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중학교 겨울이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단체로 구민회관으로 영화를 관람하러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본 영화가 바로 [러브레터]였다. 영화 관람 이후 남자 주인공에 뽕 넘어간 우리들은 발길한 번 주지 않던 도서관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갔다. 혹시나 주인공 같이 멋진 남학생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흑심을 가득 안고 매일 매일 찾아갔다.
그러나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이였다.
잘생긴 남학생은 커녕 우리처럼 흑심만 가득 찬 여학생들만 우글우글 거렸고, 때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만 있을 뿐이였다.
아.. 감수성 예민한 시절 소녀의 가슴은 무너졌었다.
점차 며칠이 지나고 나와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동네 도서관이 넘 꼬져서 그런가봐’ 라며 툴툴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쳐가는 시간과 무료함을 때우고자 책이나 보기로 했다.
서로 서로 맘에 드는 책을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그 때 나는 [무진기행] 이란 책을 집어들었다.
나름 조숙했던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찌릇찌릇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이면 그 책을 읽었덤 감정이 하나 둘 생각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은 점점 도서관으로 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책 속에 재미를 알게 된 나와 서로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만이 꾸준히 도서관을 찾아갔다. 빼곡히 쌓여있는 많은 책들 중에 내 손에 간택되길 기다리는 책이나,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하는 나나 서로 긴장 되기는 피차일반이였다. 재미있는 책을 고른 날은 밤새도록 읽어서 비몽사몽 학교에 가기도 했고, 재미 없는 책은 읽다가 휙 던져놓기도 했다.
그런 일상의 다반사 속에서 입시가 다가왔다. 아쉽지만 책들과의 만남은 잠시 보류해야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가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점점 책의 재회는 멀게만 느껴졌다. 기약할 수 없는 긴 휴식기가 계속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책들과 특별한 사이로 재회하게 되었다.
그들이 나의 생활 속에 좀 더 내밀한 일부로 들어온 것이다. 바로 내 밥벌이가 된 것이다.
어쩌면.. 이직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책과 멀어질 일은 없을 꺼 같다.
요즘은 일하면서 예전에 봤던 책 들과 종종 마주치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봤었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화려하고, 멋진 표지로 바뀌어서 온 그들을 보면
장가 보낸 자식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 책과 얽혀 있떤 잊고 지낸 추억들도 새록 새록 이야기도 생각이 난다.
나에게 책은 재미와 지식뿐만 아니라 일용한 양식과 따뜻한 옷까지 제공해준다.
비록 우리의 만남이 순순함 보다는 흑심을 찬 만남이 시작이였지만 책은 내게 후하게 이해의 관용을 베풀어 주었다.
한동안 그를 손에서 놓아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외면하고, 한 권 읽다가 내팽겨치고 다른 걸 읽거나 동시에 여러 권을 읽어도 책은 화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여행이 가고 싶으면 비록 눈만 데려다 주지만 공짜로 여기 저기 세계 곳곳을 데려다 주기도 하고, 시간, 지역, 장소, 인종 관계 없이 누구를 만나든 언제나 가능하게 해준다.
내가 아플 때나 슬플 때나 돈이 없어 초라할 때나 속상할 때나 위로 받고 싶을 때 언제든 말없이 하얀 가슴을 넓게 벌려 포근히 감싸주는 책.. 어느 누구보다 내 마음을 콕콕콕 사랑으로 키워주는 그대의 소중한 마음은 애인도 없는 이 긴긴 외로운 밤 쓸쓸하지 않다.
카사노바도 울고 갈 그대여..
그대의 이름은 바로 책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