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나 민족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반면 아무리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신화나 전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를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 살면서 아름다운 신화를 지키며 살아온 홍인족(紅人族)을 멋대로 ‘야만인’혹은 ‘인디언’이라 부르며 말살시킨 뒤 세운 미국은 족보 없는 졸부 같다. 반면 수많은 신들의 고향이었었던 그리스는 가난해도 명예로운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시선이다.
오늘날 신화와 전설은 단순한 정체성 확립이나 전통 보존의 의미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콘텐츠’로 활용된다. 또한 경제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자연스럽고 거부감이 들지 않게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신(神)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방을 하자마다 문화와 전통을 상업화하는데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중국을 보자. 온갖 야담이 기록된 고서(古書) ‘요재지이’ 속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천녀유혼> 하나를 가지고도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의 영화팬들을 매료시키지 않았던가.
▲ 고천락, 유역비가 주연을 맡은 '천녀유혼(2011)'. 천녀유혼에는 유교, 불교, 도교뿐 아니라 민간 설화까지 모두 섞여있다.
아름다운 요괴와 어수룩한 인간 남자의 사랑 이야기 속에는 시신을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주는 유교, 부처님의 경전으로 귀신을 제압하는 불교, 부적과 환술로 요괴를 퇴치하는 도교에 민간 설화까지 모두 섞여 있지만 이를 종교로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룰 수 없는 가슴 아픈 인연의 절절함에 눈물지을 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일본은 어떤가. 다소 스케일이 작은, 내수용 신화와 전설, 설화들은 그대로 잘 보존하는 한편 인지도가 높은 중국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새로운 작품들을 척척 만들어낸다. 중국의 고대소설 <서유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최유기>에서는 여자를 좋아하는 바람둥이에 욕망에 충실한‘저팔계’야말로 현대사회와 가장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캐릭터임을 보여주고, 후한 말기 혼란스러웠던 난세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로는 게임을 만들어 수많은 중독자와 폐인을 양성하고 있다.
또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자. 기독교에서 신의 아들은 예수님 단 한 명뿐인 이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의 아들과 딸은 넘쳐난다. 하지만 여기에 이단이라고 불만이나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신데렐라에서 요정이 호박을 마차로 만든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 때 명백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종교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대신, 생기발랄한 생명력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닌 캐릭터가 되어 자유를 얻었다. 숭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는 대신 흥미로운 설화와 전설로 남았고, 예술과 문화 속에 스며들었다. 아름다움에 집착하며 인간적인 희로애락에 연연했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수 백 년이 지난 후, 사람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다시 창조된 그들은 신(神)으로써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지금, 오히려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않은 개성과 복잡한 족보를 자랑하는 신들이 있다. 바로 1500여 년 전, 들어와 우리의 토착 신들과 한 가족이 된 불교의 신들이다. 불교(佛敎)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만 바라보면 교양다큐멘터리 같은 경전과 법문의 딱딱함에 눈꺼풀이 저절로 무거워진다. 하지만 불교에도 ‘재미’를 담당하는 캐릭터가 있고, 시공을 초월한‘웃음’ 코드가 있다. 그 대표적인 주인공이 바로 신들의 왕이자 하늘의 주인, 흔히 옥황상제(玉皇上帝)로도 불리고 석제환인(釋帝桓因)으로도 불리는 제석천(帝釋天)이이다.
그럼 지금부터‘제석’이라는 친근한 이름의 1인자와 함께 엄숙함과 지루함을 쏙 빼고 재미와 감동이 함께하는 불교의 예능 버라이어티인 신화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