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칼로써 말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 본문 106에서
*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앞에 놓인 운명에 맞서서 살아가게 됩니다. 온전히 자신이
가진 것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맞설 수 없지요. 나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내 인생 앞에 내 바다 앞에 내 운명 앞에 서 있는 걸까 내게 묻습니다.
네, 이제서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왜.. 냐 물으면 작가가 마초라서..ㅋㅋ
그리고 저는 전쟁 이야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이 작가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삶과 생각이 작품과 또 무관한 것은 아니어서
어떤 소설들은 평이 좋아도 작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 손이 가지 않곤 합니다. 대놓고
마초인 이 아저씨의 에세이를 하나 읽었고, 후에 소설은 <흑산>이 처음이었습니다.
<흑산>은 깐깐한 그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이 모여 이루는 소설은 문장에 밀려 제대로 이야기로
전달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깐깐하고도 미려한 문장이 외려 이야기를 단단하게 뭉쳐내지
못했던 드문 경우라 여겼었습니다. 물론 제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요.
그런데 <칼의 노래>는 달랐습니다. 마치 무당이 접신을 한 듯이 작가는 다 지워지고 그저 거기에
충무공 이순신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왜 다들 <칼의 노래>가 접신하듯
써내려간 작품이라 말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읽는 내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전쟁이 싫고, 전쟁 이야기도 싫고, 군대 이야기도 별로입니다. 진짜 사나이 따위.. 흥
보지도 않습니다. ㅋ 어떤 명분과 목적을 들이댄들 결국엔 죽이고 죽는 피난장의 허깨비들 뿐인 것이
전쟁. 수 천, 수 만의 그저 숫자로만 기록될 뿐인 어처구니 없는 허망한 죽음들.
그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고, 허울과 명분뿐인 전쟁에서 끊임없이 죽을 자리를 찾는
그의 헛헛한 생애가...장면마다 문장마다 와르르 쏟아집니다. 이순신에 대해서, 임진왜란에 대해서
힘없는 국가와 전쟁과 삶과 죽음의 어처구니 없음에 대해서, 그럼에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영웅들과 의인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이순신. 우리는 그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고, 또 앞으로는 또 얼마나 더 오해하게 될런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의 절망, 허무함,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싸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의 애절함이 내내 절절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운명의 파도. 피할 수 없고 피하지도 않을 운명에 맞서는
한 영웅의 이야기. 제겐 숙제 같았던 책 김훈의 <칼의 노래> 좋았습니다.
- 다락방서 허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