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같은 책을 읽은 타인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른 사람이 쓴 리뷰를 모두 다 들여다볼 수 없듯이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을까 해서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긴 수다를 떠는 느낌이라 부끄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러다 같은 책을 읽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쉽게 흥분하고 만다. 나만 이렇게 읽은 게 아니라는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묶여져 나오면 긴장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책들을 적어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듯이 내가 한 번 밖에 읽지 않은 책들을 어떤 시선으로 들려줄지 궁금했다. 또한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어떤 흥미를 불러일으켜줄지 설렘으로 이 책을 펼쳤다.

 

  책을 펼치기 전 목차를 이토록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얼마만인지! 스물세 편의 소설 목록을 보면서 내가 읽은 책은 여덟 권, 읽다 만 책은 한 권, 읽진 않았지만 소장하고 있는 책은 세 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읽은 책들 이야기도 궁금했고 소장하고 있는 책 중에서 어떤 책을 먼저 꺼낼지도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었던 오에 겐자부로의『아름다운 애너밸 리 싸늘하게 죽다』를 꺼냈고, 다소 이야기의 중심을 못 잡아 집중력이 흩어질 수도 있었는데 줄거리를 먼저 알게 되어서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내가 읽지 않은 책 내용을 먼저 알아버리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직접 읽지 않고는 그 느낌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개의치 않아 하면서도 맛깔난 소개글이 있으면 더 구미가 당기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내가 읽은 책임에도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저자의 시선에서 좀 더 자세히, 그리고 다른 시각으로 듣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읽은 책에 대해서는 뭔가 친근했고, 읽지 않은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저자도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소개를 해주어서인지 편안하다 못해 내가 직접 읽은 것처럼 빨려 들어갔다(다만 ‘그녀’를 멋스럽게 표현한다는(주로 소설에서) ‘그미’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아서 계속 걸리긴 했다.). 그래서 책 속의 주인공들 이야기에 일희일비하고 아직도 내가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먹먹한 행복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만날 수 없지만 나를 거쳐 가는 이야기는 앞으로 얼마나 될지를 가늠할 수도 없기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지금 이 세상 구석구석에 넘쳐나는 삶의 모습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슬픔은 단순히 멀리 두고 극복할 대상이 아닙니다. 슬픔보다 기쁨이 훨씬 좋다고 강조해서도 안 되고, 기쁨에 관한 밝은 책들만 읽혀서도 안 됩니다. (36쪽)

 

  그러다『플랜더스의 개』소개글을 읽다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현대문학이 아닌 고전을 읽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던 나인데 ‘단순히 멀리 두고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니! 저자는 ‘슬픔’이라고 했지만 내가 피하려고 했던 것이 현실의 ‘슬픔’임을 알고 있었기에 도피행각을 하다 예기치 않게 그 대상과 맞닥트린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슬픔’은 과연 무엇인지,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랫동안 피하려고만 했는지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란 의문과 함께 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버렸던 것 같다. 내 안에 무엇을 담고 있었기에 나는 피하고 있었고 문학을 방패삼아 우연히 혹은 서서히 극복하려고 했던 것일까? 조금이나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슬픔’이라는 실체를 알게 되자 이 책을 만난 것이,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만나왔던 시간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일이 내게 주어진 숙제 같았다.

 

  책을 좋아하던 초장기에는 책을 읽는 게 좋아서 다음에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멋진 작품들을 만나면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며, 책을 좋아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은 별개다란 누군가의 말처럼 쉽게 품을 수 있는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10년 잡고 써보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열리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소설들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그런 소설을 재미나게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날 때마다 내 꿈과는 무관하게 그냥 고마움을 느낀다. 어쩌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되고 책에 빠졌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책이 내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은 늘 하게 된다. 나의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가던지 간에 문학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위가 고요함으로 뒤덮이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 때,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과연 사랑을 하고 있는지.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이런 생각을 곱씹는다는 것은 영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사랑이 과연 순수하고 올바른지 되새겨보면 쉽게 그렇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세상과 마주하면서 퇴색해버린 내 마음이 뜨거웠던 사랑의 마음을 점점 밀어내 버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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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세상을 바꿔야 한다면 사랑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거야.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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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진다. 하나뿐인 목숨도 기꺼이 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히더라도 한순간이나마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지금처럼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며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제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도,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심봉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심청이의 희생이 세상을 바꾸는 단 하나의 방법일지라도, 그 귀한 목숨을 바쳐 자식과 아비의 연을 끊어가면서까지 그러한 결정을 해야만 했는지 안타까움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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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젖동냥을 하면서까지 홀로 키워 온 아비에 대한 은혜가 형언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 아비의 눈을 뜨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을까? 또한 눈을 뜨면 세상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겠노라 다짐을 해버리고 그 짐을 어린 딸 심청에게 드리워버린 심봉사. 자신의 형편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앎에도 결국에는 자식을 사지로 몰아버린 비운의 아버지. 나도 과연 심봉사의 입장이었다면 안 될 것을 바라며 내 짐을 자식에게 떠 넘겨 버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심청이든 심봉사든 그들처럼 할 수 없었을 거란 결론이 났다. 내가 그들의 상황이 아니었단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비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굴레 같은 삶일지라도 그냥 살아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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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이러한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대로 읽은 적은 없지만, 익히 들어온 심청이의 이야기가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비를 생각하는 심청의 효성은 지극하지만 서자로 태어난 윤상이와 마음을 주고받는 청이와 젖동냥으로 어찌어찌 딸을 키워냈지만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챙기는 심봉사. 이런 두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 때문에 인당수에 몸을 바치는 현실이 더 극단적으로 느껴졌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지만 사랑하는 윤상 오라버니를 두고, 아비 역할은커녕 자신의 삶을 더 궁지로 몰아가는 심봉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심청이의 결정에 절대 동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아비에게 눈 뜨는 것을 포기하랄 수도, 윤상이와 야반도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심봉사가 야속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열다섯 어린 딸을 고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고 행실까지 바르지 못했으니 아무리 아비일지라도 지켜보는 입장에서 심봉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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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도 청이는 그런 아비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사실을 심봉사도 익히 알고 원통해 했으면서도 청이가 떠난 후의 행실은 실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다. 심청이의 목숨 값을 탐 낸 사람들에게 속아 유흥으로 탕진하고 공양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거기다 민망한 병까지 얻었다. 청이는 그 꽃 같은 목숨을 던졌는데 아비란 사람은 목숨 값의 어떠한 가치도 얻어내지 못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에 더 살이 붙여진 이야기속의 심봉사는 도저히 정을 붙일 수 있는 성품과 품행을 행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이 이어지는 동안에 불편함으로 마주하고, 분노가 문득문득 나를 지배해 책장을 덮고 쉬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읽기가 이어지다보니 과연 이 소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분노만 일고 심청이의 애절함도 공감할 수 없다면 이 소설을 마주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에 빠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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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전에 깊은 고뇌를 하는 장면에서 심청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짧은 생애 동안 고생만 했음에도 그 모든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빌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140쪽)’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청이가 몸을 던지기 전의 모습을 ‘마치 살아남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성녀가 된 것 같다.(139쪽)’고 표현했는데 청이의 고뇌에서 신(神)의 고뇌를 언뜻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종교적인 해석으로의 접근이라기보다 그만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상황일지라도 순간의 고뇌가 닮은 것으로 보였다는 의미다. 심청이 우여곡절 끝에 심봉사와 조우하고 윤상의 목숨을 지켜내지 못하면서까지 천지신명께 빌고 빌어 그의 눈이 뜨게 한 뒤의 만남에서 심봉사가 한 말에서 절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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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죄인을 어찌 이렇듯 살려주셨나이까?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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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핏 지난한수도 있는 이 말은 신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이들에게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말은 실로 심봉사가 변했음을 알려주었다. 그간 자신의 욕심만 채우며 어눌하게 속아 넘어가며 심청이의 효심을 몰랐던 심봉사가 아닌, 은혜를 입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아비와 딸로 만나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을 이어갔지만 하늘위에서는 다른 운명으로 만나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심봉사는 모르고 있었다.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바다 깊은 곳으로 가 지상에서의 일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원래 신분과 이 세상에 내려올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봉사는 심청이의 기도로 눈을 뜨고 병이 나으면서 둘의 인연이 특별했음을 감지하고 심청에게 묻지만 이제와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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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돌고 돌아버린 시간이 야속하다. 심봉사가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려 청이와 살뜰하게 살았더라면. 윤상이의 태생이 평범해 청이와 어렵지 않게 혼인을 치룰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인생의 굴곡을 좀 덜 겪으며 나름의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인다. 심봉사는 딸을 잃고, 목숨 값으로 바꾼 재산을 잃고, 맹인들에게 열어주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면서 만난 황봉사를 만나면서 그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음을 깨닫고 후회하지만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처참한 상황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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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 겨울나무네 움이 트듯이,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겨우 내가 달라 보이더이다. (...) 마음이 눈 뜨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날이 오더이다. (...) 마음을 내려놓으면 살아갈 수 있는 게요.(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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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심봉사와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다른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황봉사의 깨달음이 심봉사에게도 울림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래서 청이를 만나고 왕비의 아비로 편히 살아갈 수 있음에도 그간의 질긴 인연을 끊고 자유로워지고자 훌훌 떠나간다. 청이 또한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아비를 떠나보냈음에도 그 대가로 잃은 윤상이에 대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연인으로 만나 평생 봉양해야 할 아비의 운명으로 지상에 떨어졌지만 그 보다 더 진한 사랑은 지상에서 만난 윤상이와의 인연이었다. 그럼에도 윤상이와의 인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는 듯이 냉철하게 끊겨 버렸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청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버린 윤상이를 보면서 왜 이들의 사랑은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목숨을 바치는 일이 반복되어야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합치되었다면 이토록 비극적인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진 않았을 거란 안타까움이 내 마음속에 내내 소용돌이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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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심봉사가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겠다는 소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심청이 목숨을 발치는 사태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봉사는 심봉사대로 눈만 뜨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청은 심청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비의 눈을 뜨게 하고 그분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은 다 이룬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봉사는 심청이 떠나간 후에 호되게 세상의 삭막함을 맛보았고 심청은 다시 이승으로 올라오는 운명을 택해 또 다시 아비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잘못 되었음을, 아비의 ‘한갓 꿈같은 소망’이 허황된 것이었음을 고백하면서도 아비를 위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으로 돌린다. 두 번이나 아비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윤상을 잃으면서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임을 자책하고 고백하는 심청의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와 아리다 못해 저리다. 왜 심청은 그런 운명을 모두 받아들여야 했을까? 왜 그런 운명을 탓하지 않고 보통 사람이라면 행할 수 없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 했을까? 잘못된 방법과 뒤늦은 후회가 따라오더라도 오로지 사랑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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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철벽처럼 다가서 헤쳐나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듯(142쪽)’, 심청, 심봉사, 윤상은 그 운명의 철옹성을 낱낱이 보여준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하나의 단어로 기억하라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법이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심봉사의 세상에 대한 사랑, 청이의 아비와 윤상에 대한 사랑, 세상은 서자라는 신분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 모든 걸 품어주었던 윤상의 청이에 대한 이 모든 사랑이 아직도 세상 곳곳에 흩뿌려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사랑은 색깔이 다를지라도 움트고 열매를 맺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소설을 사랑이라고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 맺어지지 못한 윤상과 청이의 운명이 어긋나버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이 세상에 뿌려놓은 사랑의 씨앗들이 어딘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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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겉에 보이는 대로, 사랑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줄 안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실은 사랑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인 것을, 그네들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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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은 청이와 윤상, 그리고 청이네를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던 귀덕 어미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심봉사를 비롯해 돈만 좇아갔던 뺑덕 어미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언제든 그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다. 초능력자들이 순식간에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 될 수 있고 심봉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초능력자도 될 수 있다. 어떠한 사람이 되는지는 자신의 삶의 판단이 먼저겠지만 타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더군다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 세상에서 어긋난 사랑만 맛보았던 인물들이 이 소설을 채워갔지만, 앞으로 쓰일 소설에는 사랑이 사랑으로 화답하는 마주보는 사랑이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소설을 보면서 사랑이 있기에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사랑이 많은 역경을 이길 힘이 되는 세상이라고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얽히는 것도 싫어한다. 하지만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싫어한다. 늘 마음은 한적한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책이나 봤음 좋겠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적당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가끔 카페에서 책을 보는 것도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져서 들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성향이 뚜렷함에도(최근에야 깨달은 거지만) 내 주변에는 적당히 얽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 같다. 완전히 얽혀있거나, 자주 부딪힘에도 전혀 얽히지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맨송맨송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표지 속의 좀 까칠해 보이는 저 아저씨의 이야기를 읽다 울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사람의 온기로 따뜻함을 느낄 줄 몰랐다. 책은 늘 곁에 두며 읽고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와 닿는 책을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무방비 상태로 오베라는 아저씨(호칭이 좀 애매하긴 하나 할아버지보다 아저씨가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의 이야기를 읽고 뭔가 정신이 똑바로 차려지고 자세까지 올곧아지는, 잔잔하면서도 포근한 마음을 느꼈다. 푸석푸석한 마음을 녹여 나를 좀 더 두루뭉술하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나이는 59세. 성격은 까칠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 반 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런 아내를 따라가려고 늘 자살할 준비를 하고 있음.

 

  간단히 오베 아저씨를 소개하자면 이 정도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건 좀 짠하지만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을 때 딱히 정감이 간다거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주변에 저런 이웃이 있으면 피곤하다 싶을 정도로 이른 아침 동네를 시찰하고, 조금만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건 상관하지 않고 쏘아댄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게 반듯(?)한 상태에서 아내 곁으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앞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3살, 7살 딸아이와 운전부터 어떠한 손놀림에도 재능이 없는 멀대같은 남편과 이란 출신의 아내가 임신한 채 이사를 왔다. 오베 아저씨 입장에서 보자면 뭔가 신경 쓰이고 복잡한 가족임이 틀림없다. 번번이 아내 곁으로 가려는 행위를 방해하는 손재주 없는 인간들 때문에 골치가 더 아프다.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만 나열했다면 오베 아저씨에게 전혀 정을 붙일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무뚝뚝한 원칙주의자였던 오베 아저씨의 지난 삶을 들여다보니 마음 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6살에 고아가 되었고, 직장에서 너무 과묵한 탓에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집은 불타버렸다. 그는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189쪽)’ 말할 정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발랄한 아내 소냐와 결혼하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 아내와 함께 버스 여행을 갔다 사고를 당해 뱃속의 아이를 잃고 소냐는 하반신 마비가 되어 버렸다. 

 

  오베 아저씨가 절망하고 분노해 있는 동안에도 소냐는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삶을 이전처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문제아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요, 사랑하는 오베. 하지만 수천의 다른 아이들을 주셨지요.(356쪽)’라고 말할 정도로 삶에 긍정적이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아이를 잃고,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그 아픔을 사랑으로 타인을 감싸는 소냐의 모습에 눈물이 참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힘들 게 낳은 내 입장에서는 이런 그녀가 너무나 대단하고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그녀였으니 오베 아저씨가 아내 곁으로 가려는 시도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런데 과연 아내 곁으로 간다고 그녀가 좋아할까? 오베 아저씨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앞집의 새로운 가족 때문에 자신에게 서서히, 그렇지만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사귀고 그들과 가까이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던 오베 아저씨는 때론 뻔뻔하고 당당하고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부족한 그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서서히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작한다.

 

  ‘고양이, 과체중 알레르기 환자, 동성애자와’ 함께 아침 시찰을 하는가 하면, 앞집의 7살짜리 아이에게 선물할 비싼 아이패드를 사가지고 오면서 키보드도 공짜로 안준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오베 아저씨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마을의 일들을 합심해서 처리하다 보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는 따뜻함, 함께라는 기분 좋은 느낌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오베 아저씨는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 없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보기에도 그러할진대, 본인의 속내는 오죽할까 싶었다.

 

  원칙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색깔이 또렷해서인지 종종 타인의 모습을 보며 생각을 드러낼 때 빵 터지게 만들어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혼자서 낄낄대고 웃었다. 옆에서 잠자던 아이가 놀라서 팔을 휘저을 정도로 혼자서 웃다가 괜히 눈물을 훔쳤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좋다, 따뜻하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할 시간이 넘쳐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만약’과 같은 말들을 곱씹는다. (380쪽)

 

  오베 아저씨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 또한 이 말에 가장 큰 공감을 했다. 늘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표현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미안했고,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어느새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음에 잠시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베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 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과 가슴 먹먹한 찡함인지! 오베 아저씨와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이야기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듯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위로받고 웃고 고마워하는 이 마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내 주변에 오베 아저씨 같은 사람도, 그를 변화시켰던 이웃들도 없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면 설렌다. 그래서 타인과의 만남에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했다.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 용기가 없다면 적당한 섞임을 즐기고 그들과 관계 맺는 것을 즐거워하기로 말이다. 오늘은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내 마음 먹기에 따라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벅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