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그는 11월의 전갈자리에서 태어났다.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추한 것은,
날개달린 짐승이 바닥에 얼음처럼 누워 죽어 있는 모습이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한 작품,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작가 스스로 탐미주의자임을 고백했듯 첫문장부터 생생하게 박힐 정도로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서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관념와는 사뭇 다르다. 끔찍한 허무에 보다 가까운 아름다움이다.

재벌그룹 회장의 외동아들, 어차피 삶은 대책없이 무너지고 있었고(권태가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단지 전갈자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운명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가?)
이 추락은 T('카'라는 우상을 섬기는 베트남 고위관료의 딸이자 대학교수.)를 만나면서 날개를 단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분히 운명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무''소멸'을 추구하며 아주 더운 날 죽어 빨리 썩어 흔적조차 남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러닉하게도 종교에 대해 천국도 거부하고 환생도 거부하는 작가의 종교관과 달리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작가 스스로 부여한 '운명'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추락으로 걸어들어가는 동기는 사랑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며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서도 아니다.
자유의지다. 운명의 또다른 닉네임.

실제로 제목부터 이 책은 '운명'적 뉘앙스가 짙다.
어쩌면 주인공은 전갈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전갈의 한 특징적 모습을 포착하여
주인공이 죽는 순간 그가 스스로 마주한 삶에 대입하고 환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화가 나면 독으로 스스로를 공격하는 전갈.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멸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인간의 무지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모두 전갈자리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처음 백민석 작가의 <파산세일>이란 단편소설을 읽고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기억난다.
정말 쇼킹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감각적이고 전위적이며 엽기적인 작품이었다.

이후 <목화밭>과 <파산세일> 두 단편이 합쳐져서 <목화밭 엽기전>이라는 놀라운 장편소설이 출판됐다.
그리고 어느 시점엔가 회오리처럼 등장해 문학판을 휩쓸던 이 작가는 사라졌다.
아팠다는 얘길 들었는데,
이 작품이 사라지기 직전의 그 작품인가보다.
사라졌다 다시 재등장해서 내놓은 <혀끝의 남자>는 봤는데, 어째서 이 작품을 놓쳤을까,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작가가 뭘 쓰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썼다고 고백한 것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작가의 무의식적인 내면이 일관되게 경험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아주 평범한 어떤 문장에서
한참을 맴돌기도 했다. 어줍잖게도 작가에게 연민 비스무리한 감정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 어떤 문장에서는 내 내면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인형과 소통하는 주인공
자기자신 대신 개를 죽이는 여자아이
폐허, 망가진 것들, 무너진 곳에서 생명력을 느끼는 여자
아이를 낳고 싶은 남자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규격화되어있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아파트와
또다른 종류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시골마을의 외딴 농장.

서사 중심의 소설은 아니라, 누군가에겐 지루하고 누군가에겐 난해하겠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겐 공감되는 소설, <죽은 올빼미 농장>.

한 20년 전쯤에 읽었던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크리스천다이제스트에서 세계기독교고전 시리즈로 출간되어
다시 한번 손에 들었다.
역시나 처음 읽는 것처럼 지나치게 새롭다.
그러나 참 좋았던 흐리마리한 기억은 역시나 기억을 배반하지 않았다.

세상에 덜 여물었던 이성이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성숙한, 혹은 베베 꼬인 머리와 가슴이 되버렸고
무엇에든 뜨거움을 잊고 산 지 오래라
기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도가 잘 나와주지 않았다.
아름답고 세련된 빛나는 감성을 담은 육감적인 문장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도 더욱 고백적이고 더욱 논리정연하고 더욱 하늘에 가닿기를 바랬지만
나는 횡설수설했고 논리는커녕 삼천포로 빠지기 일수였다.
번아웃된 지도 모른 채 배터리가 나간 지 오래였고
기도는 믿음없이 나오지 않으니깐
결국 믿음이 부족한 탓이리라.

작가는 책을 출판할 때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출판했다.
실제로는 앨버트 어니스트 리처드슨 이라는 영국 태생의 선교사다.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으면 이 책을 빼곡히 채운 글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작가는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인간일지라도
물주고 키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뿐이니까.

"무릎을 꿇고 많은 시간을 보냄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나는 터닝포인트를 노리고 있다.
그러기위해선 기도 먼저다.
 
"우리는 기도한 후에는 기도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기도하기 전에는 결코 기도한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A.J.고든의 말처럼
작가가 "우리가 이 말을 꼭 믿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믿고 다시 출발선에 서자.

이제 주행신호는 보았으니 달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