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표지를 보았다. '시간을 멈춘 듯한 순간'을 느낀다. 어깨에 두개의 양동이를 걸고 노을지는 거리를 걷는 뒷모습이 전혀 쓸쓸하지가 않다. 무엇을 말하는지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져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고단하고 지친 삶이라도 가족이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위해 그들이 기다리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저 뒷모습에서 많을 것들을 보고있다.

일본소설은 요괴가 나오거나 자신의 삶을 밑바닥까지 던져버려 파괴하는, 건조하고 냉정한 내용을 많이 접해본 나로서는 15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안되는 이짧은 소설이 신선했다. 얼마전 읽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처럼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10살 소년 가즈키의 눈으로 바라본 엄마, 할아버지, 삼촌. 가족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이혼한 엄마와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사를 하며 둘이 지낸다. 1970년 K라는 마을에 정착하고 짱구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외할아버지가 나타난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말 거간꾼으로 일하고 사할린으로 나무를 베러가고 노동자들과 함께 다리도 놓았으며 한때는 미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했다. 삶이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다.

할머니, 엄마, 삼촌을 두고 집을 나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수 없이 지내다가 빈털터리로 나타나 할머니가 모아둔 돈을 훔쳐서 사라지기를 바복한다. 다시 나타나면 가던 초밥집에서 경주마 목장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짱구영감을 믿던 엄마는 이제는 도저히 받아드릴수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셋이 함게 생활하면서 엄마는 짱구영감을 괴롭힌다. 한밤중에 손톱을 깍는다던지, 청소하면서 청소기로 치기도 하면서. 그러나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간다. 말도 안되는 환상은 사라지고 불안도 없어지면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엄마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어느날 엄마가 몸져 누워 있을수 밖에 없던 날, 짱구영감은 먼동이 트기전 집을나가 모래펄에서 피조개를 캐고 양동이 두개에 가득 담아왔다. 전차로도 30~40분 걸리는 거리를 혼자 걸어서 말이다. 조갯살을 먹으며, 세사람 모두 밥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때까지 쉬지않고... 피조개를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을 만큼 많았다(p.105) 사랑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엄마와 딸 사이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아버지와 딸 사이의 사랑에 관해서 애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엮어내어 새로웠다. 일상적인, 사소한 이야기들 속엔 특별함이 있다. 늘상 곁에있어 그 소중함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문득, 저녁놀이 지는 하늘을 볼때 어렸을적 내게 누구보다 넓었던 어깨가, 혹은 옷장 옆에 웅크리고 있던 초라하고 쫇은 어깨가 그러나 두개의 양동이를 짋어진 사랑스런 어깨가 기억날 것이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겠지만 모두 소중했던 추억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이기에 마음은 따뜻해 지겠지. 훈훈한 소설이었다.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작가들이 미스터리 황금기를 열게한 계기가 충분했다. 골든에이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하지가 않았다. 심장을 떨리게 하거나 식은땀을 흘릴만큼의 살인사건이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 인물, 설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 황금기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건 또다른 매력이 있어서이다. 어떻게 결말을 풀어갈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속시원하게 원인을 분석하여 마무리를 하고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건지가 아닌 시간과 장소를 분명하게 알려주어서 깔끔했고, 무더운 여름 생각을 깊게하지 않게되어서 좋았다.

 

3층 살인사건, 데드 얼라이브, 안개속에서, 버클 핸드백, 세미라미스호텔사건 5편의 중편이 들어있는데 특히 버클 핸드백은 여성작가로 여성적인 유머와 재치가 숨어져있고 사건을 푸는 섬세한 추리를 볼 수 있었다. 간호사 출신의 여탐장이 조근조근한 말투로 사건을 풀어가는데 별빛조차 없는 밤에 빈집으로 가는 의지와 버클 핸드백을 알아보는, 여자만의 특징을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3층 살인사건은 하나의 반전이 있었다. 아미티지부인의 하숙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있다. 하숙인들의 외모와 풍기는 이미지 묘사가 뛰어났다.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던 내면적인 심리 또한 위트가 있어 지루할 틈이없었다. 데드 얼라이브, 안개속에서, 세미라미스호텔사건. 사건을 해결하는 변호사, 해군무관, 형사의 캐릭터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고 있어 부담감이 없었다. 안개속에서의 여왕의 사자가 목걸이를 잃어벌이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대화에선 생동감이 느껴져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긴박함은 없었지만, 한여름에 로맨스를 원한다면, 법정 스릴러를 보고 싶다면, 무기력함과 몽롱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긴장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세련된 추리가 그리워 진다면 순서없이 아무거나 읽어도 손색이 없는 5편의 중편선이 들어있는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을 권한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고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기억이 없는 대신 인생 초년의 경이를 처음부터 즐기고 있었다.(p.364)

잔니가 알츠하이머병을 두고 이런 농담을 하지 않았던가?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멋져...(p.81)

 

고서적 전문가 일명 얌보는 1991년 4월 심장혈관 계통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있다가 역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후유증을 가지고 깨어난다. 그의 기억은 공적인 기억, 의미론적 기억, 백과사전적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의 기억만 존재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한 정보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나 손자 알렉산드로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보물섬. 고전으로 제목은 알고 있지만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건 자신의 삶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문학의 문장들 인물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독서량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이 달려있긴 하지만 <보바리 부인>,<고리오 영감>,<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등 고전을 미리 접했으면 독자입장에선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느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쓰다가 <신비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부모님의 결혼사진, 어린시절 읽었던 만화책을 본 순간이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어린시절을 보냈던 솔라라의 시골집으로 간다.

40~50년대 이탈리아의 모습들을 보게된다. 마치 작가의 자서전, 직접 현대사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무엇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는지 개인의 역사를 얌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독서를 통해서 신비한 불꽃을 느꼈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얼굴이 후끈거리는 현상, 느닷없이 찾아와 활활 타오르고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또다시 후끈한 기운이 물결처럼 밀려오는 경험을 한다. 바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으로...

다시 생각해 본다. 내 삶은 어떤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어떤 작품들을 잃어버리게 될까? 내게있어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무엇일까?

 

얌보는 자신이 안개를 좋아하고 안개에 관한 글들을 많이 모아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이유는 전혀 짐작할수가 없다. [나에게 왜 안개에 대한 어렴풋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일까?(p.302)] 하권에 그이유가 있을 것이다. 얌보의, 저자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알게 될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 책에는 많은 삽화들이 나온다. 저자 개인의 추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으며 소장품이라고 한다. 그때문에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