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안합니다. 마음껏 뛰어 놀고, 동무들과 사이 좋게 얘기하고, 만화영화도 보고 싶을 텐데, 감히 책을 읽으라고 하기가 미안해진답니다. 그러니 아주 조금씩 꼭 읽고 싶을 때만 읽으세요.”

『강아지똥』『몽실언니』의 작가 고(故) 권정생(1937∼2007)이 생전에 한 단편동화집 머리말에 남긴 말이다. 권정생. 그는 아이들을 교육 대상으로, 계몽 대상으로 보는 어른이 아니었다. 책을 권할 때조차 아이들의 처지를 헤아려 망설일 만큼 아이들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또 다른 인격체였다. 어린이날, 그의 책을 새삼 들춰보는 건 그런 이유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7일이면 꼭 1년이 된다.


주인공 이름으로 기억되는 작품이 있다. 린드그렌에는 관심 없는 애들조차 ‘삐삐’는 안다. 바스콘셀로스라는 낯선 브라질 작가 이름을 외우지 못해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하고는 친하다. 주인공을 창조하는 건 작가지만, 작가를 완성하는 건 바로 주인공인 셈이다.

반면 작가 이름의 후광을 입어 빛나는 작품들이 있다. 피카소의 손이 스쳤다면 낙서까지 고액으로 경매되듯, 노벨상 수상작가가 썼다고 하면 일기 한 줄도 명문이 된다. 이 둘의 균형이 고루 잡혀 문학사에 쨍쨍한 빛과 아름드리 그늘을 동시에 드리우는 작가를 세상은 대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아동문학 서고를 풍성하게 살찌운 권정생이야말로 ‘몽실 언니’를 통해 이 두 조건을 넉넉하게 충족시킨 흔치 않은 대가이다.

젊은 시절, 시골 교회당의 종지기로 살았던 때문일까. 종 줄을 놓은 지 오래건만 그가 새벽마다 댕댕 치던 종소리는 아직도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고 있다. 그건 귀 밝은 어린 시절 한때만 반짝 들리는 종소리가 아니다. 성장하여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 후에도, 또 다시 굽이굽이 세월 흘러 꽃비 흩날리고 나뭇잎 붉게 물드는 창 밖 풍경이 여러 번 바뀌어도 종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웬만한 소음은 묻히고 마는 어지러운 세상에 유유자적 울리는 그의 종소리는 한결 같이 고고하다. 누구라도 고요히 귀 기울이게 만드는 그만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 납작 엎드려서도 마치 높은 하늘 위에서 인간사를 굽어보며 노래하는 새들처럼 자유롭다. 연약하고도 강하다. 감히 그의 문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이 모순의 미학이 아닐까.

처음 『몽실 언니』를 접했을 때, 두 번 놀랐다. 무뚝뚝한 듯 다정하게 사람을 끄는 그의 문체가 그랬고,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만큼 드라마틱하게 살아낸 캐릭터를 구차하지 않은 간결함으로 그려낸 데 대한 경외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이 한국 아동문학의 십자성으로 드높이 떠올라 여전히 21세기 소년 소녀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아이들, 영악지다. 찰나의 클릭 한 번만큼의 박한 인내심으로 간당간당 버틴다. “내가 너희만 했을 때는….” 이런 말이 엄마 입에서 떨어질 기미만 보여도 지긋지긋한 잔소리 말라고 당장 달아난다.

은하계 한복판에서 흥미진진하게 벌어지는 모험담도 아니고, 버튼 하나면 불이 번쩍번쩍 나는 최신 무기가 펑펑 터져 나오는 게임 속 전쟁 얘기도 아니다. 요새 애들로서는 맥 빠지는 구식 전쟁터, 너덜너덜 구질구질한 시대의 지지리 궁상 고생담이라니.

그런데 묘하다. 절대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을 것 같은 초광속 시대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뭔가를 읽어낸다. 초단위로 방전되는 짧은 끈기에도 불구하고 궁둥이 꾹 붙이고 앉아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아쉬워한다. 무기력하고 불행한 소녀가 살아낸 강하고 우직한 삶의 족적이 물질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드는 것이다.

몽실 언니와 더불어 권정생 문학을 읽는 중심 코드로 자리매김한 『강아지 똥』역시 그렇다. 왜 하필이면 가장 천한 똥을 소재로?

많은 평론가들이 이 화두를 붙들고 분분한 해석을 단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작의(作意)를 묻는다면 이렇게 시치미 떼실 지도. “그 똥 주인은 강아지니, 그 녀석에게 물어보렴.”

이게 바로 권정생의 문학이다. 축축한 음지에 던져져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등장인물들. 분명 주인공이 있으되 나대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주인공의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

눅눅하게 철 지난 옛이야기들도 『훨훨 간다』에서처럼 권정생의 손을 거치면 훨훨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주의 산만한 아이들을 신명 나는 이야기 마당의 한복판으로 빨아들이는 위력이 대단하다. 이처럼 그의 글맛과 입담은 소재나 시대상의 한계로부터 자유롭다. 예민한 소재를 다룰 때나 둥글둥글 따뜻한 글을 풀어놓을 때나, 그는 독자를 향한 충직한 애정을 잃지 않는 노련한 꾼인 것이다.

『황소 아저씨』는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이건 권정생이다” 싶은 작품이다. 황소와 생쥐의 이야기를 단지 강자와 약자, 시혜자와 수혜자 사이의 따뜻한 정으로만 읽어내기에는 울림이 너무도 크다. 이 역시, 한때 생쥐의 절박함으로 생의 언저리를 서성이다가 세상을 어루만지는 황소의 자리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권정생 자신이 육화되어 녹아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권정생의 대표작 『몽실언니』 표지 그림으로, 화가 이철수가 그렸다.

지금까지 찰랑찰랑 대표작만 슬쩍 건드린 분이라면 이번 어린이날에 그의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까지 읽어보면 한층 깊이 그의 문학에 매료될 듯하다. 세상을 향해서는 고집스레 등 돌리고 살았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나 넉넉한 관용의 시선을 잃지 않았던 권정생. 정작 작가 자신은 병약한 몸을 자연에 의지해 고독하게 은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다양한 독자층에게 보편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불가사의한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새큼새큼한 시어들 사이사이에서 보일 듯하다.

이제 그는 갔다. 벌써 1주기다. 우리 몫으로 남겨진 그의 작품들이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사건이나 이야기에 주목하기보다 인간을 탐구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 늦은 낮잠에서 깨어나 영문도 모른 채 불현듯 울음 터뜨린 아이처럼 서럽기도 하고, 흐릿한 가로등 불빛을 일시에 몰아낸 첫새벽 해처럼 가슴 뭉클하기도 한 그의 작품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친근한 활자 속에서 권정생은 영원히 땡땡땡 종치는 소년으로 우리 곁에 불멸할 것이다.

자성의 소리 높이는 작가들에게나 좋은 작품에 목마른 독자들에게나, 그는 언제까지나 골몰히 생각하며 따라가게 만드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임사라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