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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른으로 살게 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가지는 중요함으로 따진다면 어린 시절의 시간들이 압도적으로
중요하고 또 훨씬 더 농밀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 취향 됨됨이 그 모든 것들이 결정되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흑백티비가 컬러티비로 바뀌고 유선 전화가 무선전화로 휴대전화로 진화하고
모뎀이 찍찍 거리던 시대의 컴퓨터와 손안에서 휙 휙 바뀌는 시대의 컴퓨터를 모두 사용하면서
세기말을 건너 온 시간들을 살아갔다는 것이 나는 즐겁다고 생각된다.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온 그 시간들을 가끔 돌아보면, 그 때는 중요하다고 여겼던
기억들 보다 오히려 별 거 아니라고 여겼던 순간들이 강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전학 가기 전에
다녔던 넓은 학교의 운동장과 운동장 구석에 짙은 그늘을 만들던 보랏빛 등나무꽃이나 털이 숭숭난
송충이들이 꾸물거리던 것들, 일요일에 들렀던 교실의 텅 빈 책상들, 분필가루를 털던 벽면의 얼룩,
오래 입어 맨질거리던 교복 치마의 까쓸한 감촉, 햇볕에 달궈진 페인트가 벗겨진 철봉의 같은 것들
말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수박향기>는 그런 여름의 추억들을 모은 이야기이다. 어찌보면 시시하고 별볼일
없는, 그러나 어쩌다 보니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기도 하는 그런 기억들 같은 것들 말이다. 뜨거운
햇볕 속에 녹아버릴 것 같은 시덥잖은 비밀들이지만, 녹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끈질기게 남아버린
것 같은 기억들의 이야기. 어떤 것은 괜찮고 어떤 것은 그냥 그렇고 그런 짧은 이야기들의 모임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의 소설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읽게 되는데 근래 그녀의 이야기들은 전에 말했던
그런 쿨함과 사뭇 달라진 것 같다. 이번엔 쿨하기 보다는 어던 끈적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느껴진달까.
아마도 묻어둔 유년과 비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째든 여전히 긴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은 어렵겠지만 순간의 아스라함을 캐치해내는 섬세한 시선을 가진 그녀임은 분명하다.
그리 즐겁지도 쿨하지도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수박향기>였다.
- 다락방서 허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