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였을 것이다. 최인훈은 단테의 『신곡』을 읽을 때 본문보다도 오히려 각주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고 진술한 바 있다. 김우창은 이에 대해 ‘소설가적 감각’으로 접근하였다. 소설가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시인과 다른데, 부분에서 시작하여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최인훈의 인식 방식이 각주로 따라붙는 서사적인 내용에 대한 관심으로 귀착된다는 분석이었다. 시인은 소설가와는 달리 직관으로써 세계 전체를 한꺼번에 파악하려고 한다.

『산해경』과 『그리스로마신화』의 차이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리스로마신화』가 서사적인 체계를 종횡으로 탄탄하게 확보하고 있는 반면, 『산해경』은 시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나가는 방식과 『산해경』을 읽어나가는 방식은 다소 다르게 전개되지 않을까. 결국 이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연결될 터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신화에만 열광하는 풍토를 질타하려면 우선 이러한 차이를 섬세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질서는 산문정신을 주조(主潮)로 하는 바, 『산해경』을 적절한 맥락 속에 묶어줘야만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재서 교수가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를 펴냈다. 제목에 등장하는 ‘사라진 신’이란 『산해경』의 신들을 가리킨다. 왜 하필 『산해경』인가. 『산해경』은 “동아시아 이미지의 원천자료”(282)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변용되며 현재까지 이어져왔는가에 대하여 중국, 한국, 일본의 문학작품과 문화를 통해 분석해 내었다. 그래서 부제가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이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으로 나름의 맥락을 만들어내며, 그 안에 『산해경』의 시적인 이미지를 배치하여 설명하는 바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하기야 저자는 1996년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서 이러한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고, 그에 따른 노력의 결실이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인 셈이니 이러한 성과는 당연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던 대목. 책의 앞부분에서 정교수는 “우리가 몰각해온 상상력의 풍토성에 착근(着根)한 작업이 필요하다”(7)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신화비평, 원형비평은 역사와 무관하게 세계 도처에 편재해 있는 인류 공통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이야기되지 않는가. 과연 어떻게 풍토성(역사성)을 신화비평 속으로 개입시켜 나갈 수 있을까. 사실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의 곳곳에서 저자는 이와 연관된 사실들-신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 중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서머싯 몸의 「비」를 분석하고 난 뒤 붙인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동아시아의 신화 모티프를 통해 서구 작품을 바라보는 일도 유효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동서양의 신화는 공통점도 있지만 풍토에 따라 각기 독특한 콤플렉스도 있는데, 상호보완적 견지에서 상대방의 잘 발현되지 않은 신화적 본질을 밝혀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00)인간이 짐승과 변별되면서 신화를 만들어 나간 시기는 금기(윤리)의 형성과 얼추 일치한다. 그렇다면 어떤 신화에도 나름의 콤플렉스가 동반하고 있을 터, 그 콤플렉스 자체에 이미 풍토성(역사성)이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윤리의식의 근본적인 성찰 위에서 『산해경』을 읽어나가는 것은 어떨까.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는 그런 점에서 흥미를 끄는 저작이다.

삶의 기본적인 형식은 상당히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숨은 내뱉은 다음 들이마시고[呼吸], 눈꺼풀은 한 번 열린 다음 한 번 닫힌다. 그리고 먹었으면 배설하는 것이 존재의 법칙이니 퍽 “단순한 형식”(「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양론(陰陽論)의 지적에 의한다면, 인간은 그 단순한 호흡조차 제대로 못해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 아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사이에, 음식물을 먹고 배설하는 사이에,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무거운 생활이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 속에 갇히면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 보일 리 없다. 생활을 관조할 수 있는 “미묘한 거리”(「문득, 집 앞에서」)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는 나의 힘』의 미덕은 분명하다. 가령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이력서를 부치는 시인의 심정을 보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생활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하지만 반성적인 거리는 마지막까지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그래서 “멀리 보니 보인다”(「멀리 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한 반성이라고 할까. 현실(생활)의 지반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저 하늘 위로 비상하려 했던 대표적인 시인으로 김수영을 꼽을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치열한 반성이었던 바, 김수영의 후기 시편에 흐르는 시간과 정지한 순간의 충돌로써 꾀한 모더니즘의 형식을 제거하고 나면 황규관의 『패배는 나의 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생활의 “비루함”(「전기 콘쎈트가 망가진 게 언젯적 일이냐」)을 처절하게 자각하면서도 맞대면을 통해 나름의 혁명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가난해서 성자가 되는 길을 나는 모른다/ 겨우내 허공 가득히 써놓은 눈발의 언어를/ 끝내 읽지 못한 것이다/ 내 꿈은 은행 빚을 탕감 받는 게 아니라/ 이 비루함을 더 큰 비루함으로 완성하는 것,/ 그게 혼자 끙끙대는 혁명이다”(「쇳소리).

아마 ‘혼자 끙끙대는 혁명’에 근거하지 못한다면 어떤 위대한 혁명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풀잎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혁명의 노래야”(「낮은 목소리」)라는 진술이 감동을 자아내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청춘의 불로 지진 사랑이/ 식지 않은 분화구가 되어/ 더러는 아픔을 빛나게 증명하듯/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다”(「아픈 세상」)라는 진술이 한낱 말장난으로 전락하지 않는 까닭은 “무명이 백광(白光)을 품고 있다// 바람도 함성도/ 모두 무명의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만든다”(「무명」)라는 전회(轉回)의 가능성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패배는 나의 힘』이라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는 분명해진다. 좋은 시집이 그러하듯 『패배는 나의 힘』은 시 작품을 한 편, 한 편 오롯하게 읽어나가야 제 맛을 전달할 수 있는 시집이다. 분량의 한계로 이렇게밖에 못쓸 경우 평론가 됨의 답답함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조용미의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을 읽다보면 여성이 스스로를 향해 벼리는 투명한 인식이 어떻게 연륜의 깊이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화려했던 날들의 욕망과 그로 인해 생긴 상처를 다독이면서 삶을 힘겹게 끌어안는 과정이 울림으로 남는다. 가령 표제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여기 두 그루의 앵두나무가 서 있다. “한 그루는 꽃을 가득 피우고 섰고/ 꽃이 듬성한 한 나무는 나를 붙잡고 서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어느 편 앵두나무에 근접해 있는가의 여부이다. 만개하게 꽃을 피우던 시절을 지나쳐 보내고 듬성듬성 꽃을 피워내는 시절로 기울고 있는 시인의 처지가 상징적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며 느끼는 “멀거니”라는 거리감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 위에서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듬성듬성 앵두나무 앞에서 나는/ 멀거니 저쪽 앵두나무를 바라보네”.

삶은 자연의 변화[流行]를 인정하고 그 흐름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의 성찰 수준으로 올라선다. 매 순간 기대할 수 있는 생성하는 의미의 충만함이란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깊이를 획득하게 된다. 그렇지만, 앎을 삶으로 이끄는 데는 얼마나 많은 수신(修身)의 공부가 필요한가. “앵두가 열리려면 저 꽃이 다 떨어져야 할 텐데/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 무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이를테면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은 바로 그러한 성찰적 자문(自問)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젊은 날의 사랑이란 어쩌면 “생을 가르는 劍”(「검은 담즙」)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열정과 상처 속에서 삶은 한순간 뿌리째 뒤흔들려 버리니 말이다. 시인은 “알 수 없는 기다림”에 붙들려 있었는데 상대는 “고독한 눈빛을 지닌 검객의 얼굴”로 다가왔다고 진술하고 있다(「平生圖」). 「소나무」는 그렇게 하여 생긴 흉터를 안고도, 흉터투성이의 몸으로 ‘이곳’을 넘어 ‘저곳’으로 넘어가는 양상으로 펼쳐놓은 작품이다. 이 시가 시집의 가장 앞에 배치된 까닭은 바로 “우뢰를 먹은 나무는 암자의 산신각 앞 바위 위에 외로 서 있다/ 암자는 구름 위에 있다”는 정신의 높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며 내리쳤으나/ 나무는 부러지는 대신/ 번개를 삼켜 버렸다/ 칼자국이 지나간 검객의 얼굴처럼/ 비스듬히/ 소나무의 몸에 긴 흉터가 새겨있다/ 소나무는 흉터를 꽉 물고 있다/ 흉터는 도망가지도 없어지지도 못한다/ 흉터가 더 푸르다/ 우레를 꿀꺽 삼켜 소화시켜버린 목울대가/ 툭 불거져나와 구불구불한/ 저 소나무는”.

‘저곳’에 이르기 위해 시인은 부단히도 노력했고,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에는 그러한 노력이 이동과 정지의 팽팽한 긴장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 제 몸의 흉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긴장을 견디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