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부러운 것은 별로 없는데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면 정말 역량있는 미스테리 작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들어본 작가(물론 일본에서는 유명 작가 이겠지만)들의 작품들마저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재밌다는 점에서 일본의 미스테리 작가층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되는 듯 합니다.

 

이 소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적는다면 본격 추리소설이긴 한데 그 설정이나 내용, 사건 해결 과정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점입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대학생들이 기존의 정형화된 본격 추리의 틀을 깨고, 망상이라는 전제하에 다소 엉뚱하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지만 나중에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체계적이고 화들짝 놀란 정도의 반전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참 세련되게 보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단서도 없는 상태에서 관련된 학생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정황증거 만으로 사건에 대한 추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것은 명확한 물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애들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묘하게 사건의 해결에 빠지게 하는 독특한 몰입감을 주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방식은 이 소설에서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노리즈키 린타로, 아야츠지 유키토 등과 함께 신본격작가로 널리 알려진 중견 작가로 특히 헨(일본어로 독특함)본격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대강 납득이 갑니다.

 

<그녀가 죽은 밤>은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의 레벨이라면 이미 일본에서는 출간되어 있는 후속 시리즈의 작품들 역시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오랜만에 미스테리 소설을 읽으며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니시자와야스히코, 미국, 술, 와인, 머리카락

솔직히 이 작품을 보고 '또 기차야....' 하는 한 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일본 작가들의 열차 사랑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하긴 이 작품이 써진 것이 요즘은 아닙니다).

 

한 숨을 쉰 또 하나의 이유는 이런 시간표 가지고 추리를 벌이는 소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의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한 숨 속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도 다소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요즘은 CCTV의 천국이라 아마도 이 소설 속의 범죄가 발생하면 단박에 범인이 잡혀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CCTV야 말로 21세기 첨단문명이 낳은 최고의 명탐정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나 역시 70~80년대에 사는 사람의 시각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음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이상과 같이 생각을 정리하고 읽어본 바로는 이 책이 상당히 재미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작가가 다름아닌 <시마다 소지>라는 것도 왠지 모르게 책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듯 합니다.

 

이 소설의 주요 트릭은 범인의 알리바이 깨끼 입니다. 이미 범인이 누군지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밝힙니다. 근데 문제는 오로지 심증일 뿐 물리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범인은 '어디 한번 열차 시간표가지고 내 알리바이를 깨 봐라'고 자신있게 도전합니다. 당연히 범인이 가지고 있는 시간표는 사건이 발생한 열차의 시간표와 맞지 않습니다.

 

소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 부터입니다. 단서는 오직 열차 시간표! 다소 번거로워 보이는 기차 열차 트릭은 꽤나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본격 추리의 마니아적인 열정이 느껴져 읽기에 즐거움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경우의 수를 탐구하고 써 내려가는 작가의 열정 또한 감탄하기에 충분합니다.

 

여기에 양념으로 등장하는 오로치의 전설 등 일본색이 가득한 내용들로 많은 힌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근데 사건의 결말은.... 의외로 허무하게 끝나긴 합니다. 이게 알리바이 깨기의 한계일까요? 어차피 물증이 없으면 알리바이 트릭을 간파하더라도 우연이라 치부해 버리면 되니까...정말 허무하긴 하네요.

 

이 작품은 아주 명작까지는 아니어도 알리바이 깨기 트릭에 상당히 충실한 본격 미스테리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본격 미스테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 도전해 볼만 합니다.

시간표, 시체, 열차, 차장, 역사

우연히 읽어 본 소설에서 뜻밖의 기쁨을 얻는 것 처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후카미 레이치로>라는 작가도 처음 들어봤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유명세를 탄 작품도 아닌 듯 한 이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본격 미스테리 소설을 만난 것 같아 기쁜 마음이 앞섭니다.

 

과거 <대회화전 - 모치즈키 료코>이나 <샤라쿠 살인사건 - 다카하시 가츠히코><미술관의 쥐 - 이은 작> 등 회화와 관련된 미스테리 걸작들을 읽어 보았지만 이 소설처럼 회화, 그것도 20세기 초반 <에콜 드 파리>라고 불리는 일인 일파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주제로 밀실살인사건에 도전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 소설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소설의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밀실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전형적인 본격 미스테리 소설의 형식이 그것이고, 둘째는 피해자이자 유명한 화상인 아카츠키 히로유키가 남긴 소설 속 가공의 저서 <저주받은 화가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각 장마다 소개되고 있는 히로유키의 글은 작가가 예술에 조예가 없었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내용으로 에콜 드 파리에 속하는 화가들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 수틴, 파스킨, 위트릴로, 사에키 유조' 등등 실제 존재했던 화가들의 불우한 인생....저주받았다고 할 만한...과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예술적인 학습효과 뿐만 아니라 소설의 스토리에 몰입도를 부여하는 상승작용까지 하고 있습니다.

 

마치 연극의 성공을 위한 훌륭한 무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과 융합을 시켰지만 이 소설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본격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비극적인 화가들의 인생을 전제로 깔고, 그 작가들의 그림들이 걸려있는 화랑에서 일어나는 밀실 살인사건...이건 환상의 조합입니다.

 

이 소설 중간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도 있는데 형사들의 수사회의를 통해 밀실살인사건에 대한 고전적 정의와 밀실살인사건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그것입니다. 도대체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서 밀실살인 사건을 만들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사실 이 질문 속에 이 사건의 해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마다 소지나 노리즈키 린타로, 아야츠지 유키토 등의 본격 미스테리에서 볼 수 있는 '독자에 대한 도전장'도 이 소설 속에 있어, 도전의욕을 자극함과 동시에 과거 본격 미스테리를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향수 또한 느껴졌습니다.

 

사실 범인 맞추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어 보고 어떠한 방식으로 살인이 이루어 졌는지까지 한 번 도전해 본다면 색다른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말 역시 생각 이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여서 꽤 놀랐습니다. 

파리, 회화, 밀실, 문학, 후카미레이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