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가 김유정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한 여름 깊고 서늘한 우물처럼 다가온 책이 있었다.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주는 것들'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제목에 깊은 사유를 담아놓은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온기가 느껴진 우물물 같은 책,
그 책은 친구를 찾아가거나 길을 걷는 내 가방에서 여행길의 벗이 되어주곤 했다.
조금은 두껍게 느껴지는 그 무게감만큼이나 깊은 사유를 담은 책의 한 구절을 펴읽으면
길위에서의 사색과 경치가 더 큰 울림을 가지며 다가오곤 했는데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그 책을 건네준 며칠 후
'슬픔에 잠긴 약자를 위한 노트'라는 책이 세상에 나옴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약자일까 강자일까, 이 책을 택하면 내가 약자가 되어 한없이 나약해지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을 하다 약자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야말로 진짜 약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자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참 오묘하다.
강자와 상반되는 단어이기도 하고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슬픔에 잠긴 약자를 위한 노트'라는 제목처럼 슬픔은 약자에게 굉장히 어울리는 단어 같다 생각이 들었다.
약해보인다는 말을 즐거이 들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 여기저기서 승자와 강자를 외치고 있고 그에 걸맞게들 강해지고 싶고 승자가 되고 싶어하는 판에
철학가 김유정은 어줍잖게 이런 책을 들고 나왔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사유를 세상에 풀어놓고 세상과 먼 어딘가에 고즈넉히 머물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가톨릭의 수도사와도 같은 철학가라고 그를 규정짓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또 다른 사유를 가지고 다가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물소와 왜가리처럼 세상은 약자와 강자의 공존으로 이루어지는 거라고,
처진 어깨에 비에 젖은 옷을 입고 세상 어딘가를 걷고 있을 약자의 모습은 나와 이웃의 모습이기도 하고
세상 모두는 약자이기도 하다 강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김유정의 사고를 따라잡기란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준 것들'에서만큼
산을 올라야 하는 어려움을 안겨주지는 않지만 이 책 또한 나에게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의 매력이라면 깊은 산에서 캔 칡의 흙을 털어내고 씹어보라고 내미는 산골 노인네와 같은 깊음이다.
그가 말하는 약자는 강자이기도 하고 약자이기도 하며, 세상이 말하는 강자는 약자이기도 하고 거짓 강자이기도 하다.
"아무리 약자처럼 보이더라도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으면 그는 최고의 강자이다. 권력자, 아니, 신을 대할 때나
지나가는 힘없는 걸인을 대할 때나 조금도 변함없어야 한다."p.34
그가 추구하는 삶은 이런 모순 없이 흔들림 없는 것이며 세상과 함께 변모되고픈 모습일 거라 생각을 했다.
단어의 사용에 있어 별 의식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감성은 그다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은 단어였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감성에 대해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연발한 것을 보면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슬픔, 외로움, 분노, 허무, 불안 등에 대한 우리는 스쳐가는 감정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감성의 기준을 마련할 것인지를 멈추어 생각하기에 분주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 인간 일반은 자신의 삶속에서 변하지 않는 자신의 기준을 하나쯤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기준은 자신을 유지해줄 뿐 아니라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알려주기 때문이다...."p.97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어떤 기준에 설 것인지, 자신에 대한 자신의 바라봄, 다른 이와의 관계들에 대해
하나씩의 제목을 두어 설명을 해가며 차츰 내면의 깊이로 독자를 끌어가는 작가는
바른 분별과 시간의 피안에 서서 밝음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가벼워짐으로 평온에 이를 것을 권한다.
"평온함은 우리 미래의 최대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름이나 작은 계곡물과 같은 무심은 아니다.
무심은 존재를 부각시킬 뿐이다. 많은 슬픔을 경험한 자는 평온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셈이다. ...
평온함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p.173
"길을 잃으면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다. 간혹 위험하긴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가슴뛴다."p.202
강한 약자가 되는 것, 진정한 풍요를 가지는 설레임으로 다시 설 수 있도록
강자가 될지 약자가 될지 스스로 선택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절망도 만족도 아닌 생각지도 않은 다른 것, 존재, '나'이다."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