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라는 제목의 책을 펼치면서, 나는 중국 영화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가 한때 열광했던 <천장지구>, <화양연화>, <무간도> 같은 영화는 홍콩영화이지 중국 영화는 아니다. 알고 있는 중국 감독을 떠올려 봐도 장이머우, 첸카이거, 자장커 정도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지인들에게 물어도 중국 영화에 관해선 잘 모른단다. 인터넷 영화커뮤니티를 둘러봐도 중국 영화보다는 홍콩영화에 열광했던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를 살펴보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 류원빙은 중국인으로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어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이 특이한 이력의 저자는 시대에 따라 중국 영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아는 것이 중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는 것 같다. 중국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중국 영화도 그에 맞춰 변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영화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또는 대표해야한다고 여겨지는 인물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보급으로 쇠퇴기에 접어드는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중국인민들에게 중국 영화는 거의 유일한 오락이었다. 1979년에는 중국인들의 평균 영화 관람횟수가 월 2회에 이르렀다고 하니, 중국인들이 영화관을 얼마나 빈번하게 찾았는지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저자는 중국의 검열제도에 대해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한다. 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약 10년 간 성인 영화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톈안먼 사건 이후 문화 규제 정책으로 중국의 성인 영화는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중국에는 영화 등급 분류제도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영화감독들에게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이 추가로 부여되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성인영화에서 나타났던 관음증적 시선이 <국두>(장이머우, 1990), <홍등>(장이머우, 1991), <패왕별희>(첸카이거, 1993) 등 제5세대 감독들 작품에 계승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어쨌든 <색, 계> 같은 영화는 원본 그대로 상영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스꽝스런 일화가 벌어지기도 한다. <색, 계>가 중국 본토에서 개봉됐을 때, 검열로 삭제된 베드신이 포함된 무삭제판을 보려고 중국 본토인들이 홍콩으로 관광을 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른바 ‘<색, 계>를 보기 위한 홍콩 투어’란다. 

 

저자는 이러한 중국 영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류샤오칭과 조안 첸이라는 두 여배우를 꼽는다. 사실 나는 류샤오칭이나 조안 첸이 주연한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저자가 전하는 두 여배우의 삶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문화대혁명 종결과 함께 데뷔한 두 여배우는 당시 황폐해진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감 있게 어루만져주었다. 이후 류샤오칭은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여성상이 깃든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시대의 욕망을 드러내주었으며,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한 조안 첸은 세계화 진전에 따른 중국인들의 사고 변화를 연기활동으로 체현해주었다. 한국에서 류샤오칭이나 조안 첸에 비견될 여배우를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책 말미에 실린 자장커의 인터뷰만으로도 이 책은 일독할 만하다.(물론 몇 년 전 위구르 문제에 관한 자장커의 대응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가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허우샤오셴 감독이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감독이 어떻게 자장커 감독의 영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등과 같은 답변을 통해 이 인터뷰에는 그의 영화적 밑거름을 살펴보는 것은 귀한 경험이었다. 또한 문화대혁명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인상에 관한 자장커 감독의 답변은 중국 전반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으니 각별히 챙겨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어떻게 경쟁력을 갖출 것인지 고민하듯 중국의 영화인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무엇보다 여전히 문화의 첨단에 있는 매체인 영화를 통해 중국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흐뭇하다. 중국의 사회사를 정면으로 기술하는 책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수 없는 포만감도 얻게 된다. 나른한 봄에 하루를 통째로 잡아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감상하며 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를 내 마음 속에도 되돌려 보고 싶다.

중국영화의열광적황금기, 아시아총서, 류원빙, 홍지영, 산지니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종종 받게 되는 질문이다. 아니, “예술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 듯하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의 어조는 정중하거나 상냥하지 않다. 대개는 ‘따지듯이’ ‘도발하듯이’ ‘신경질적으로’ 질문한다. 마치 자신이 예술이란 것과 원수를 지고 있다는 듯이. 어쩌면 이것은 우리 삶에서 예술이 너무 멀리 있고, 선택받은 소수만이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술 수업]의 저자 오종우 교수는 예술은 실용적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예술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우선 ‘실용’이란 말의 의미를 되짚어 준다. 실용은 실제로 쓸모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쓸모가 없어지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예술이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소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실용적임을 증명하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인용하며 “주어진 규율과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게 실용적인 태도”라는 생각을 교정해 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매뉴얼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변한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변하는 현실을 창의적으로 해석해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실질적인 삶의 태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런 창의적 해석을 하게끔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너무도 적절해서 뼈아프게 느껴지는 지적이다. 흔히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학문들로만 훈련받은 사람들이 막상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작년에도 끊임없이 목도했고,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예술이 우리 삶에서 필요하다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예술작품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음악과 미술,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직접 보여준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응시하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음악감상을 위한 QR코드도 있고, 생생한 도판도 있고, 단편소설도 수록돼 있으니 이보다 간편할 수는 없다. 아마도 살면서 수백 번은 들었을 에리크 사티의 <짐노페디>를 오종우 교수의 문장을 읽으며 다시 들으니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진다. 이 곡에서 저음과 고음, 꿈과 현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칸딘스키의 그림과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Ⅱ>를 함께 감상하면서는 대상을 계량화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도 느낀다. 이처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예술을 어떻게 독학해야 할지를 배운다. 이를 테면 ‘드라마’의 성질은 위해서는 그 형용사 ‘드라마틱’에서 알 수 있다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명사로 굳어진 용어나 개념의 본질을 알기 위한 출발점은 그 것이 아직 굳어지기 전의 상태, 즉 형용사의 형태로 나타내는 의미를 밝혀보는 일입니다.” 이런 말은 더 이상 어떤 교육기관에 적을 둘 일이 없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고마운 조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반가웠던 대목은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관한 수업이었다. 이 소설은 내가 가장 여러 번 읽은 단편 소설이다. 뭐, 이 소설이 마냥 좋아서 되풀이해서 읽었던 건 아니다. 단지 체호프의 작품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기에 펼쳤던 소설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무엇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끝내 나는 이 소설에 깃든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남녀의 불륜을 다룬 이 소설이 왜 뛰어난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예술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내가 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진가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이야기의 큰 줄기에만 주목했을 뿐 체호프가 이야기 사이에 숨겨둔 아름다운 가지와 꽃들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사소해 보이는 주인공 구로프가 딸이 나누는 대화 에피소드를 놓쳤던 것이다. 체호프가 무심한 듯 던져놓은 이런 소소한 대목이 어떻게 사실(fact)와 진실(truth)의 관계를 보여주는지 저자는 내게 일러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이제껏 내 삶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음악이나 미술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살아온 게 억울해서였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저자는 책을 닫으면서 예술작품을 통해 얻어진 지적 능력이 우리 삶에서 왜 필요한지, 그러니까 "예술이 스며드는 삶" 왜 있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노예인지도 모르고 노예처럼 사는 사람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다릅니다. 삶의 질도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의 질도 달라질 것입니다.”

 

요 며칠 사이 정치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상식마저도 무시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치욕으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이런 사회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을 현실 속으로 자꾸만 스며들게 하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테다. 이 책은 "예술이 스며드는 삶"을 살고 싶으나 방법을 몰라 서성거리는 이들을 위한 명쾌하고 친절한 안내서다. 이 명쾌하고 친절한 수업을 계속해서 경청하고 싶다.

예술수업, 오종우, 어크로스

 

책을 읽으며 자꾸만 저자의 성별을 확인해야 했다. 분명 남성 작가가 썼는데, 이렇게 귀여운 글을 쓸 수 있다니! 아마 그 동안 귀여운 그림체를 잘 구사하는 남성 만화가는 많이 봤지만, 귀여운 글을 쓰는 남성 작가는 별로 만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긴, 나 자신 남자이지만,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귀여운 걸 마다할 리가. 조금 오그라들 수는 있어도 말이다.(물론 이 여행기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저자 플로랑 샤부에는 프랑스인. 단지 자신의 여자친구가 인턴십을 도쿄에서 한다는 이유로 도쿄에 발을 내딛는다.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저자는 여섯 달 동안 도쿄 구석구석을 용감무쌍하게 돌아다녔고, 그 결과 아기자기한 그림과 재기 넘치는 글이 들어있는 도쿄 여행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프랑스보다도 더 많이 보이는 금발들이나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모습, 일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올린 머리, 코즈모폴리턴 스타일 등 그림을 그리는 저자의 눈에는 도쿄의 모든 것이 관찰 대상이다. 저자는 교통비를 포함한 도쿄의 물가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준다. 역시나 듣던 대로 도쿄의 물가는 만만치 않은데, 저자는 과일이 비싸다는 걸 증명하려고 친히 필기도구를 챙겨들고 슈퍼에 가서 과일 가격을 열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저자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 까지 했는데, 덕분에 일본경찰들의 특징이며 “지하 주차장을 지상으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일본 경찰서도 엿볼 수 있었다. 한국과 관련한 일화도 나오긴 한다. 그 이야기인즉, 새로 세워진 교회의 한국 아줌마들로부터 전도를 당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한국 교인들은 참으로 대단하지 싶다.

 

 

 

저자는 마치야(북부 외곽), 오쿠보, 하라주쿠, 신주쿠, 다카다노바바, 오모테 등 도쿄 여러 지역들을 지도로 그려 보여주는데, 이 책을 가지고 그 지역들을 실제로 돌아다녀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림이 예쁘다. 막상 가보면 어떨까? 저자는 도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한다. 도쿄를 낭만적 공간으로 그릴 의도는 눈곱만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도쿄에서 굳이 가보지 않아도 될 명소들까지도 짚어준다. 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는 명성과는 달리 별 볼일 없으며, 도쿄 최고의 인공해변이라는 오다이바도 가까이서 보니 물이 지저분하다고 한다(그런 걸 무릅쓰고라도 직접 가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긴 하다).

 

  

저자의 장난기 넘치는 그림과 글 덕분에 계속 킥킥대며 읽었다. 일본의 대표 아이돌 그룹 SMAP의 멤버들을 소개하면서 여섯 번째 멤버로 아베 신조를 소개하는 대목에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건축에 관해 “빌딩이든 가정집이든 일본 건물들은 붙어 있지 않다. 항상 적어도 10cm(초미니 골목)을 두고 있다. 그런 길은 쥐와 바퀴벌레가 가장 행복해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그렇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도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과장이겠지만, 도쿄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것도 무척 행복한 마음으로. 아마 일정한 소속에 매여 있는 사람이 몇 개월씩 도쿄에 머무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도쿄를 샅샅이 훑어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책이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도쿄에 가고 싶어질 때마다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들고 이 아늑한 느낌의 색연필 그림을 통해 도쿄를 경험하고 싶다.

 

 

도쿄산보, 플로랑샤부에, 자음과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