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6일, <높고 푸른 사다리>의 주요 배경지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으로 떠나는 특별한 행사가 마련됐다. <도가니> 이후 5년 만에 장편소설로 돌아온 공지영 작가의 <높고 푸른 사다리> 출간을 기념한 문학기행 행사였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실재하는 공간과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 출간되자마자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소설 속의 ‘W시 수도원’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며, 한국전쟁 중 흥남 철수 때 1만 4,000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선장 마리너스의 실제 이야기를 모델로 했다.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하나의 자치 수도원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이 1952년 7월에 설립한 곳이다.

이벤트를 통해 선발된 40명의 독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와 함께 다양한 이야기보따리들을 풀어내며 무료함을 달랬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전경

꼬박 3시간을 달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황동환 이삭 수사신부가 공지영 작가와 문학기행단을 반겼다. 잠시 내부로 이동, 간략한 일정을 들은 기행단은 곧바로 수도원 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오루카 수사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듣는 행운도 누렸다.

점심 후 본격적인 왜관 수도원 탐방이 시작됐다. 소설을 읽고 상상하던 수도원의 이미지와 실제 수도원의 풍경을 중첩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 아브라함 신부님의 안내를 받는 공지영 작가와 문학기행단

 
↑ 수도원 입구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공지영 작가와 독자

수도원 탐방 가이드는 오윤교 아브라함 신부가 맡았다. 아브라함 신부와 기행단은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 상원관, 구성당, 마오로플라치도관, 선물방, 초 공예실, 손님의 집, 유리화 공예실, 금속 공예실, 피정의 집, 분도 출판사, 분도 미디어, 분도 가구공예사, 분도 식품 등을 차례로 돌았다.

 
↑ 수도원의 역사에 대해 설명 중인 아브라함 신부님

오윤교 아브라함 신부님의 설명에 따르면 왜관 수도원은 1952년 7월 6일, 한국전쟁으로 흩어진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 설립했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쁠라치도 수도원’이다.

분도 출판사, 분도 미디어, 분도 가구공예사, 분도 식품 등을 탐방하면서 ‘분도’라는 단어에 궁금증이 생긴 한 독자는 “’분도’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고 묻기도 했다. 오윤교 아브라함 신부는 “이는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온 배경과 연관이 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천주교는 중국을 통해서 조선에 전해진 종교입니다.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모든 용어들이 한자로 전해지게 되었죠. 그래서 현재까지도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당시 성인들의 이름도 한자로 들어왔는데 ‘베네딕도’를 한자로 표기하면 ‘분도’입니다. 그래서 출판사, 식품 가게 등 모든 곳에 ‘분도’가 붙은 거죠. 이 외에도 우리 수도원에서는 분도(賁道)가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 ‘분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아브라함 신부님

1시간 가량의 수도원 탐방을 마치자, 공지영 작가와 독자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지영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공지영 작가 외에도 대수도원 원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신부, 오윤교 아브라함 신부 또한 참석해 자리를 더욱 빛내줬다. 수도원 측이 마련한 선물도 있었다. 이틀 후인 12월 8일이 공지영 작가의 영명축일(세례명을 기념하는 날)임을 미리 알고 깜짝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공지영 작가의 세례명은 ‘마리아’로, 축일을 축하하는 케잌 앞에서 작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 영명축일을 축하 받고 있는 공지영 작가

미사 때 사용되는 포도주로 잔을 채워 건배한 후 본격적인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다. 이날 공지영 작가는 <높고 푸른 사다리>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작가로서의 고충, 소설의 영화화에 대한 의견, 앞으로의 계획 등 개인적인 질문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독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다음은 독자와 공지영 작가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이번 소설은 어떤 고민을 안고 쓴 소설인가요? 평소 집필 스타일 또한 궁금합니다.

이번 소설은 한국전쟁 중 흥남 철수 때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14,000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선장 마리너스 수사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다만 너무 마리너스 수사님 이야기만 하면 다큐멘터리가 되니까 어떻게 오늘의 우리와 함께 연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소설을 쓸 때는 어느 정도 윤곽을 갖고 집필을 시작하지만 선명하진 않아요.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보고 친구에게 그 줄거리를 설명해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죠. 취재는 디테일한 면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간혹 그 과정을 거치면서 소설에 도움이 되는 뜻밖의 요소들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Q 글에 대한 압박이나 스트레스는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스트레스가 심한 편이에요. 심할 때는 1년 내내 계속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빨리 쓰는 수밖에 없어요. 참고로 글을 잘 쓰는 방법이 있다면, 절대 처음부터 잘 쓸 생각을 하지 말고 메모처럼 적어야 한다는 거예요. 떠오르는 단어를 나열하듯 건조하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문장이 확 올라오는 때가 있어요. 김인숙 작가의 경우 습작을 할 때 자기 키만큼의 노트를 갖고 있었다고 해요. 글이 완성되기까지 화가가 데생하듯 끊임없이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Q 매번 책을 통해 인생에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에서는 작가 스스로 어떤 질문을 던졌나요.

글은 내 안의 절절한 그 무엇이 없다면 절대 쓸 수 없습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스스로 ‘대체 왜?’,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습니다. 고통에 대해 고민한 부분도 담았고요. 고통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기 때문이에요. 예방주사를 놓기 위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아이 입장에서는 고통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완벽한 사랑인 것처럼요.
과거에 나병환자 전문 의사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나병은 손발이 떨어져 나가고 눈을 멀게 하는 병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절대 몸에 상처를 내는 병이 아닙니다. 단순히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죽이는 병인데,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함부로 쓰게 되고 손발이 이를 버티지 못해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죠. 눈이 머는 것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각막이 상해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어요. 즉 고통은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통증이라는 내용이었어요.
한 신부님이 겪은 이야기를 또 하나 하자면, 몇 년 전 명동성당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는데 낡은 벽돌을 빼내 새 벽돌로 갈아 끼우는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100년이 넘은 벽돌이라 버리기 아까워 하나하나 액자에 담아 명동성당 은인에게 선물 했는데, 그분들이 매일 그 벽돌 앞에서 기도하더라는 거예요. 벽돌의 입장에서 만약 자신이 탈락하고 빼내진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내가 여기서 빼내 지더라도 더 곳은 좋은 곳으로 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이 벽돌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통이라는 것이 짧은 견지에서 보면 괴로운 것이지만, 더 먼 시각으로 보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공지영 작가

Q SNS와 관련한 비판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떳떳한 모습과 대중과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보기 좋습니다. 창작할 때도 이런 자의식이 발휘되나요?

전 돈을 많이 버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작가생활을 시작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나는 가난할 수 있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그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 중이에요. 남들이 뭐라 해도 떳떳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의 굳은 각오를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Q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임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남은 삶에서 원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회적 책임보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더 크고 막중한 것 같아요. 모든 면에서 나 자신에게 늘 잘해주고 싶죠. 항상 제가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걸 받은 것 같거든요. 앞으로 남은 소망이 있다면 욕심을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아이를 잘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여력이 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장학사업도 해보고 싶어요.

 
↑ 독자의 질문에 활짝 웃어 보이는 블라시오 아빠스(Abbas) 신부

Q 지난해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다 올해 기도를 통해 안정을 찾았습니다. 안정을 되찾으니 최근 다시 안일함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아직 정말 힘든 경험을 하지 못해 진정한 부름을 못 받은 건지, 단지 사람마다 정해진 때가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블라시오 신부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르지만 고해성사를 하면서 느낀 건데, 사람은 역시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신부가 된 지 12년이 됐는데, 나는 기억이 없는데도 ‘예전 고해성사 참 감동적이었다’는 식으로 나를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그때도 아마 그 분들께 이런 말을 한 것 같아요. “다 때가 있을 겁니다.” 대부분 이 한마디에 많은 위안을 받으시더라고요. 좋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좋은 때가 올 테니 기다려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공지영 작가 신앙생활이 의무는 아니에요. 예를 들면 내가 석유보다 와인을 마시는 게 더 기쁜 것처럼, 신앙생활도 내가 좋아야 할 수 있죠. 그래야 내가 기쁘고 평화로워지니까. 신이 뜻을 그렇게 세웠다는데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아빠스 신부님 말처럼 기다리다 보면 좋은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Q 저는 문학전공자입니다. 스물아홉이 되니 글을 계속 고집해야 할지, 결혼과 일 등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야 할지 조급해져요. 지금 시점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지 조언해 주실 수 있나요.

사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정상적인 행위는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글을 쓰는 행위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에너지라고는 볼 수 없죠. 일단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일상을 사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대신 손에서 책을 놓지 말고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보세요. 인생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내 뜻대로 모든 걸 허락하지 않아요. 모든 에너지는 안정됐을 때 생기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변화되고 흔들릴 때 생겨납니다. 어느 순간 그동안 읽은 책과 메모가 힘을 발휘할 때가 올 거예요. 만약 그런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고 계속 평범하게 산다면, 그것보다 훌륭한 삶 또한 없을 거고요. 결국 무엇을 선택하든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에요.

Q 조감독이라서 영화제작에 관심이 많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은 영화화된 작품이 많은데, 그 동안 원작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많이 제시하는 편이었나요?

소설은 작가의 것이지만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 생각해요. 일단 내가 ‘원작을 팔았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믿고 맡겼다’는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전 단 한번도 작품에 간섭한 적이 없어요. 어떤 작품이든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나중에 보면 다 실망하게 마련인 것 같아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보면 굉장히 지루하죠. 이건 장르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도가니> 때도 체험을 했지만, 영화는 순간적인 폭발력이 있는 매체에요. 다만 작은 것에서 큰 감동을 이끌어내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소설이 훨씬 더 매력적이겠죠.

Q 세 아이의 엄마인데 어느 선까지 아이들의 생활에 개입을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절대 “No”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내버려둬야 한다는 겁니다. “NO”라는 말을 남발하다 보면 사춘기처럼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부모의 말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웬만하면 아이를 내버려두고 믿어주세요. 무관심으로 내팽개치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밝게 자란다는 것도 말씀 드리고 싶네요.

Q 큰 결정을 앞둔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저 같은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 당시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었어요. 엄마가 기도해주는 것, 진실 되게 매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지지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도의 힘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라는 걸 여러 번 체험했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독자의 질문에 대답을 준비하는 공지영 작가

Q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개근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어요. 스스로 건강하다고 느꼈던 시기는 아마 정신과 치료를 받고 나서부터인 것 같아요. 위경련, 편도선 등 지병이 많았는데,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게 나를 건강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어차피 운동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운동보다는 거의 매일 아침 20분에서 1시간가량 기도를 하고 있어요. 그럼 하루가 굉장히 편해져요. <의자놀이>를 쓰기 시작한 뒤 지난해 대선 때까지는 몸이 엉망진창이었는데, 공교롭게 그 기간에는 제가 기도를 멈춘 시기였어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하루 24시간 중 1시간 정도는 따로 떼어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Q 만약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나요?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뭐가 됐을까’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에요(웃음).

 
↑ 낙동강을 바라보는 문학기행단의 모습

 

↑ 성당 앞에서의 단체 사진

모든 일정을 소화한 기행단은 낙동강과 구상문학관 잠시 들러 행사의 아쉬움을 달랬다.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제목은 그리스도교와 매우 밀접하다. 사다리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인데,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의 사다리는 지상에서 하늘에 이르는 통로를 뜻하기도 한다. 사다리 앞에 놓은 ‘높고 푸른’이라는 수식어는 ‘쉽게 닿을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공지영 작가’를 매개체로 모인 40명의 문학기행단은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24시간의 10시간을 뺀 나머지 모두를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놓으며 서로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14시간 동안 쉽게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작가와 독자는 보이지 않던 벽을 허물고 사다리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