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사 문학의 전통이 탄생시킨 고전의 백미
우리 서사문학사의 전통을 고스란히 압축하면서도 그 전통을 뛰어넘는 수작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춘향전》을 책을 통해서 온전히 읽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춘향전은 이본이 백여 종이나 된다고 하는데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100번째 책인 이 책에서는 《열녀춘향수절가》 완판 84장본과 《춘향전》경판 30장본을 싣고 있었다.
물론 현대어로 옮겨내었지만 문장의 멋을 살리기 위해 원전의 어휘 그대로 따른 것이 많고, 사투리와 의성어 등도 그대로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인용되는 싯구와 표현들이 리듬감있게 다가왔다.
특히 완판본에서는 16세 청춘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 아주 발랄하게, 성에 대해서는 꽤 노골적인 묘사와 표현이 담겨 있었다.
요즘 TV의 드라마에서 보는 파격적인 애정행각들이 19세기 우리나라 소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것에 대표주자가 바로 춘향전이라고 한다. 남녀간의 사랑 뿐 아니라, 신분간의 갈등, 당시 관리들에 대한 고발 등의 시대상속에서의 갈등과 대립도 아주 생동감있게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보면 조선시대에도 대중문화적인 문학작품들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현실을 잠시 잊고 벗어나게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것이었음에 분명한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문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책을 읽고나니 춘향전을 '판소리'로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보다 조금 다르게 좀 더 깊이있게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갓비가 내린 바다 흰 물결에 목욕재계하고 앉은 제비가 사람을 보는 놀라는 듯, 별로 꾸민 것도 없는 천연한 절대 가인이라. 아름다운 얼굴을 대하니 구름 사이 명월이요, 붉은 입술 반쯤 여니 강 가운데 핀 연꽃이로다. 신선을 내 몰라도 하늘나라 선녀가 죄를 입어 남원에 내렸으니, 달나라 궁궐의 선녀가 벗 하나를 잃었구나...
p.31 이몽룡이 춘향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목에서.

밝음과 어두움, 현실과 상상의 대립이 바로 《춘향전》을 이끌어가는 서사적 추동력이다....춘향전을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55 춘향전 바로 읽기 중에서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한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정혜윤 씨의《여행, 혹은 여행처럼》을 보고나서 그녀의 책 몇 권을 연이어 읽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찾게 된 이 책은 진중권, 정이현, 임순례, 박노자 등을 비롯한 11명의 독서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어린 시절 책과의 첫 만남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책들과 그 문장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정혜윤씨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이의 인생을 책으로 엮어본 작은 전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한 개인이 책과 만나는 지점에 관한 이야기가 주축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쓰다보면 책에 대한 헌사가 움직이는 정신에 대한 헌사가 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책'을 매개로 한 저자와 독서가들의 충분한 이해와 깊은 공감의 대화들이 '책'에 향한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들이 만난 실로 어마어마한 책들은 그들의 또 다른 책과 작품들에, 그들의 삶 깊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열렬한 독서광들은 그들의 삶에서도 그 열렬함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독서수준을 좀 더깊이 있게 가져가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책 뒷편 부록 <그 혹은 그녀의 책들> 에 담긴 리스트를 참고하여 독서의 폭과 깊이를 넓혀가고 싶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머리를 쥐어짜내며 더디게 느리게 읽을 수 밖에 없는 책들. 제대로 다시 읽기 해보고 싶은 책들을 찾아나설까 싶어졌다....

나는 자신의 책에 대해서 가장 겸허하게 생각했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나의 애독자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그들의 나의 독자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독자일테니까. 나의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는 확대 유리알과도 같이 일종의 확대경에 지나지 않아, 그 덕분에 그들 자신을 읽은 방편을 내가 제공해주는 구실을 한다.
p. 26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 시절》중에서 인용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p.80 산도르 마라이, 《열정》 중에서 인용

쿤데라는 《느림》의 뒷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p.151

*책 뒷표지에 적힌 이 문구. 정혜윤씨의 책들을 자주 언급하고 인용했던 박웅현 씨의 책 《책은 도끼다》의 제목에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