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나는 추리소설을 단 한 번만 읽는다. 추리소설을 읽는 행위는 작가와의 두뇌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 싸움은 단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고 범행과정을 추적하고 나면 미스터리소설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되풀이해서 읽게 된 추리소설이 있는데, 지금 소개하려는 『모방범』이 그것이다. 이 소설이 왜 내 마음을 쳤을까. 세 권을 합해 1500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소설을 기어이 다시 펼치게 만들까. 아마도 다른 미스터리소설에는 없는 무언가가 이 소설엔 있기 때문일 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 작은 글을 읽게 될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여기, 세상 어디에도 마음 둘 데 없는 소년이 있다. 소년의 이름은 쓰카다 신이치. 얼마 전 강도 살해로 가족을 잃었다. 더 끔찍한 일은 그 참혹한 죽음의 최초 목격자가 바로 이 소년이라는 것. 이 소년은 강도 살해 사건이 일어난 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자기가 친구에게 자기 집에 큰돈이 생겼다고 자발없이 말하는 바람에 이를 들은 자가 강도 살인을 일으키게 된 것이라는 죄책감이 이 소년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데, 더 나쁜 일이 벌어진다. 이 소년이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쓰레기통에서 어느 여자에게서 잘려나갔는지 모르는 오른팔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다른 한편에 손녀의 행방을 몰라 괴로워하는 노인이 있다. 아리마 요시오 노인. 3개월 전 행방불명된 손녀 마리코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공원에서 발견된 오른팔이 마리코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요시오 노인은 잠시 안도하지만, 연쇄 여성유괴사건의 범인은 더 큰 고통을 노인에게 안겨주려고 한다. 이 불쌍한 노인에게 범인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범인은 노인을 실컷 농락한 후에야, 마리코의 유골이 발견되게 만든다. 그리고 딸 마치코마저 정신을 잃고 숨을 거둔다. 아, 이제 이 선량한 요시오 노인은 세상에 홀로 남았다.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일은 이 두 인물의 불행한 삶과 마주쳐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괴롭다. 거기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미야베 미유키의 매서운 펜 끝을 보고 있으면 책을 덮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의 펜이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 하게 된다. 이를 테면 원조교제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다카 치아키라는 여고생이 희생된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그렇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치아키의 동급생이 인터뷰에 응하면서 울고 있었다. 치아키의 문란한 생활을 잘 아는 소녀들이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아니 동급생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벤트에 직면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2권 97쪽)
도대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범인은 누구인가? 미야베 미유키는 범인이 누구인지 숨길 의사가 없다. 이 소설은 범인을 숨겨두었다가 마지막에서야 "바로 이 놈이야"하고 터뜨리는 그런 추리소설이 아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찌감치 범인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이 잔혹한 범죄를 계획한 자는 피스라고도 불리는 아미가와 고이치이며, 그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행한 자는 구리하시 히로미다. 그리고 다카이 가즈아키가 히로미의 친구로서, 이들의 범행을 눈치 채고 이를 막으려고 설득하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아미가와 고이치는 히로미와 가즈아키를 차량폭파 사고로 죽게 한 후, 이 둘이 범인인 것으로 위장한다.
자, 이제 소설의 관심은 과연 아미가와 고이치의 완전범죄가 성립하겠는가이다. 아미가와 고이치는 뻔뻔스럽게도, 다카이 가즈아키를 변호한답시고 그의 동생 유키코에게 접근한 후, 자기가 계획한 사건을 르포 형식으로 세상에 발표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정의의 사도로 여기고 환호한다. 이 과정에서 요시오 노인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이 다시 한 번 상처를 입은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은가? 알고 싶지만, 알아도 되는 일이 아닌 일을 굳이 알아보겠다고 달려들어 기어코 그 일을 들춰내지 않는가? 그래서 결국 상처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더 곪게 만들지 않는가? 최소한의 배려도, 예의도 없는 이 시대에 미야베 미유키는 그렇게 묻는 것 같다.
아미가와 고이치의 완전범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 과정은 미야베 미유키다운 천의무봉의 솜씨로 스릴있게 그려진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야베 미유키가 남은 자들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소설 마지막 대목 하나를 읽어보자.
"안 그래? 안 그렇냐고! 끝나지 않았어. 마리코는 돌아오지 않았어. 마리코를 돌려줘. 마리코를 돌려달라고! 내 손녀를 돌려줘...... 하나뿐인 내 손녀야. 제발 돌려줘"
신이치는 흔들리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요시오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가만히 있자고 생각했다.
비명에 가까운 소시를 지르며 요시오는 신이치를 밀쳐버리고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마리코는 돌아오지 않아. 이제 돌아오지 않아...... 돌아오지 않을거야."
신이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요시오에게 팔을 뻗었다. 언젠가 노인이 그에게 그랬듯이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3권 529~530쪽)
손녀를 돌려달라면서 소리 지르며 흐느끼는 노인을 신이치는 안아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아니, 그런 순간이 하나 더 있었다. 소설을 거슬러 올라가 조금 더 앞부분의 대목을 더 읽어보자.
신이치는 울었다. 길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아리마 요시오는 신이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누군가의 팔에 안겨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주 억세고 따스한 팔이었다. 그것은 단지 부모나 어른의 팔이 아니었다.
고통스런 길을 함께 걸어갈 동지의 팔이었다.(3권 282쪽)
이 엄혹한 세상에서 아이든 노인이든 누군가의 팔에 안겨 마음에 꾸역꾸역 눌러두었던 울음을 터뜨릴 수 있다면, 아직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살면서 누구나 마음 찢어지는 고통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되는 법. 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우리네 삶에서 그런 고통이 어떻게 치유되는지를 나는 확인한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다시금 묻게 된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아, 나는 인생의 추리소설을 만났다.
미야베미유키,
모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