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께서는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책을 읽고 싶으시지만 이젠 잘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한다고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어느날, 할머니께서 내게 연인 서태후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다. 정말 재밌다고,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지만 난 왠지 이 책에 정이 가지 않아 몇번씩 읽기를 그만두었다. 항상 집어들지는 않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봤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할머니의 안목은 탁월하신거였다. 이 책을 집어들고 난 한 여인의 삶을 보았다. 화려하지만 언제나 고독할수밖에 없는 삶.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정말 지독하게 엄습해오는 외로움을 안고 가는 삶. 연인 서태후는 내게 역사 속에 있는 화려한 존재가 아니라, 화려함 뒤에 감쳐진 불행한 이면을 가진 한 여인일 뿐이었다.
내가 서태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역사의 기록뿐이었다. 후궁들을 시기해 코와 귀를 잘라 젓갈을 만들었다고 얼핏 들었었던 나는 역시나 무서운 서태후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긴, 피튀기는 결투가 벌어지는 황궁에서 그만한 배짱과 카리스마가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나름대로 상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지는 서태후는 너무나도 외로운 존재였다. 사랑을 버리고 황후가 되기를 선택한 그녀. 처음에 이런 선택을 한 그녀를 보고 언젠간 후회하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는데 너무나도 아픈 것이어서 그녀가 시간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녀가 사랑 대신 택한 황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사랑을 원했다. 사랑했지만 더 이상 바라볼수 밖에 없는 남자에게서, 이젠 자신을 멀리하고 황후만을 사랑하는 태자에게서도 언제나 사랑을 바랬었다. 사랑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원하는 존재이자 가장 잔인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 책은 서태후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다루었다. 그래서 잔인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받지만 서태후는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가질 수 없는 것. 사랑을 가질 수 없다면 줄 수도 없다. 그녀가 속으로 울부짖었을 그 수많은 시간들이 그녀를 얼마나 옥죄어 왔는지 나도 느낄수 있었다. 역사는 서태후를 얻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잃었다.

이런, 털이라니! 책 제목을 보고 웃음을 지었었던 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상상했다가 조금 당황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책장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주인공에게 그렇게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을지는 몰랐다.
이미 시장에는 성장소설, 청소년 소설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보는 이에겐 청소년들이 수많은 고난을 헤쳐가며 성장하는 모습이 감동을 주지만 책,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느새 많이 쓰이는 소재가 되어 자칫 지루해질수도 있다는 단점을 안게 되었다. 이렇게 경쟁이 살벌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장 소설이 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눈에 뛰일 만큼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겐 매력이 넘쳤었다.
청소년이고 학생이라면 특히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두발 규제.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대체 이게 공부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희에게도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자유를 달라구요!"라고 말하며 불평을 하지만 긴 머리를 싫어했던 나는 선생님들의 두발 규제 포고령이 내려질때마다 고분고분 따랐었다. 때로는 머리를 자르기 싫다며 버티는 아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었다. 그냥 자르면 목도 시원해지고, 아침에 머리 감기에도 편할텐데 도대체 왜 자르려고 하지 않는걸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도대체 왜 머리를 자르라고 하는 것일까. 이것이 공부와 무슨 상관이며 우리의 행동과는 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생처럼 보여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머리를 꼭 단정히 해야 한다는 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약간의 반항이 들어간 생각도 많이 했다. 
우리의 주인공 일호도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다.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머리 자르기. 일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머리는 학생들의 자존심 같은것이다. 그런 소중한 머리를 자르라는데 반발심이 일어나지 않을 학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조차도 약간의 발톱을 세웠는데.하지만 일호도 나처럼,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선생님들의 무서운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다. 괜히 잘못 걸렸다가 얻어 터지기도 싫고 인생 피곤하게 살기 싫다는, 벌써부터 나태해져 버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만 모범생인 일호가 언젠가부터 두발 규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학교에서 모범생이라 놀림받던 일호가 이런 놀라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체육 선생님의 무차별한 폭력이 일호에게 각성제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그 때부터이다. 단지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체육 선생님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 터지던 애를 일호가 구해준것은 일호의 동정심이 작용했다기보다는 정의감이 작용했으리라. 뜨거운 청소년때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드디어 뻥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소문이 퍼져 버린 일호가 그런 행동을 했으니 모든 선생님들, 학생들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때부터 일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계획을 짜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위인 것이다. 매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한번 해보자!라는 일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과격한 방법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고스란히 내보일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강력히 주장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이런 모든 일을 일호 혼자서 준비했던 것일까? 으레 영화에서 보면 훌륭한 영웅 뒤에는 영웅보다 더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일호에게도 그런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었다. 17년만에 갑자기 나타나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호의 아버지, 두발 규제 시위를 함께 계획했던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깜짝 반전을 일으키며 힘이 되준 할아버지까지. 용기가 없을때, 우물쭈물하며 망설일때 일호에게 힘을 불어넣어준것은 바로 이런 분들이었다. 멋진 도움으로 힘든 시위까지 할 수 있었던 일호가 느낀 기분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대적인 발상이면서 폭력으로까지 변질되버린 두발 규제에 대항하여 아름다운 투쟁을 한 일호를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내게 다시 한번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상을 위해서 싸운다. 얼마나 멋지고 생각만 해도 흥분 되는 일인가. 소수가 다수에게 의견을 피력하는것은 언제나 역사가 보여주듯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이 책에서도 확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자유를 외치는 사람과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들은 항상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오성고는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모든 선생님들이 귀를 막았고 누구도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노력하기는 했지만 일호를 저지하려고만 했지 일호의 진심을 들어주는것에는 아예 모른척했다. 다만 일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던 선생님이라면 학생부장인 오광도 선생님이었는데 결국 목소리를 높여 응원해주지는 못한다. 정말 안타까웠다. 분명히 거대한 벽인 현실에 부딪쳐 용기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오광도 선생님이었다면 섣불리 나설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누구나 부당한 일을 보면 이해를 하지만 그것을 막을 용기는 좀처럼 내지 못하니까. 이런 간단한 진실은 좀 더 넓혀서 세상 곳곳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린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그들의 진심을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의문점을 던져봐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후, 나도 모르는 상쾌함을 느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을 느꼈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두려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방해를 뚫고 나아가고 두려움을 이기며 자신만의 당당한 행진을 완성한 일호는 자신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일호처럼 자신의 털, 꿈 등등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해볼 때까지 해보자.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이런 용기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아름다운 용기를 가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 모두 한 번 가져보도록 하자. 그리고 의사소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이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를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같이 해결하려고 해 봐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노력했었다는 말이 나올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다 읽고 책을 덮으니 그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대단치 못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일어나지는 않을 법한 일들이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소개했고 그래서 더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제일 기억에 남은 이야기라면 역시 엇박자D가 아닐까 한다. 고등학생시절의 합창단 때, 그는 박자를 잘 맞추지 못해 엇박자D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음악 선생님은 그런 그에게 축제때는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말라는 주의를 주지만 과연 그게 마음대로 되기나 할까. 나도 모르게 부르고 싶고, 흥분된 마음은 여기저기 튀어나가 마침내는 내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그 상황을 엇박자D는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노래는 엉망으로 되어버리고 음악 선생님은 엇박자D에게 큰 상처를 준다. 그 상처를 여지껏 안고 살아온 그. 얼마나 한이 맺혀버렸었을까. 노래 한게 죄란 말인가? 박자 못 맞춘게 죄일까? 많이 힘들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졌다. 조금 다른 음을 낸 것으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엇박자D의 그런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가 공연을 기획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공연을 준비해나가면서 '나'는 엇박자D를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보였고 공연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드디어 공연 당일이 되고, '나'는 갑자기 익숙한 곡이 귀에 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 곡은 바로 고등학교때 축제에서 불렀던 바로 그 곡.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알고 보니 그 곡은 음치들을 모아 부른 곡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속 시원한 노래란 말인가. 엇박자D의 감각 넘치면서 음치도 노래를 잘 부를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한 곡을 그 공연에 초대받았던 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즐기게 된다. 

이렇듯 일상적인 이야기들인 것 같지만, 드라마에서는 절대 볼 수 없고 영화에서는 볼 수 있는특별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보인다. 나한테는 특별한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오래 남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