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95주년 삼일절이다.

 

여러 국경일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날이라느니,

삼일운동이 아니라 삼일혁명이 맞다느니 하는 주장들이 나온다.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드러내지는 못하고 마음 속에서 드는 의문이 있다.

'So what?'

 

 

 

1945년 8월 15일을 우리는 '독립기념일'이라 부르지 못하고

'광복절'이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부른다.

해방은 삼일운동을 위시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꾸준한 노력으로 얻어진 결실이라기 보다는,

일본이 무모하게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패전한 부수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독립운동은 결국 실패한 역사일 뿐인가?

 

 

 

<역사 e> 두 번째 책에는 유난히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분들 뿐만 아니라,

경찰서의 한 오래된 케비넷에 방치된 채 먼지로 덮여 있던

6264명의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도 있다.

심지어 십대 여학생들과 기생까지도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울렸던 이야기는

'파락호의 비밀'이라는 방송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학봉 김성일의 13세손

김용환은 당대 최고로 악명 높은 파락호였다.

조상들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하였다.

심지어 딸의 시댁에서 장롱 사 오라고 보내온 돈까지 없앤 통에,

결국 딸은 할머니가 썼던

오래된 장롱을 가져 가서 갖은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돈들은

고스란히 만주의 독립군 자금으로 들어갔다.

비록 자신은 이미 일제에 적발되어

직접 독립운동에 가담할 수 없었지만,

파락호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독립군의 생명줄과 같은 군자금을 모아서 보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오랜 친구가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게."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져 준다.

얼마 전 김연아 선수가 경기력과는 무관하게 편파판정의 피해를 입었듯이,

세상 일이라는 것이 우리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김용환 선생이 파락호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사명을 이룬 것 처럼,

수 많은 선혈들이 일제의 암흑 속에서도

조국 독립이라는 사명을 다해 나갔다.

어떻게 해방이 되었냐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절망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났던

이 분들의 의로운 기개이다.

어떤 사람이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자기 자신을 직면해야만 한다.

 

지금의 나란 결국 지난 시간동안 축적되었던 과거의 나의 총체이다.

이 점은 한 나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수치스럽더라도 그러한 부끄러움의 역사가 바로 오늘의 우리이고,

나아가 미래를 규정한다.

 

 

 

"지식채널 e" 와 유사한 방식으로 5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역사의 에피소드를 간명하게 알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 "역사채널 e" 이다.

이 책 <역사 e>는 그 중 스물 한 편을 뽑아서

그 배경 이야기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프롤로그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역사적 펙트를 복기하는 일은 자기 상실을 극복하는 첫 단계다'

 

 

 

얼마 전 소치올림픽 폐막식에서 보여 준 평창에 대한 퍼포먼스는

한 마디로 '정체 불명' 이었다.

아리랑에 가야금, 학 등이 한민족을 말해주지 않냐 하겠지만,

나름 문화 평론까지 쓰는 나 조차도

저게 도대체 뭐지 싶을 정도로 난잡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던 일본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이 허둥지둥 쫓아왔던 한국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반 만년의 기나긴 역사가 있다.

이 책에는 대간, 실록, 칠정산 내외편 같은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가슴 아프고 수치스러운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도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서도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야만 했던

'환향녀'에 대한 방송이 가장 가슴 아팠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맥락의 위안부에 대한 방송과,

백성을 그저 착취의 수단으로만 대했던 한심한 왕자들에 대한 내용이

과연 오늘날은 뭐가 나아졌나 자문하게 만들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

지난 연말 가장 이슈되었던 영화 <변호인>에서 언급된 바 있는

역사학자 E.H.카의 책 <역사란 무엇인가>는

오늘날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 일반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기에,

역사가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얼마 전 일본 대표팀과의 A매치 축구경기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일본 측의 항의를 받은 적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얼마나 역사를 잘 알고 있는가?

고작 중고교 교과서에 나오는 딱딱한 암기사항이나,

근거조차 모호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야사 정도만 알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박시백 화백의

대하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매우 높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 태조로부터 25대 철종 임금까지의 475년 역사를 담고 있는 실록은

가장 잘 정리된 정사이다.

 

 

 

여지껏 나온 수 많은 역사만화는 정사 보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야사 중심이었다.

작가는 왕조실록을 기본으로 하고 수 많은 다른 책들까지 참조하여,

독자들 스스로 이 시대에 대한 주체적인 사유와 판단을 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마치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동감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캐캐 묵은 교과서적 나열에서 벗어날 수 있음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읽어왔던

수 많은 역사 관련 만화들 중 가장 유익하고 참신한 만화였다.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노력을 이 만화에 쏟아붓고

마침내 완성시킨 화백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