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암의 글을 꼼꼼히 읽어 나가는 동안, 나는 불분명하던 나의 사고들이 명확하게 그 방향을 얻고 추동력을 얻어나가는 느낌을 갖곤 하였다. 300년 전의 지성이 이미 사문화된 한자의 숲을 뚜벅뚜벅 걸어나와, 타성에 젖은 내 뒤통수를 죽비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

 

정민교수의 이 책은 앞서 인용한 것처럼 그의 연암독법에 해당한다. 정민교수가 읽기 쉽게 번역한 연암의 글과 그의 글을 풀어낸 정민 교수의 글은 굳이 둘 사이에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정민교수가 말했듯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은 그가 연암과 만나 나눈 대화록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나야말로 '이런 맛난 만남이 있구나'하고 감탄하고 숨을 죽이며 읽고 메모하고 베껴썼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책의 깊이에 매료되고 압도되어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는 선뜻 몇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여운 속에 그대로 머물어 있어야 한다. 내말로 섣부르게 담아내려는 시도가 무위로 끝나지 않도록 말이다.  

 

세상에 좋은 책들이 많고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박웅현이 <책은 도끼다>에서 인용한 카프카의 말처럼 '내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나를 잠에서 깨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을 경험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 버릴 수 있는 도끼'와도 같은 책이란 그 책을 통해 자신의 전존재가 크게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움켜 쥐고 있던 생각들이 단번에 전부 사방으로 흩어지고 뒤집히는 것을 경험한 뒤 다시 그것들을 추스르는 동안 얻게 된 한 조각의 깨달음은 예전 것들이지만 더 이상 옛것들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새것이되 옛것들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사람이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는가? 그렇다. 성장하고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서는 변한다. 연암 식으로 말하자면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다의 경계에서 사유하기를 경험하는 셈인 것이다.  

 

"옛것을 본뜨지 말라. 새 것을 추구하라. 그렇지만 그 추구는 마땅히 변치않을 정신에 토대를 둔 것이라야 하리라."

 

정민교수는 연암의 문장론을 압축한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에 대해 이같이 표현하였다. 연암은 '변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변치 않는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때 그가 말한 것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난 이 문제를 문장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내 삶을 바라보면 내 사유의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했다. 그리고 300년 전의 지성이 그 시대와 불화하며 쌓아 올렸던 그 사유를 지금 읽으면서 그의 글 어디에서도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과거의 고리타분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글에서 오늘 21세기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정신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연암이 말한 법고창신의 진정한 의미가 정민교수의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 살아있는 그의 글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민 교수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정민교수에게도 연암은 가도가도 난공불락이고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정체가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고 유교적인 관념에서 유일불변의 진리에 대해 웅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충분히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되 누리지 않았으며 그 시대가 옳다고 믿는 관념들을 거스르면서도 꿋꿋하게 개의치않고 살았다. 그런 그의 삶이 그 어느 누구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에 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때문에 끊임없이 견제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런 그의 삶은 후대에 와서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의 철학이론과 조우하며 '경계의 삶'이니 '유목민의 삶' '노마디즘'이니 하는 용어들로 설명되기도 했다.

그만큼 연암이 어느 항목에 깔끔하게 분류되고 결론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고 그것이말로 해석이 다양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른바 '현대적인'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약 1년전쯤 정민교수의 <다산의 재발견>을 읽고 정민교수 개인에게 감동받고 또 그를 통해 만난 정약용에게 반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 무렵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그때도 연암은 내게 도통 정체가 잡히지 않는, 바람같기도 하고 신선같기도 한 사람이었다. 동시대를 살았으며 두 사람 다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두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 교유한 적이 없으며 각자 서로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정약용과 박지원. 그때만 해도 난 무엇이든 딱 부러지게 경영하고 제자들을 길러낸 다산에게 더 마음이 끌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최근 고미숙의 원문벅역본 <열하일기>와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제는 연암에게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이 책에 담긴 25가지의 글과 그의 글을 통해 만나는 연암의 초상과 그의 사유들, 어느 하나도 값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글을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이편 아니면 저편 어느 한쪽에 갇혀 다른 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살아 왔음을 깨달았다.

연암은 그런 나의 시야를 넓히게 해 주었다. 비록 "! 참으로 훌륭한 울음터로다"로구나 하고 이를만한 너무나 통쾌하게 뚫린 시야에 펼쳐진 넓은 요동벌을 마주할 기회는 없었으나 연암의 글을 통해 개미만했던 내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다.

내 귀의 이명인지, 아니면 내가 코를 곤다는 사실을 남들은 다 알고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연암은 경계를 말하되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이를 나는 높이 걸린 줄 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이편과 저편을 오가는 장대끝처럼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심잡기에 집중하는 순간의 이어짐이 우리 인생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였다.

장대끝을 이쪽으로 기울여야 하는지 아니면 저쪽으로 더 기울여야 하느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하고 사유하는 삶, 그 자체가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중심에 '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구경꾼이 하는 소리에 따라 이리저리 장대를어설프게 움직이다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그 구경꾼이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중심,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 결과를 책임지는 내가 '사유하는 주체'임을 인식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연암은 그것을 다시 깨우치게 해 주었다. 혼란의 '사이'에 내가 있음을, 그리고 사유함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연암은 그것을 다시 깨우치게 해 주었다. 혼란의 '사이'에 내가 있음을.....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이번 여름 휴가로 떠났을 때 가지고 갔던 책이 이 책, <올드걸의 시집>이었다.

고미숙의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 열하일기>가 인연이 되어 처음 수유너머 r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 이어진 인연이 이렇게 또 다른 작가와 좋은 책으로 이어진 것이다.  

공부는 학교나 학원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제도권 밖에서 성적, 진학, 학위 혹은 사회로의 성공적인 진출이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며 과정인 공부를 위해 뜻을 모은 공동체가 있다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도권 바깥에서 뜻이 있는 누구든 참여하여  세미나도 함께 하고 강좌도 들으며  함께 공부하고 밥먹고 이야기하고 책도 내는 그런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 현실과 수유너머 r사이에는 쉽지 않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놓여 있었다. 실제로 넘어서야 하는 현실적인 한계보다 더 그 밑바닥에는 스스로 극복해야 할 심리적인 부담감도 겹겹히 쌓여 선뜻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인터넷 사이트만 부지런히 들락날락거렸다. 강좌건 세미나건 뭔가 만만하게 뛰어들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저자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수유너머 r에서 시작한 글쓰기 수업때문이었다. 오랜 망설임끝에 용기를 내어 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끔씩 수강생들의 후기며 공지사항을 읽으며 지나다가 얼마 전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휴가 때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소나무 한그루에 기대 앉아 거친 바람을 맞으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 풀어버리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 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 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그럭저럭 살 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다소 긴 부분을 여기에 인용한 것은 작가가 느끼고 겪은 그것이 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이 그저 유행가 가사처럼 통속적이라해도 그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서가 담겨 있는 까닭에 우리는 이 진부한 표현을 쉽게 쓴다. 그리고 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만날 때마다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듯 반갑고 기뻤다. 대놓고 말하지 못했으나 세상을 향해 항변하고 싶던 마음을 작가와 함께 나누며 동지애를 느꼈던 것이다. 우린 아직 소녀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노트 하나 시집 한 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도 않는 법이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의 주체'라고. "

 

작가에게 시는 힘겨운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쉼의 공간'을 제공하는 매개체였다. 먹고사는 문제에 휘둘려 일해야 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게 해 주는 작가만의 영혼의 방이었던 것이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를 읽으며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던 저자는 그것이 바로 '회의에 눈 뜨는 일이고, 곧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음을 말한다.

시가 삶을 위로하지 않고 치유하지도 않지만 시를 통해 삶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배우면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지만 견뎌낼 힘을 얻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처럼 시는 아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문제가 무엇인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삶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문제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을 만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고통과 갈등을 느끼게 하는 문제거리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길을 찾고 싶다는 갈망과 노력이 이전에는 영 보이지 않던 길들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길이 오직 외길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아갔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부한 상투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가르침이었다. 

저자가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는 말했고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시를 하나 읽으며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하며' 진실과 대면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희망과 바람을 나도 갖게 되었다. 작가가 시를 읽으며 그랬듯이 나도 타자-사람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존재까지 아우르는 - 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사람, 나라는 주체를 허물고 그 경계를 넓힘으로써 모든 사람,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감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읽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읽는 것도 책읽기의 하나라는 말이 생각났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아내를 잃고 뒤에 남은 사람은 희망과 걱정, 관심사를 같이했던 유일한 존재가, 그리고 많은 고락을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 함께 돌아보고 앞날을 함께 그려본 유일한 반려자가 떨어져나갔음을 봅니다. 삶의 연속성이 상처받고, 감정의 안정이 멈추며, 외부의 자극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갈 때까지 삶의 흐름이 중단되고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 중단된 시간은 끔찍합니다."  

 

50년간 함께 삶을 이어 온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 보다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린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남편의 귀에 속삭인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

 

앞서 인용한 글은 이 책의 저자인 헬렌이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이라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인용한 새뮤얼 존슨의 글이다. 아내와 사별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라고 한다.

헬렌은 뒤이어 C.S 루이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잃는다는 것이 단절이 아니라 순환하는 자연처럼 하나의 다른 국면이며 춤의 중단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라고 말한다. 남편의 임종모습을 서술한 헬렌을 보면 그녀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헬렌은 자신보다 21살이나 많은 남편 스코트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대 밖으로 사라진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 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보다 조금 앞서 자신들의 '조화로운 관계'밖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자신역시 스코트가 그러했듯이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위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헬렌에게 '죽음은 삶의 모험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것이 없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들이 누군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이 책을 읽었다. 다만 100세의 노인이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조용한 곳으로 가서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처럼, 스스로 음식을 끊어 자기 의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좋아했던 스코트는 그 말처럼 자신의 죽음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헬렌은 그런 스코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가 백 살로 죽은 지 8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여전히 사랑하며 이 책을 썼다. 그와 영혼을 나누며 그의 곁에서 함께 했던 50년간 삶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50년 넘게 스코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므로 이 책은 당연히 스코트에게 초점이 맞주어진, 아내 헬렌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이자 남편 스코트에게 바치는 헌사이며 두 사람이 반세기 넘게 함께 해 온 최선을 다해 살며 사랑해 온 삶의 표적들이었다.

헬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 거대한 현시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한다. 우리는 우리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부터 백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우리들 저마다의 존재 양식, 행위, 생각에 어떤 부분이든 영향을 받을 것이다.그래서 우리 부모와 형제 자매, 내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나자신이 함께 또는 따로 새겨온 표적들이 세상의 모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아마도 이 책을 읽을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

헬렌과 스코트는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의 지속>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자연 속에서 직접 밭을 일구고 집을 지으며 말그대로 돈의 논리에 지배받지 않는 그들만의 '조화롭고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존경을 받아 왔었다. 그런 까닭에 헬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가치있고 조화로운 삶의 방향성을 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헬렌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특히 남편 스코트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존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뿐 누군가를 계도하려거나 설득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글을 통해 드러나는 헬렌의 아름다움이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맑게 사물을 투영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과 너그러운 마음, 그리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동시에 감수성깊은 그녀의 인간됨에 깊이 감동하였다.  1995년 87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그녀의 마지막도 남편과 같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요즘같은 물신주의 시대에 과연 헬렌과 스코트가 이루었던 삶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삶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기억하며 꿈꾸고 싶은,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삶으로써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꿈꾸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된다.