 땅 곳곳에 어떤 오래된 증오들이 되살아날지 모르는 일이에요.
앞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어떻게 지켜나갈지 하느님이 방법을 찾아주기를 바라야겠지만,
이제까지 관습과 의심은 늘 사람들을 갈라놓았으니까요.
재빠르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토지와 정복을 향한 새로운 욕망과 해묵은 불만을 물 흐르듯 연결시킬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오?"
"그걸 두려워하는 게 맞는 걸까요?"
"고이 잘 묻혀 있던 거인이 이제 깨어나고 있어요.
분명 곧 거인이 일어날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의 우호적인 유대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한낱 작은 꽃줄기로 만든 매듭에 불과했다는 게 증명될 겁니다.
남자들은 밤마다 이웃 마을의 집을 불태우고, 새벽이면 나무에 아이들의 목이 매달리고, 며칠 동안 강을 떠내려 오느라 퉁퉁 불어터진 시체들로 강에는 악취가 진동할 거예요.
군대가 이동하는 동안에도 복수를 향한 갈망과 분노로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겠지요.
당신네 브리튼족 입장에서는 불덩이가 자기들을 향해 굴러오는 거예요.
도망가거나 아니면 죽을 겁니다. 이 지역 저 지역이 새로운 땅, 색슨족의 땅이 되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언덕을 돌아다니는 양 떼처럼 당신네 종족이 이곳에 살았던 시간의 흔적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거예요."
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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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사라져서 기뻐요?"
"이 땅에 끔찍한 일을 불러올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로서는 때맞춰 안개가 사라져주었어요."
"난 계속 궁금했어요, 공주. 만일 안개가 그처럼 우리에게서 기억을 빼앗지 않았다면 그 세월들을 지내는 동안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 강해질 수는 없었겠지요?
아마 안개 덕분에 오래된 상처가 아물 수 있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