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동네 책방이 자취를 감췄다. 시내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던 서점들은 온라인 서점의 여파로 문을 닫았고, 그나마 중고생 참고서와 베스트셀러 위주로 생계를 이어가던 동네 서점들도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시간 나면 종종 들렀던 우리 동네 조그만 서점은 야반도주라는 말이 생각나게끔 하루아침에 책들을 정리하고 동네를 떠나버렸다. 지금도 서점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 사장님이 생각난다. 가끔 들리던 곳이었지만 가면 할아버지께선 따뜻한 커피 한잔 내어주면서 편하게 있다 가라곤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게 더 부담이 돼서 싸디 싼 잡지 한 권 사서 도망치듯 나오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사람 사는 정(情)이었는데 왜 그땐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 삶도 그리 팍팍하지 못 해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이런 핑계가 나를 더 속물로 만드는 거 같아 괜히 착잡하다.

 

사라졌던 서점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도서정가제가 효과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동네 서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외형적으로 책을 파는 건 예전 서점과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완전히 달라져서 돌아왔다. 책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책에 대한 시각이나 트렌드가 전적으로 반영된 서점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동네의 문화공간을 지향하고 이끌어가는 서점에서부터 시원한 맥주와 함께 북 콘서트를 즐기는 서점, 반려동물들의 인기에 힘입어 고양이 책방도 생겼고, 1인 출판사의 책 만들기를 통해 자신이 정말 만들고 싶어 한 책들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주는 서점, 인생에 대한 고민을 듣고 그 고민을 함께 고민하는 책을 추천해주는 서점까지 다양한 콘텐츠로 무장한 서점들이 서울 골목 여기저기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의 미래라는 말에 전자책을 비롯한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IT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도 전자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점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더욱이 이 책의 목적은 미래 예측에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느꼈던 놀라움을 그대로 전달하고, 책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계기를 주는 일이 가능하다면 편저자로서 더없이 기쁠 것이다.(339쪽, 에필로그 中)

 

일본의 북 디렉터가 서울에 생겨나는 서점들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서점(책)의 독립적인 변화’가 아닐까? 싶다.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 보는 책에서 문화를 담는 책으로, 그리고 이젠 개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개개인의 책으로 변화하는 책, 그 변화하는 책 중심에 서점이 있고, 그 서점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서울에 문을 연 다양한 서점들을 소개하고, 그 서점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서점 대표들의 인터뷰들이 이어진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북 카페도 출판사라는 이점을 통해 책방이라는 딱딱한 분위기에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어있었고, 출판사에 몸담았다가 1인 출판사로 독립한 분들의 이야기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문화적인 매개체를 만들려는 분들의 고군분투 성장기들을 이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책은 곧 그 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머지않아 책이 어떤 식으로 우리들 곁을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책이라는 물건 속에 담겨 있는 우리들의 열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출판 천국이라 자부했던 일본은 지금 책과 출판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책에 대한 걱정은 우리나라도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책과 출판에 대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게 일본과 다르다. 그 변화의 조짐이 서울의 뒷골목에서 일어나고 있다. 책과 출판의 새로운 가능성이 그 뒷골목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으로 퍼져 나가길 희망한다. 그래서 지방색이 묻어나는 서점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서점 붐’ 현상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길 바란다면 시간을 내서 본인이 사는 곳에 독립서점이나 골목 서점이 있나 확인해 보고 주말에 서점으로 나들이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책들이 예쁜 꽃단장을 하고 여러분과의 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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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내 경험에 비춰보자면 시를 통해 역사를 배웠고, 시를 통해 자유를 배웠으며, 시를 통해 아름다움의 의미를 알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울과 고독은 시가 내어주는 반찬이었고, 슬픔과 한恨의 정서는 시가 내뱉는 고통이었으며, 죽음과 허무는 지친 우리들에게 시가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투옥되었을 때 수감번호 264번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해 저항과 희망의 역사를 노래한 이육사 시인의 시를 읊조리다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동풍에 쓰러지고 바람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풀을 통해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유의지를 표현한 김수영 시인의 시는 힘든 시절 나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시를 통해 인생을 배웠고, 시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느낀 시, 그 시가 지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한국 시문학에서 내로라하는 시인들을 만난 건 어찌 보면 큰 행운이다. 이제는 거의 고인이 된 분들이지만 책을 통해 그분들의 숨결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시를 분석한 책인 줄 알았는데 읽어 보니 제목처럼 여기에 실린 스물다섯 명의 시인들과 차 한잔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느낌이 난다. 몇몇 분을 빼놓고는 대부분 익히 들어본 시인들이기에 더 친숙하다. 우리에게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윤동주, 신동엽 시인부터 서정적이면서 감각적인 시를 주로 쓴 정지용, 백석, 김영랑 시인의 시들, 근대성을 탐구하면서 모더니즘의 계보를 잇는 이상, 김기림, 김광균의 시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내가 많이 사랑하는 기형도 시인의 죽음과 허무에 대한 단상들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처음 접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읽고 받은 문학적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단호하고 거침없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그의 절규에서 느껴지는 강인함, 그 당당함과 강함은 군홧발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훼손한 독재권력에 대한 경고이자 부르짖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북간도 명동촌의 재주꾼 소년 동주의 <서시>에서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그의 철저한 다짐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추운 겨울날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선 이육사, 그리고 그의 시 <절정>을 통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저항시인 이외에도 모더니즘을 한국 시단에 뿌리내린 김기림 시인의 시들과 자연주의의 시선을 통해 청록파로 남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시들 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들 중 하나다. 죽음과 허무의 아픈 기록을 간직한 기형도 시인의 시들은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둡고 절망적이었지만 그 짙은 어둠과 절망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기형도 시인의 시들을 읊고 있으면 지금도 어디에선가 죽음이라는 알맹이를 깨고 그가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젊은 그가 남긴 죽음과 불안, 고독과 상처의 시들은 분명 매혹적입니다. 시 속의 잠언적인 구절들은 감수성을 자극하여, 그의 정서에 쉽게 감염되도록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면의 아픔을 쏟아내고, 죽음의 예감을 기록한 그의 시집을 읽다 보면, 결국 상처투성이인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젊음과 죽음을 동시에 비추어 주는 ‘기형도’라는 거울을 가진 것입니다.(470~471쪽 中)

 

시는 읽는 사람마다 느낌은 분명 다르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시를,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에 따라 받는 시적 영감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여기 83편의 시가 있다. 이 시들을 그 어떤 순간에 읽어보라. 그리고 그 느낌을 메모해봤으면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시가 주는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거기에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들은 필사를 해보면서 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길 권한다. 시를 읽기 전 그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아는 것은 시를 읽는 사람이 갖춰야 할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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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산에 오르곤 한다. 요즘 같은 겨울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에 오르고 있다. 겨울 산을 좋아하거니와 눈꽃으로 멋을 부린 나무를 보면 쌓인 스트레스가 스르르 녹는다. 산에 오르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설해목(雪害木)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무들의 고통을 갈음해본다. 내가 가는 등산로 코스에 거의 다 오르면 크리스마스트리로 잘 알려진 구상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눈에 덥힌 구상나무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을 연출한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곧추선 솔방울 닮은 열매를 보고 있으니 순간 이희승 선생님의 수필인 <딸깍발이>가 생각났다. 의복은 남루하고, 코에는 콧물이 질질 흘러내리는 남산골샌님이었지만 청렴과 지조는 그 서릿발 내리는 강추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에서 구상나무의 곧추선 열매가 딸깍발이를 연상케 했다. 이런 겨울에 눈 덮인 구상나무도 구경하고, 정말 이런 호사를 누리는 나는 참 행복하다.

 

앞에서 느꼈던 행복감과 이에 더해 놀라움을 이 책《나무, 섬으로 가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남이섬에 나무의 종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그 많은 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24절기를 기준으로 남이섬의 사계절을 나무와 결부시킨 책의 구성도 좋았고, 나무들의 특성이나 열매를 컬러풀한 사진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가의 세심함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위로했다. “이 나무의 열매는 이렇게 생겼구나”, “산에 오르면서 본 나무가 이 나무였어”, “내가 알고 있던 나무의 이름이 그게 아니었네?", 이 나무 이름의 유래가 이래서 이렇게 지어진 거구나“ 등등 작가가 책에 올려놓은 나무의 사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나무의 지식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에 충분했다.

 

꽃이 지고 잎이 나든, 꽃과 잎이 함께 나든, 아니면 잎을 먼저 내밀든 선택은 오롯이 나무 몫이다. 나무는 오랜 세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을 취하고 유전자 속에 각인시켰다. 그것을 두고 왜 그랬는지 따져 물을 수는 없다.(본문 106쪽 中)

 

옛날 왕실의 시녀들이 임금이나 왕비의 좌우에서 들던 커다란 의장 부채가 ‘미선(尾扇)’인데, 그 미선이라는 부채를 닮아 이름 붙여진 미선나무와 모과나무의 열매를 가리키는 ‘명자’에서 유래한 명자나무의 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에서 피는 꽃들의 미모가 뛰어나서 노총각의 마음을 이렇게 마구 흔들어댈 수도 있구나“를 가슴 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봄의 전령사인 노오란 복수초를 보고 있으면 입에서 침을 흘리고야 마는 나를 발견한다. 긴말하고 싶지 않다. 책 속의 말처럼 ‘봄이 와서 복수초가 핀 것이 아니라 복수초가 피어서 비로소 봄이 온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벚꽃을 필두로 여름엔 나무수국, 배롱나무, 가을엔 산딸나무와 측백나무, 겨울엔 구상나무와 주목, 개비자 등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남이섬의 사계절을 나무들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남이섬은 나무들의 천국이자 나무들로 가득 찬 섬이었다.

 

꽃바람 부는 봄날,  남이섬에 가야지.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꽃잎을 떨군 채 시무룩한 히어리의 어깨도 두드려주고 싶고, 미선나무와 명자나무의 미모 대결에 승자를 가려주고 싶다. 이러면 남이섬의 왕벚나무가 시샘하겠지만 섭섭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벚꽃 네가 미선 양과 명자 씨에게 양보해줬으면 좋겠어. 책 한 권 가져가 버드나무 밑에서 책도 읽고 싶고, 축의금도 두둑이 넣어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 주목(朱木)의 주례로 산사나무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거야. 집으로 오는 길엔 산사 氏가 답례로 건네준 화관을 그녀에게 전해줄 수 있겠지......

남이섬, 나무여행기, 나무섬으로가다, 김선미, 나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