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상실이라는 감정을 누가 겪고 싶겠냐마는, 겪고 싶지 않아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안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이제는 삶에서 상실을 가장 많이 겪는 시기, 곪아 터져버린, 파과의 시절을 사는 노년의 한 여성의 삶을 그린다. 그러나 그 노년의 한 여성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방역업자로 수십 년을 일해 온 여자. 겉으로는 쥐나 벌레들을 처리해 준다는 방역업이지만 실은 생물학적으로 쥐나 벌레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을 처리하는 업종, 그러나 한편 누군가에게는 쥐나 벌레로 치부되는 존재들을 처리하는 업종.
한창 때에는 '손톱'으로 불린 '조각'이라는 노년의 여성. 그 어떤 이름도 자연스럽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기에는 머뭇거림을 동반한다. 예순을 넘긴 나이의 여성이 여전히 건장한 성인 남성들을 상대하는 방역업자로 생활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 또한 나의 작은 편견에 불과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나게 일을 처리해왔다 할지라도, 건강 관리와 체력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들과 엇비슷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면 기력이 쇄진해 갈 수밖에 없는 시기를 맞이한 조각이다. 슬슬 업계에서 퇴물 취급도 받아가며, 그러나 그만큼 필요성도 못지않게 가지고 있는.
원한 관계를 지닌 것도 아니고, 수십 년간 자연스럽게 의뢰 받은대로 많은 사람들을 죽여온 살인자에게 여타 다른 인간들과 같은 인간적 감정이 남아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인생, 인간이라는 같은 존재로 태어나 같은 존재로 소멸하는 이상 말년은 크게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인간 삶의 순리라는 걸까.
그러나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상실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라는 감정일까 역시.
상실이라는 감정이 사랑 없이 가능한가? 삶의 생기를 모두 소진해 잃어가는 상황에서 느끼는 상실이란, 역시 이유불문 맹목적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며, 타인을 잃은 상실 또한 그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 말이다.
조각의 눈이 아들뻘되는 강박사를 향하게 된 것도, 대놓고 사랑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그 종류의 한 감정이었음을 눈치 못챌 이는 없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남성 방역업자인 투우가 조각이 하는 일에 끊임없이 훼방놓고 그녀를 궁지로 몰아간 것도, 단순히 복수라는 감정의 증오가 아닌 어쩌면 애증,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떨쳐낼 수가 없다. 여기서 나이는 절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런 면에서 『은교』(박범신, 문학동네펴냄)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딱히 콕 집어 어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책을 펼쳐 읽는 첫 순간부터 구병모의 문체에 감탄했다. 쉽사리 끝나지 않는 길고 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휴지를 두며 꼬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나의 취향에 꼭 맞았다. 예를 들면,
'몸짓과 인상착의가 다른 이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겨줄 만큼은 아닌데, 보통 사람들이 전철에 오른 수많은 노인 가운데 유독 한 명에게 찰나 이상의 시선을 보낸다면 이유는 아마 그가 열차 끝칸에서부터 쓸어 온 무가지 뭉치를 품에 안은 채 누군가 혹시 흘렸을 파지를 찾아 선반을 훑으며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거나, 보랏빛 점무늬가 날염된 항아리 팬츠와 고무신 차림으로 들어서자마자 갓 짠 참기름과 생강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보퉁이를 명백히 통행에 방해되게 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보란 듯이 주저앉아서 아이구 아이구 앓는 바람에 결국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 (p. 10)
-와 같은 문장이랄까. 저 긴 문장이 하나로 엮어 있다는 것, 그러나 어색함이나 어려움이 없이 읽힌다는 점. 저 부분이 특히나 길고 멋진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는 내내 펼치는 페이지마다 찾을 수 있는 형태라는 것. 개성있고 매력적인 말투이며 문체이다.
* 『파과』 읽기 *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의학이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 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흰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p. 278)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p. 238)
'한 티스푼의 설탕에 지나지 않았던 일화들은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다 결국 눅눅해지며 찐득해진다.' (p. 320)
『파과』를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소설이 바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읽은 두 작품이 이리 묘하게 닮았을까. 노년의 살인자라니. 두 책을 꼭 함께 엮어서 리뷰를 쓰고 싶었다.
물론 두 책은 닮은 듯 상당히 다르다. 『파과』의 조각은 여성이고, 방역업자로서 의뢰받은 업무대로 사람을 처리하고, 그 일은 감정이 아닌 돈에 수반되는 일종의 직업으로서 몸만 성하다면 계속되는 일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병수는 남성이고, 연쇄살인범이고, 단순히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가 26년 전, 그 쾌감과 희망이 사라지면서 사람 죽이는 일을 멈춘다. 그리고 몸은 성하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이 책은 조금 색다른 매력이 있다. 문체는 굉장히 간결하고,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 없이 뚝뚝 끊기며 서사에는 계속해서 단절이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가, 이 치매에 걸린 늙은 연쇄살인범이 메모한 기록을 바탕으로 글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파과』의 조각보다 훨씬 뻔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남자가, 읽어가는 기억 속에서 자신이라는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벌이는 사투 속에 피가 섞이지 않은 딸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목이 따르기는 하나, 이 때문에 독자는 후반부에서 훅- 들어오는 잽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 『살인자의 기억법』 읽기 *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p. 98)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이 책은 서점에서 사자마자, 서점내의 카페에 앉아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책이다. 워낙 책의 두께가 얇고, 문체가 짧고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빨리 읽었다고 해서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이 책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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