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전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군인들에게 특히 더 권장되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전쟁 통에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매일 밤 가족들과 함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극복했고,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을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며 버텼다. 그레이 박사와 에덜린은 제인 오스틴의 글을 사랑했고 등장인물에 대한 대화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제인 오스틴은 이들의 슬픔을 덜어내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P69

햄프셔주의 초턴이란 작은 마을에 8명의 제인 오스틴 열혈팬들이 뭉쳤다. 나이도 제각각, 직업도 제각각인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제인 오스틴을 사랑한다는 것뿐. 당시 초턴에는 그녀의 책을 읽고 방문하는 독자들이 꽤 있었지만, 방문객은 스스로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녀야 할 만큼 초턴엔 제인 오스틴을 위한 기념관도 안내문도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그녀의 흔적들마저 건물 매각으로 사라질 위기에 빠진 것이다.

초턴에 살고 있던 농부 '애덤'의 제안으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 분석이 취미인 의사 '그레이'가 뜻을 함께 했고, 이어서 제인 오스틴의 모든 작품을 열렬히 사랑했던 전직 교사 '애덜린', 그레이트 하우스의 유산상속녀로 외롭게 제인 오스틴의 영지를 지키고 있는 '프랜시스', 학창 시절 교사의 권유로 읽은 제인 오스틴에 빠져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제인 오스틴의 서가를 빠짐없이 정리하고 있는 '에비', 제인 오스틴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와 제인 오스틴과 관련된 경매에 참석해 그녀의 흔적들을 모으고 있는 영화배우 '미미', 제인 오스틴의 유산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고 미미에게 경매정보를 제공해 주는 소더비 경매 부국장 '애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프랜시스를 위해 가입한 변호사 '앤드류'가 합류했다. 이들 8명은 30파운드의 기부금을 초기 자본으로 제인 오스틴 기념관을 만들기 위한 <제인 오스틴 소사이어티>를 발족한다.

하지만 모임이 결성되자마자 위기에 봉착한다. 그레이트 하우스의 관리인 별채를 구입해서 기념관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계획은 프랜시스가 딸이라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에게 유산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 친족은 다른 회사에 그레이트 하우스를 팔아넘겨 버리는데...

 

 

웬만한 제인 오스틴의 팬들은 다 로맨틱한 성향을 갖고 있다니까요. 제인 오스틴이 거위 깃털에 약이라도 묻혀 책을 썼나 싶을 정도로 중독돼 있잖아요. P269

제인 오스틴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건강마저 따라주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책 속에 더 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녹여놓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음에도 누구보다 아름다운 커플을 만들고 그들의 밀당을 재치있고 유머 있게 담아놓아 독자들을 쥐락펴락한다. 그녀의 작품이 나온 지 200여 년이 지났건만 나 또한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땐 흥분하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빠져든다. 하물며 책 속 열혈팬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오만과 편견>, <에마>,<설득>,<이성과 감성>등의 작품속 인물들을 마치 이웃사람들 이야기를 하듯 나누며 자신의 생각들을 펼치고 마음을 위로받고 사랑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대화는 나까지도 '아, 맞아. 다아시는 눈치도 없어' 하며 대화에 끼어들게 만들 정도였다.

유명한 작가의 기념관을 만드는 과정을 담아놓은 소설이라 혹 실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8명의 회원들과 함께하는 아홉 번째 회원이 되어 그들의 모임이 성공하길 바랐다. 도대체 얼마나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면 이런 오마주 같은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문학이 주는 위대함이 아닐까 싶다. 가까운 날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만나봐야 할거 같다.

 

 

 

 

시인 김수영은 1921년 관철동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길 바랐던 가족들을 외면한 채 1942년 일본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일본에서 공부는 포기하고 시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선 오히려 전쟁을 찬양하는 연극을 연출해야 하는 굴욕을 겪는다.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들어가지만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모던보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김현경과 결혼했지만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의용군에 징집되고 만다. 허술한 틈을 타 탈영하지만 경찰에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비참한 전쟁의 실상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4.19혁명, 5.16쿠데타를 겪으며 그는 참여 시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너를 잃고 (1953)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시다. 너가 없어도 산단다. 그럼에도 그 많은 모래알 속에서 너의 얼굴을 찾고 있다. '늬가 없어도 산단다'는 결코 그의 의지가 아닌듯하다. 그러라고, 누군가 그리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의 '비애'가 아프게 와닿는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나의 가족(1954)

강한 욕망을 가진 그도 가족 안에선 딜레마에 빠지는가 보다. 순하고 편안함에 안주하는 가족의 모습은 분명 그의 의식 속에선 퇴보일진대도 그는 그 안에서 조화와 통일을 느낀다. 그래서 이 시는 '이것이 사랑이냐/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로 마무리하며 어쩔 수 없는 가족애를 드러낸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김일성 만세"(1960)

제목도 놀랍고 담긴 내용도 놀랍다. 4.19로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건만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현실에 대항해 과격하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던 시인의 자유주의 정신이 이 한 편의 시로 대변된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 방을 생각하며(1960)

혁명을 실패하고 난 후 자신을 원망하며 쓴 시 같다. 그 방엔 싸우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쓸 만큼 간절했건만, 이젠 그 방을 떠나버려 이젠 그 말이 헛소리가 되어버렸다. 시의 중간엔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라는 문장으로 혁명의 실패에 좌절하지만, 그 혁명은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보는 기대를 갖게 한 것일까. 마지막에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은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그림집이다. 그의 시에서 뽑아낸 키워드 '비애', '환희', '평온', '고독', '사랑', '존재', '참여', '역사', '현대'로 분류해 그의 시를 분류해놓았다. 이 분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의 삶이 변하고 그의 시를 관통하는 주제의 변화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삶을 읽어보니 그보다 더 자기중심적으로 산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를 참여 시인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든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참 아프다. 이 책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김수영의 시들이 가득 담겨있다. 그리고 그의 시들에 감정이 찢기고 격해질 즈음엔 어김없이 평온한 그림들이 등장해 읽는 이에게 위로를 건넨다.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책으로 손색이 없어 읽는 내내 귀한 시간을 선물받은 느낌이 든다.

 

 

 

 

 

'혼자인 스무 살 청년은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었다. 그는 싸워서 정상까지 올라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정상에 서서 자신의 <사려 없음>을 활짝 꽃피우리라'  -P25

 빅토르는 정상정복을 위해 스톡홀름에서 가장 명성 높은 미술 갤러리에 취직한다. 거짓말로 주인 알데르헤임을 구워삶으며 아장아장 걷는 그의 딸 옌뉘를 목표로 삼는다. 정상정복이 순조롭게 잘 되어가던 어느날,전에 만났던 매춘부가 10대 흑인소년을 데리고 나타난다. "얘 이름은 케빈이야", "저 애는 당신 아들이야","난 에이즈에 걸렸어"

졸지에 아버지가 된 빅토르는 그를 교외의 원룸에 숨어살게 한다. 그리고 18살이 되자 빅토르는 케빈을 데리고 나이로비로 가서 아까시나무에 그를 놓아둔 채 돌아와버린다. 사자밥이 되길 바라며.

그의 정상정복은 착착 진행된다. 옌뉘와 결혼하고 알데르헤임마저 죽게되자 그는 모든 재산을 자신이 차지한 후 옌뉘와 이혼한다.

'이제 앞길이 훤히 트인 셈이었다. 20년 11일만에 무일푼에서 거부가 된 것이다' -P44

한편 나이로비에 버려져 사자밥이 될 위기에 처한 케빈은 나무위로 올라가 밤을 지새고 졸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치유사에게 발견된다. 두 아내에게서 아들하나 얻지 못한 치유사는 케빈을 하늘에서 내려준 귀한 아들로 받아들인다. 모든 이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는 만족스런 삶이었지만, 케빈은 성인식에서 할례의식이 두려워 도망쳐 다시 스웨덴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던 옌뉘를 만나게 된다.

둘은 빅토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사랑에 빠지게 되고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우연히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를 발견한 그들은 사장 후고를 설득해 그곳 직원이 되어 빅토르에게 복수를 계획하게 되는데...

 

 

 

죽은 지 한참 된 이르마 스턴이 지금 옌뉘와 케빈의 삶속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제 독일-남아프리카 화가가 세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였다.  -P103

'요나스 요나손'의 첫 작품인 <창문너머 도망친 100세노인>을 관통한 것은 세계사였다. 그 책은 세계사를 기가 막히게 노인의 삶속에 녹여놓았었다. 이 책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 '이르마 스턴'을 책 속에 관통시키고 있다. 도망칠 여비를 위해 케빈이 훔친 그림은 복수의 성공과 실패를 좌지우지하는 열쇠가 되어 냉탕과 온탕을 오가게 만든다. 위작인줄 알고 빅토르에게 복수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치유사에 의해  그림이 진품으로 밝혀지면서  복수가 실패할 위기에 처하고 이를 지켜보는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이렇게 저자는 '이르마 스턴'이란 화갸의 작품을 교묘하게 복수의 도구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을 읽고나면 고갱과는 또 다른 따뜻한 원주민을 그린 '이르마 스턴'이란 화가가 머리속에 각인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세 사람의 복수극은 읽는 내내 킬킬대며 즐거움을 준다.또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변화하는 상황은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게 만든다. 역시나 요나스 요나손 답다.  엄청 무겁고 심각한 상황들을 그 만큼 가볍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가도 없을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에겐 즐겁고 따스하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